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그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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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그 다음날
  • 김옥란
  • 승인 2022.03.3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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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 앉아 가만히 글만 쓰고 있을 수가 없다.
글을 써서 어디에 제출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만 딴청이다. 오늘은 봄비 내린 그 다음날인 까닭이다. 나는 봄 날씨와 봄 햇빛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결국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하고 시원하면서도 온화하고 따스한 날씨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고의 생태환경이다.
마당에 나와 대빗자루를 들었다. 그리고 산장을 쓸기 시작했다. 산장 뜨락을 쓸고, 층계를 쓸고, 마당을 쓸고, 산장 별채의 뜨락과 마당과 층계를 쓸고, 황매화와 연산홍이 있는 처마 밑 꽃밭 주변을 쓸고, 거인의 얼굴 같은 큰 바위가 초록 모자를 쓰고 있는 마당을 쓸고, 그 큰 바위에 기대어 자라는 회양목 아기나무 두 그루 주변도 쓸고, 개울가 마당도 쓸고, 개울가 모래밭도 쓸었다. 물레방아를 지나 상환암 가는 길 저만큼을 쓸고, 복천암 가는 길도 저만큼 쓸고, 법주사 가는 길도 저만큼 쓸고...... 쓸고, 또 쓸고 자꾸 쓸었다. 지난가을 나무에서 떨어지고 겨우내 바람결에 날아와 켜켜이 쌓인 낙엽들을 빗자루로 쓸어모아 멀리 갖다 쏟아놓았다. 세 개의 빗자루를 번갈아 사용하며 쓸었다. 쓸고 또 쓸고 또 쓸고...... 어제와 그제, 이틀간 하늘에서 쏟아진 비가 세상을 쓸었고, 오늘은 내가 비로 산장을 쓴 것이다.
나는 비로 마당을 쓸다 보면 어느 순간 즐거움을 느끼기에 도달한다. 비로 점점 더 열심히 쓸다 보면 나는 푸욱 빠져든다. 이 즐거움에 취해서 몇 날이라도 빗자루 청소를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서서 대빗자루로 쓰는 일이 얼마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지 이 일을 해본 사람만 알 것이다. 빗자루질에서 얻어지는 이와 같은 즐거움은 사실 내가 비로 쓴 자리가 쓸기 시작 전에 바라던 대로 깨끗해졌기 때문에 오는 성취감일 것이다. 이토록 작고 소소한 성취감이 청소의 힘이리라.
사실 비로 산장 마당을 쓸다 보면 내가 비를 가지고 마당을 쓰는 것인지 비가 나를 가지고 내 마음과 영혼을 쓰는 것인지 모호해지기도 한다. 아마도 비는 산장뿐만 아니라 내 마음과 영혼 구석구석을 쓸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대빗자루 청소가 그토록 마음을 쾌적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 같다. 봄비 오신 다음 날은 빗자루를 드는 것이 최우선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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