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 전공한 아들이 40여년 역사 승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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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 전공한 아들이 40여년 역사 승계해 
  • 송진선
  • 승인 2007.02.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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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업소를 찾아서(7)-김천고물상
가업을 이어가는 업소의 이어가고자 하는 고집이 대단하다. 돈이 덜 되도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니까 처분도 어렵고 또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곳이고 손때가 묻어있는 것이어서 쉽게 처분하지 못하는 속사정이 크다.

그러면서도 가업을 이어간다는 사명감이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에 가업은 유지되고 대물림이이 되는 것 같다.

김천 고물상도 대물림한 아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쉽게 생각하면 어디 대물림 할 게 없어서 고물 수집업을 대물림하겠느냐, 직장을 구해도 찾지 못하니까, 마땅히 기술도 없고 실력도 없어서 할 게 없으니까 하겠지 하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물림을 받은 아들은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했다. 그것도 경영학을 전공했다. 고물수집업을 기업으로 보면 이미 아들은 경영학 이론까지 갖췄으니 그야말로 가업인 고물상을 경영하겠다는 자부심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큰아들 진우현씨는 대학 재학 중에도 다른 직장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 업을 물려받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 고물 수집업 인기직종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흔히 고물수집업을 힘들고 지저분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다.

이유가 뭘까. 아마도 못써서 버려지는 것들이고 또 아무데나 버려져 있는 것들을 수집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고물수집 하면 과거 넝마주의가 연상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고물수집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이같은 외형상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더욱이 경제난으로 직업을 구하기가 힘들고 구조조정 등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특별한 기술 없이 쉽게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에 고물수집업은 어쩌면 인기직종의 하나로 떠오른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지경이다.

그래서 고물수집업소가 늘어나고 있고 보은군내에도 8군데에서 영업이 이뤄지고 있다.

그 중 김천고물상이 가장 오래됐다.

이름이 김천인 것으로 봐서 김천 분이려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사업을 시작한 진채호(72)씨가 김천태생이란다. 부인 김정순(71)씨와 결혼해 1964년 보은으로 들어와 처음 농기계점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인 1965년경에 김천 고물상이란 상호로 고물상을 시작했는데 고 박기종 옹이 부인 김점순씨의 이종사촌 오빠인 덕에 사용료 한 푼 내지 않고 지금 한양병원 뒤 주차장 부지에서 고물상 간판을 내걸고 고물 수집업을 시작했다.

두 부부가 직접 고물 수집에도 나서고 넝마주의들이 수집해온 고물을 사서 이를 대전 등에 판매했다.

12년간 옛날 시내버스 주차장에서 고물상을 운영하고 삼산1리 현재의 자리를 구입해 이사를 나왔다. 돈을 많이 번 셈이다.

두 부부가 열심히 고물수집업에 매달리고 고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한 푼이 아까워 절약하는 생활을 해온 것이 큰 바탕이 됐다.

물론 고 박기종 옹이 임대료 한 푼 받지 않고 음으로 양으로 이종사촌 처제를 도운 것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마음으로 큰 부자가 된 김천 고물상의 진채호·김정순 부부는 고물 수집업에 재미를 붙였다.

# 리어카 수집상이 20여명에 달해
처음 고물상을 열었던 60년대에는 넝마주의가 수집해온 고물이 주를 이뤘다. 물자가 흔하지 않아 고물도 거의 없었고 수집된 고물은 지금 보면 거의 쓰레기나 진배없지만 당시에는 아주 고가에 취급됐다.

20여명의 다리 밑이나 광암 재건학교에서 생활했던 넝마주의자들은 고물을 수집해 김천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자녀들 대학공부까지 시킬 정도였다. 지금은 모두 작고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넝마주의가 없어진 후에는 리어카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한때 리어카 수집상도 2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리어카 수집상들은 각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고물을 수집해왔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고철은 거의 없었고 고무신, 삼베, 장판 등이 주를 이뤘지만 워낙 물자가 귀해 고물 수집도 어려워 고물상 규모가 작았다.

그리고 산업화가 되면서 양은, 구리 등이 고가품이었고 비닐이 나오면서 고추 비닐이 그 중 고가에 판매돼 진채호 사장은 각 마을을 다니며 고추 비닐 등 각종 비닐을 수집했었다.

당시에는 종이도 흔하지 않아 종이가 고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길가에 버려진 휴지가 지금은 쓰레기이지만 당시에는 고가의 고물에 해당돼 돈으로 교환이 가능했다.

고물 한 관에 30원씩 해도 화폐가치가 높아 지금과 비교하면 꽤 고가였다. 그야말로 고물수집업이 지금보다 훨씬 나았던 것.

교통 수단의 발달로 차량을 구입한 진채호 사장은 대구, 충주, 장호원, 부여까지 출장, 고물을 수집해왔고 부인 김정순씨는 리어카 수집상들이 가지고 온 고물을 저울에 달아 그날그날 현금으로 구입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리어카 수집상들의 어려움을 알고 있던 터라 외상구입이 없었다. 혹시 현금을 미처 준비해놓지 않았을 때에는 이웃에 잠깐이라도 빌려서 리어카 수집상들에게 줄 정도로 신용을 지켰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김천 고물상의 전통이 됐다.

# 3남 1녀 모두 대학공부 시켜
많은 고물상들이 보은에서 고물상을 해서 번 돈으로 청주 대전으로 나가 땅도 사고 집도 사서 지금 보면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은데 진채호 사장도 70년대 대전으로 나갈 생각도 했으나 당시 현금을 집에 두고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30년 전만 해도 삼산리의 땅 값이 청주 변두리 땅값보다 더 비쌌다는 것. 그래서 집 주변 땅을 더 넓히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30년이 흐른 지금 하늘과 땅 차이가 날 정도가 됐다.

사실 열심히 개미같이 일하고 본업에 충실하고 아끼며 생활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 가슴이 아프지만 평생의 업인 고물상에 만족하고 있다.

워낙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내돈이 많지 않아 은행에 대출받아 집을 지으면 뭐하나 싶어 옛날 집 그대로 유지한 채 입식부엌 설치, 기름보일러 등 생활하기에 편리할 정도로만 고쳐서 생활하고 있다.

3남 1녀 모두 고물을 팔아 모은 돈으로 대학공부를 시켜 큰아들 우현(43)씨는 청주대학교 경영학을 전공했고 둘째 아들 우식(39)씨는 청주대 법대를 졸업했고 셋째아들 우택(36)씨는 충북대 경영학과 출신이고 막내딸 선영(33)씨는 청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자로 대학 강사로 있다.

자식들 공부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은 김정순씨는 돈을 벌었으면 얼마나 벌었겠느냐며 자식들 모두 말썽부리지 않고 의좋게 잘 자랐고 공부도 열심히 해 그게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이라고 말한다.

학교 공부 중에도 아버지를 도와 고물을 수집하고 정리했던 큰아들은 대학교 졸업 후에도 나가지 않고 아버지 업을 물려받겠다고 공언하더니 그동안 어깨 너머로 고물을 보는 눈을 길러 알아서 척척 고물상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진채호 사장이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큰아들 우현씨는 “그래도 40여년간 고물 수집으로 잔뼈가 굵은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 아들은 고물사고 어머니는 달고
96년 큰 사고로 많은 시일을 병원에서 보낸 진채호 사장의 뒤를 큰아들 우현씨가 이어받았어도 어머니 김정순씨가 하는 일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수집상들이 수집해온 고물을 저울로 달아 현금으로 바꿔주는 일. 처음 남편과 시작했을 때 분업으로 했던 것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우현씨의 어머니 김정순씨는 고물상을 물려받은 큰아들 우현씨에게 이르는 말이 정직하라는 것.  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저울 눈속임을 하지 마라는 것이다.

요즘 경제난으로 학교 현판까지 고물로 훔쳐 가는 세상이 되다보니 고물을 사들이는데도 조심스럽다.

큰아들 우현씨도 부모님이 정직하게 운영해온 김천고물상을 이어가면서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뢰, 정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비록 수집상들이 수집해온 고물을 산 고물이 자칫 사건에 연루되기라도 하면 40여년 김천 고물상의 전통과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되기 때문이다.

마당 가득 쌓여있는 고물 속에서 정직이라는 진주를 캐면서 돈이 되는 고물을 가려내 일한 만큼 버는 것에 만족해한다.

여름이면 뜨거운 햇빛이 차단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고 겨울이면 보일러가 가동되는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워 직장을 구하고 싶어도 구해지지 않고 또 잘 나가던 샐러리맨들이 구조조정으로 잘리는 세상에 그래도 자신은 가업도 잇고 돈도 벌 수 있는 평생 직장을 마련해 줬으니 오히려 부모님이 감사하다.

우현씨는 요즘 남동생 2명과 함께 옛날 고철더미에서 생활했던 추억도 되살리고 우애도 돈독히 다지며 생활한다. 현재 아내는 이평리에서 계량소를 운영하고 두 아들과 함께 현실에 만족하면서.

그러니 사는 것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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