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물림 업소를 찾아서(9) - 은하목공소
상태바
■ 대물림 업소를 찾아서(9) - 은하목공소
  • 송진선
  • 승인 2007.04.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대 이은 목수 집안 역사로 치면 100여년
대패, 끌, 톱, 망치, 먹줄, ㄱ자…. 목공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비들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목공소를 흔히 볼 수 없다. 찾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런 장비도 구경하기 힘들다. 전기 스위치만 꼽으면 기계가 알아서 나무를 켜고 나무에 구멍을 뚫는다.

옛날 큰 나무를 하나 켜려면 톱의 양쪽을 사람이 잡고 밀고 당기기를 얼마동안은 해야 나무가 반으로 갈라졌다. 텔레비전이나 만화에서 흥부가 부인과 박을 타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딱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정겨운 광경이 떠올려진다. 아마도 옛날 목공소의 모습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기계가 대신 앉아있고 슬근슬근 톱질하던 소리대신 요란한 기계소리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그 옛날의 정겨움이 떠오르는 목공소가 있는데 그것도 할아버지에서 시작해 아버지를 거쳐 현재의 아들까지 3대째 이어오는 것이다. 100여년의 장인정신이 묻어있는 은하목공소(대표 임의혁, 52)의 역사를 소개한다.

# 지금도 성업 중
어느 것 하나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회사에서 대량으로 제조되는 것이 일반화 된 사회다.

당연히 사람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는 것은 가격이 고가여서 대량으로 값싸게 공급되는 것과 경쟁력이 떨어져 어느 새 수작업으로 하는 것들이 뒤안길로 밀려나고 그러다 없어지고 있다.

수작업으로 한 것은 사람냄새도 나고 장인의 기교도 엿볼 수 있고 장인의 특징도 묻어나 값어치로는 따질 수도 없지만 대량, 보다 저렴한 것이 대세인 세상에서 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은하제재소 자리에서 교사리 코끼리 식당 옆으로, 그리고 올해 1월 지금의 이평대교 옆에 자리한 조립식 건물까지 세 번 이사를 한 은하목공소를 방문해 창문이나, 방문까지도 회사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기성제품이 판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만큼 목공소에서 일할 거리가 줄어든 것이다. 지금 일하는 것은 사찰이나 제실, 그리고 한옥이나 흙집을 짓는 사람이 일부 창문이나 방문 등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해오는 것이 고작이다.

다행히 은하 목공소는 예전에 비하면 형편없이 일거리가 줄었지만 그래도 문을 닫지 않을 만큼 드문드문 주문이 있어 임의혁씨의 작은 작업공간에서는 나무를 자르는 소리며, 만들어 놓은 창살에 창틀을 맞추느라 망치로 치는 소리 등 정겨운 소리들이 가득하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벌어진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뽀얀 나무가루들이 작업장 안을 떠돌아다니는 게 보인다.

바닥에는 기계톱이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톱밥들이 쌓여있고 대패질로 돌돌 말린 나무편들이 굴러다닌다.

그리고 공간 사방에는 그 옛날 사람이 일일이 했을 톱질을 대신하는 기계톱과 일일이 구멍을 냈을 구멍 파는 기계, 각목, 만들어 놓은 문살, 문틀이 목공소의 냄새를 풍겨준다.

# 부친 법주사 팔상전 문 제작
은하목공소의 시작은 임의혁씨의 할아버지(고 임순구옹)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먹고 살기가 여간 빠듯한 게 아니어서 임의혁씨 할아버지는 그저 먹고 살 것을 찾기 위해 그의 외할아버지 밑에서 처음 목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내속리면 삼가리가 고향인 그의 외할아버지(고 이재홍 옹)는 당시 도편수를 지내 속리산 수정암을 지을 정도로 잘나가던 대목이었고 친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신참이었던 셈.

그렇게 두 할아버지가 옛날 은하제재소 옆에 세를 얻어 은하목공소라는 이름의 가게를 내고 같이 일을 하면서 슬하의 아들 임상빈(78)씨와 딸 이완이(76)씨를 혼인, 그의 아버지가 물려받고 그 다음 임의혁씨에게까지 이어졌다.

아버지 임상빈씨 역시 법주사 팔상전을 2층부터 5층까지 문을 짰을 정도로 대목이었다.

그런 실력이 어디가나 지금도 아들 임의혁씨에게 물려줬지만 가끔 목공소에 나와 아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기도 하고 바쁠 때는 아들의 손을 거들어 주는 등 대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3남3녀 중 아들로서는 막내였던 임의혁씨는 15세 때인 보은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나무를 만지기 시작했다.

당시 아버지는 군내 초등학교의 책걸상을 주문받는 등 일거리가 밀려 목공소에서 일하는 인부가 아버지 외에도 3, 4명이 더 있어도 항상 손이 크게 모자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아버지 작업장인 목공소에 나와 작업 과정 중 제일 쉬웠던 구멍파는 일부터 했다.

처음에는 그냥 시간을 내서 아버지의 일손을 좀 돕는 정도였는데 어깨 너머로 아버지가 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아버지도 자식 중에는 그래도 눈썰미와 손재주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알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문 제작과정을 하나하나 세밀히 가르쳐줬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 문하생이 된 임의혁씨는 그렇게 실력을 쌓아 목공소에 나와 일을 하기 시작한 지 1년 후 한옥 문짝을 짤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이런 일을 배우는 사람이 4, 5년 걸려야 문짝을 짰던 것을 1년 만에 해냈던 것이다.

목공소에 들어오면 청소부터 하고 사용할 나무를 말리는 등 심부름을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좀 됐다 싶으면 끌로 구멍내는 것을 배우고 대패질도 배우고 장부를 만들고, 금 그리기를 배운다. 여기까지 하는데 4, 5년 걸리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문짝을 짜는 등 그야말로 일다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임의혁씨는 아버지 작업장에서 일을 배웠으니 4, 5년 걸리는 과정을 상당히 단축, 1년 안에 모두 끝내고 본격적인 목공인이 된 것이다.

# 주로 제실, 사찰 문 제작
법주사 팔상전의 문을 제작할 정도로 대목인 아버지 밑에서 실력을 키운 임의혁씨도 실력이 어딜 가나 그의 작품들도 사찰 문을 제작할 때 빛을 발한다.

특히 어렵다는 연꽃문양의 문살을 만드는데 그의 실력이 출중하다. 연꽃 문살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전국에서 20명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그가 만든 연꽃문양의 문살은 인근 옥천 청산이 백운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이외에 연꽃 문양은 아니지만 공주 계룡산 학림사, 괴산 청천의 대양사 문을 제작했고 지난해 여름에는 속리산 동암 것을 제작했으며 겨울에는 외속리면 하개리 선씨가옥 내 고시생들이 사용하는 곳의 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들이 곳곳에 걸려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며 지금도 어딜 가면 문만 눈에 들어와 사진으로 찍어둘 정도로 직업정신을 보인다.

#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임의혁씨야 어릴 때부터 대패를 손에 들고 끌을 손에 들고 일을 해봤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목공인이 됐지만 부인 박와순(49)씨와의 사이에 둔 2남 중 장남 영균(28)씨가 충북대 건축과를 졸업 건축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임의혁씨는 자신과 상의하지도 않았고 또 힘든 일이어서 안 시키고 싶었는데 아들이 건축을 전공하고 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보이지 않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곧이곧대로 표현을 한다면 공부하기가 싫어서 친구들이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갈 때 임의혁씨는 대신 대패를 들어 ‘가방 끈이 짧다’.

자신의 형제들이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을 보면 자신도 학교를 갔다면 고등학교까지는 마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고 한 때는 친구들이 부러워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가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그래도 목공일을 하는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천직인 것이다. 1995년 나무장사로 눈을 돌리기도 하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만두고 본업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38년간 나무와 친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대패질, 끌질, 톱질 등 모두 수작업으로 하던 것이 이제는 기계가 해줘 그나마 손이 나고 작업이 수월해져 혼자서도 꾸려갈 수 있는 것에 만족해하고 있다.

대목장이었던 외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수준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는 그는 이 분야의 대목장 문하생을 지낸 경력이 없다 뿐이지 아직 53세라는 젊은(?)나이로 보면 대목장이 될 충분한 여유가 있다.

처음에야 누구든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처럼 은하 목공소 또한 가족들 밥이나 먹이려고, 자식들 공부나 가르치려고 한 것이 버려지지 않고 할아버지 대부터 시작돼 3대를 이어와 38년 경력을 쌓는 동안 당장 대패를 집어던지고, 망치를 내팽개치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외부와 소통하는 문을 다루며 나무는 어떤 것을 써야 나무좀이 쓸지 않고 오래가고 또 어떻게 자연건조 시켜야 뒤틀림이 없는지 배우면서 쉬 작업장 문을 닫을 수가 없었고 회사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장인정신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지금까지 그를 지탱하게 했다.

그리고 문살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는 아름다움과 문이라는 것이 내부와 외부를 이어주는 소통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져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잊으며 조상의 얼과 지혜가 온전히 숨쉬고 있는 전통문화까지도 잊혀지고 사라지고 있는 세상에서 올곧게 자신만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그에게서 장인이라는 칭호가 새삼 크게 와닿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