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산성 아래 첫 새마을운동 펼쳤던 잣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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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성 아래 첫 새마을운동 펼쳤던 잣미
  • 곽주희
  • 승인 2008.09.05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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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쓰는 마을이야기 - (144) 보은읍 산성2리 
▲ 1994년 8월 14일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을자랑비.

풍년농사를 약속이라도 하듯이 8월의 마지막 날과 9월의 첫째날 가을 단비가 촉촉이 내렸다.

지난 3일 잣미마을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은 사과와 고추, 참깨 등 농작물을 수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임재완 이장도 장승배기 가기 전에 있는 자신의 사과 과수원에서 홍로 사과를 수확하고 있었다.

# 산성2리 찾아오는 길

보은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청주방면으로 5분 정도 달리다 보면 곧게 뻗은 도로가 나온다.

코스모스 꽃길 도로로 유명한 이 곳에서 죄측으로 노고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이 곳이 바로 산성2리 잣미마을이다.

# 산성2리 잣미마을의 유래

산성2리 잣미마을은 백제의 옛 성터인 노고산성(395m) 아래 있는 마을이라 산성리라 하였다고 한다.

잣미마을이라는 명칭은 아름드리 잣나무가 마을에 있어서 잣미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잣나무로 홈을 파서 맞춘 마루(백인마루)가 60년대까지 보전되었으니 70년 새마을운동으로 헐리고 말았다고 한다.

보은군에서 가장 먼저 새마을 운동에 불을 부쳤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선도마을이다.

잣미란 원래 잣뫼였으나 구개음화되어 잣미가 된 듯하다.

산성2리 잣미마을은 보은읍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학림1.2리, 서쪽은 장속리, 남쪽은 강산, 중동리, 북쪽은 내북면 서지리와 접하고 있다.

본래 보은군 내북면 지역으로 노고산성 밑이 되므로 산성리, 잣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이목과 송정리를 병합해 내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성1리(송정, 구이목)와 산성2리(잣미)로 나뉘어 보은읍으로 편입되었다.

95년 취재할 당시 64가구 232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57가구 150여명이 쌀, 고추(노지 및 비가림재배), 사과, 대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봉사자로는 이장 임재완(61), 지도자 임일수(59), 부녀회장 최연심(59), 노인회장 임동수(75) 어르신 등이 행복한 마을,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잣미마을은 부안임씨 집성촌이다.

2002년 3월 30일 잣미 마을 입구에 부안임씨 감찰공파 세거지지 비석이 있다.

지금도 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유서깊은 충효마을 잣미

오장뜰 오른편에는 백봉을 병풍처럼 뒤로하고 자리잡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잣미마을이 있다.

잣미하면 노고산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바로 노고산성 밑에 잇는 마을이 잣미마을이기 때문이다.

노고산성(老姑山城)은 내북면 서지리와 경계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백제의 옛 성으로 동쪽에 머리를 맞대고 있는 함림산성과 함께 요새화하여 4km 동남쪽에 떨어진 삼년산성이 위치해 있어 구전에 의하면 이 산성이 백제 소속의 산성으로서 삼년산성에 주둔한 신라군과 싸워 패저나였다고 하며, 내외성이 거의 파괴되었다고 한다.

산성의 축조법 및 출토유물로 보아 당초 삼년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이고, 성 정상에는 물봉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독특한 구조로 물이 샘솟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복원의 따뜻한 손길만 기다리고 있다.

임재완 이장은 “어릴 적 산겅에 올라가 많이 놀고는 했다. 예전 성고가을 쌓앗던 돌로 구들장을 놓아 많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물봉에서 명주실을 띄우면 대바위까지 갔었다고 들은 바 있다”고 말한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 확산되면서 잣미 출신의 이용기 의사(李龍基義士)가 마을 청장년을 이끌고 노고산 정상에 올라가 4월 8일 밤 자시(子時)를 기해 독립만세를 외쳐 이것이 보은군 최초의 독립만세가 되었는데 지난 87년 보은유도회와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세운 의사이공용기선생의열비(義士李公龍基義烈碑)가 있어 민족정기의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인지 마을주민들은 경로효친 사상이 다른 마을과는 남다른 것을 볼 수 있다.

2005년 11월 상조회를 만든 것이 시발이다.

상조회는 예전 마을에 있던 청년회나 계 조직등을 통합해 하나로 만든 것이다.

회원이 47명이나 되는데 이는 출향인들까지 총망라해 회원으로 가입시켜서 그렇다.

상조회는 마을 애사시 상여를 매는 것부터 장례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마을의 모든 일은 다 상조회를 통해서 이뤄진다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그 전에는 청년회가 마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을 규합해 일을 했다고 한다.

상조회는 상가집에서 장례를 마치고 고마움의표시로 주는 감사의 표시를 받아 지금 1천여만원의 기금을 모았다고 한다.

상조회 회장이기도 한 임재완 이장은 “상조회는 부녀회와 함께 격년제로 한번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열어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한번은 상조회와 부녀회원들이 마을어르신들을 모시고 효도관광을 다녀온다”고 말한다.

부녀회도 예전에는 농사를 도와주고 받은 돈으로 기금을 마련 마을 일에 앞장섰지만 지금은 고령화되어 예전처럼 농사 등 힘든일은 못하고 50명의 회원이 빈 농약병이나 폐비닐 등 폐품을 수집해 판매한 돈으로 기금을 마련, 마을 경로잔치나 효도관광 때 십시일반으로 보태고 있다고 한다.

# 새마을운동 효시 잣미마을

오장뜰의 대부분은 구이목 주민 소유였고 얼마 되지 않은 밭에서 얻는 소득으로 잣미 마을주민들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잣미는 새롭게 달라졌다.

처음 최기환씨가 그때만 해도 흔치 않던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묘목은 물론이려니와 수박, 토마토, 각종 채소를 재배하면서 고소득을 올렸고, 이를 마을 주민에게 적극 권장해 비닐하우스 재배가 붐을 일으켜 주민들의 소득이 점차 나아져 군내에서 최고 소득시범마을이 되었다.

최기환씨가 혼자 연구하며 경험을 통해 얻은 비닐하우스재배법은 전국 농가나 연구기관에서도 관심을 갖고 견학을 올만큼 최첨단을 달렸고, 보은자영고(구 보은농고) 강사로도 초청강연을 했다고 한다.

그때 얻은 산성고추의 명성은 지금도 무시하지 못한다. 처음 새마을지도자를 맡은 김월련씨가 마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못사는 마을이라는 오명을 씻고 비닐하우스로 군내 최고 소득마을을 이룩한 주민들은 단합이 잘 되었다.

새마을운동 도(道)우수마을로 지정된 잣미는 충북도의 지원을 받아 낙후마을 새마을지도자 현지교육장으로 지정될 만큼 마을 안길 포장이나 마을회관 건립 등 새마을사업이 활기를 띄었고, 새마을지도자 김월련씨는 동남아시아 3개국을 순방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새마을사업과 고소득을 올리는 비닐하우스 재배법을 슬라이드로 촬영, 1976년 12월 대통령에게 월간 경제동향보고에서 브리핑한 결과 김월련씨가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수상하는 한편 마을에 하사금 500만원이 내려졌다.

하사금으로 주민들은 소득증대를 위해 1천300평의 마을 공동 육묘장을 만들어 이용했으며, 77년에는 외국인 홍보마을로 지정돼 많은 외국인과 북한 귀순자들이 잣미를 방문하는 등 전국에서도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범죄 없는 마을로도 선정될 정도로 마을주민의 단합은 더 비길 데가 없었으며, 식생활개선 시범마을로 선정돼 마을회관의 영양센터를 요리 강습장과 공동취사장으로 이용했다.

또한 새마을문고는 마을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이용, 학습효과를 높이는 곳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 마을안길 재포장, 마을회관 리모델링 바람

그 어느 마을보다 먼저 지붕개량, 도로포장, 담장개량까지 앞서 자립마을이 되어 안정을 찾았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주민숙원사업은 또 있게 마련이다.

마을안길이 노후화돼 콘크리트가 패이는 등 차나 농기계가 다닐 때 불편하다는 것이다.

다시 콘크리트나 아스콘으로 포장되기를 주민들은 바라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마을회관에서 많은 것을 햇지만 노후돼 페인트 칠이 벗겨지고 2층은 사용하지 못하는 있어 다시 페인트 칠을 하고 리모델링을 통해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게끔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임재완 이장은 “주민들이 생활하는데 큰 불편은 없다. 경로당도 새로 짓고 해서 그 곳을 사용하고 있지만 노후화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마을회관을 다시 리모델링해 헬스기구도 설치하는 등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말한다.

잣미 마을 사람에게는 ‘하면 된다’는 의지와 ‘할 수 있다’는 힘이 엿보인다.

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쾌거를 이룩한 잣미 마을주민들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더 발전된 마을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옛 화려했던 명성을 다시 찾는 잣미마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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