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은 훈민정음의 본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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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은 훈민정음의 본고장
  • 송진선 기자
  • 승인 2008.08.29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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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한글 거리 만들자” 지역에서 움직임 일어
▲ 복천암 신미대사와 훈민정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복천암 월성스님(가운데)과 속리산 수정초등학교 조철호 교장(왼쪽), 강상원 박사(오른쪽)가 신미대사와 관련된 자료를 살피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신미대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속리산을 훈민정음의 메카로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 주목을 받고 있다.

수정초등학교 조철호 교장을 비롯해 이종란 속리산면장 및 속리산관광협의회 및 주민자치위원회 등에서는 신미대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전문가를 만나는 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미 세종대왕의 왕사였던 신미대사에 대해서는 한국세종한림원 총재 강상원 박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고 단정하며 신미대사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복천암 박월성 큰 스님 또한 3, 40년간 신미대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임을 주장한 바 있다.

이에따라 속리산 주민들은 속리산의 유서깊은 절 복천암에서 기거하며 불도를 닦은 신미대사가 우리지역 인물인데 당연히 속리산을 훈민정음의 고을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주민들은 속리산 상가 간판과 음식점 메뉴판 등을 훈민정음체로 바꾸고 훈민정음 거리로 특화시킨다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속리산 수정초등학교 조철호 교장은 이미 신미대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앞서 다양한 이벤트를 계획하고 있다.

조철호 교장은 “우리지역에 신미대사와 한글이라는 아주 소중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이를 발굴하고 살리지 못했다”며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각인시키는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와 전국 사투리 대회, 어가 행차 시 맨 앞 대열에 서는 취타대 운영 등의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해 속리산을 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속리산 관광경기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강상원 박사는 월성 큰스님의 지원을 받아 가제 '훈민정음의 비밀을 밝힌다'라는 책을 10월9일 이전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훈민정음.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는 가운데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한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승하하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물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밀전정법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密傳正法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하지만 유생들의 줄기찬 반대로 인해서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혜각존자'라는 단어만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존자'라는 명칭은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 김씨 족보에 '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의 문구가 나오는데 직역하면 '守省(신미대사 속명)은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복천암 월성스님과 강상원 박사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라는 사실의 뒷받침 근거로 “조선은 유교국가라 한글창제 실험용 책도 당연히 유교적인 내용이 됐어야 했지만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곡과 문장이다. 이것 역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미대사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범어(梵語)와 티베트어로 된 불교경전에 정통했던 대학자였으므로 혜각존자라 할 만하다. 이러한 인물이니까 세종 사후에도 세조(世祖)가 불교승려인 신미를 만나러 속리산까지 찾아왔던 것”이라고 부언했다.

편집자주
☞ 본보는 앞으로 신미대사와 훈민정음과 관련한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해 속리산이 훈민정음의 메카로 보은군이 훈민정음 고을로 재 탄생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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