익어간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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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간다는 것은 ~  
  • 김종례(문학인)
  • 승인 2022.09.29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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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기척도 없이 풀벌레 울음이나 소슬바람에 묻혀온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정원에 어우러진 풀잎에 수정처럼 반짝이는 새벽이슬, 그 위로 가을햇살 좌르르 쏟아지면 선명한 색채의 가을 꽃등이 골목길까지 환하다. 붉은 사루비아, 체리색 마리골드, 보랏빛 천일홍에 연미색 금화규가 조화롭게 피었다. 꽃빛보다 아름다운 건 문전옥답에서 고개를 숙이며 익어가는 황금빛 벼이삭이다. 나뭇잎처럼 과일처럼 뚝 뚝 내려앉는 가을의 일상 속, 바라보는 곳마다 신의 눈빛과 마주치고 신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찬란한 황금빛 석양 앞에서도 웬지 생각이 많아지는 구월이기 때문이리라.   
  저마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은 이들은 느낄 수 있다. 기쁨과 사랑의 열병을 치르면서 강물처럼, 별처럼 아스라이 멀어져 간  추억들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매, 돌연히 이름도 잊혀진 이들의 얼굴과 음성이 떠오르며 안부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끝내 잊혀지지 않는 흔적들은 선홍색 물감이 되어 가을의 끝자락을 아름답게 채색도 하리라. 그들이 남겨준 수많은 상념들은 갈색 낙엽이 되어 정처없이 구르기도 하리라. 우리는 익었다가 변색되어 모세혈관 드러내는 잎새들을 바라보며, 드디어 명상이나 우수에도 잠기게 될 것이다. 풀벌레 울음이나 바람소리에도 눈시울을 붉히는 연약한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숨어서 피어난 국화 앞에서 웬지 말수가 적어지며 진솔하고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대청 기둥에다 주자의 말 反日靜坐, 反日讀書 (반일정좌, 반일독서) 라는 주련(柱聯)을 붙이고 살았다고 한다. 하루의 반은 고요히 앉아 자신과 만나고, 하루의 반은 책 속에서 옛 성현과 만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이 시대에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책망 할 수도 있겠지만, 반복되는 물레방아 같은 일상을 잠시 접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고요히 앉아 명상을 한 후에야 평범한 지난날들이 경박했음을~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킨 후에야 나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무작정 오르기만 하던 길을 잠시 멈추고 내리막길도 고요히 내려다보라는 문구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흐르는 강물같은 인생행로였음을 보게 된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에 속삭이는 들바람처럼 얼마나 많은 굴욕을 참아내며 예까지 왔는가를 ~ 누구의 길 할 것 없이 굴곡 많았던 그 길은 살아왔다기보다, 견디며 인내해 온 날들임을 알게 된다. 멈추어야 비로소 깨닫는 계절의 고갯마루에서 넘침은 버리고, 채움은 비우고, 막힘은 흘려보내야 할 가을이기 때문이다. 지친 새가 날개를 접듯이,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고향으로 돌아가고만 싶은 계절이 가을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대자연 순환의 이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5월의 싱그러웠던 녹빛 나뭇잎에 수백번의 찬 이슬이 내리고서야 붉은 단풍으로 물이 드는 것처럼~ 봄부터 소쩍새가 목이 아프도록 울어대야 한 송이 가을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사람도 셀 수 없을 만큼 고통의 상처를 맛본 뒤에야, 비로소 삶의 진가를 품을 수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보내고 죽을 때가 되어서야, 맑아진 영혼으로 바닥의 진주를 볼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기에 가을은 자신을 맑은 면경처럼 들여다보며 진솔하고 겸손하게 사랑해야 할 때이다. 욕심과 아집을 조금 내려놓고 비워진 자리에 채워질 또 하나의 계절을 위하여, 낙엽 내려앉는 가을의 찻잔을 말끔히 비워내고 싶어진다. 밀쳐두었던 책 한권을 다시 펼쳐가며 마음 길들이기에 집중하고 싶어진다.          . 
  청자빛 하늘 아래서 가을을 예찬하는 수많은 시어의 배가 난무한 요즘이다. 뜨락마다 추색의 주조음이 파동치게 될 시월이 성급하게 다가왔다는 조짐이다. 삼라만상 오곡백과가 풍요로운 결실을 주고 있듯이, 우리도 내면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아름다운 가을과 함께 무르익어야 할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늙어만 간다는 서글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게 타오르는 노을이라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추풍낙엽지제 가을의 끝자락에서도 그다지 외롭지 않게 잘 지내기를 스스로 주문해 본다. 임인년의 얼마 남지 않은 날수들을 모두가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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