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구나[2] : 絶命詩 / 매천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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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구나[2] : 絶命詩 / 매천 황현
  •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7.1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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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48】

생활에 비관을 느끼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 성격 때문에, ‘왕따’ 때문에 목숨을 쉽게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존립에 위기에 놓여있을 때 한 편의 시문을 남기고 절명하기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감행하고, 급기야는 한일합방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몸을 바쳤다. 여기에서는 절명시 한 편을 남기고 몸을 바쳤던 시인을 만나면서 절구 4수로 읊었던 그 둘째 수를 번안해 본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제성이 옮겨지니
구궐(久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조칙을 받을 길 없으니 눈물만이 얽히는데.
妖氣掩예帝星移    九闕침침晝漏遲
요기엄예제성이    구궐침침주루지
詔勅從今無復有    琳琅一紙淚千絲
조칙종금무복유    림랑일지루천사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구나(絶命詩)로 제목을 붙여본 절구 4수 두 번째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으로 전남 광양 출생인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다. 1883년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놓았다고 전한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요망한 기운에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얽히는구나]라는 시상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빛을 주었던 제성(帝星)까지 다른 곳으로 옮겨 가면서 그 기운은 사라지고 없다. 글쓴이는 임금이 계시는 구궐에서 조칙을 받을 수가 없으니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인은 이제 체념해 버리는 모습의 시상을 떠올리고 있다. 나라 잃은 설음 속에 나라를 보살피는 기운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구궐이 침침하여 우리 임금이 배알할 수도 없고, 주루가 더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신하들이 임금의 조칙을 받아 정사를 실천에 옮길 삼정승 육조판서가 없기 때문에 나라는 있고 궁궐은 있지만 주권이 침략자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후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했다. 지식인으로서의 한없는 자책과 부끄러움을 쏟아내고 있다. 이것이 비단 화자의 심회뿐이리오.
【한자와 어구】
帝星: 별자리 이름(제왕의 상징), 九闕: 구중궁궐(문이 겹겹이 달린 깊은 대궐), 晝漏: 낮 시간, 詔勅: 조서(어명을 적은 문서) 妖氣: 요망한 기운. 掩예: 가리다. 遲: 더디다. // 詔勅: 조칙을 받다. 從今: 이제부터 無復有: 다시는 없다.  琳琅: 구슬. 一紙淚千絲: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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