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속리면 장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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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속리면 장내리
  • 보은신문
  • 승인 2006.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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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산 옥녀봉 아래 장안 마을. 산이 가래처럼 생겨 보습산이라 했으며 장내1리 쪽에서는 중이 삿갓을 쓰고 도포를 활짝 펼친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장내1리는 면사무소가 있는 2리에서 서원 계곡 쪽으로 가다보면 삼가천 앞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37가구 74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으며 도로변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장안정'이 있어 마을 주민뿐 아니라 오고가는 이들에게 좋은 쉼터가 돼준다.

마을 앞 유래비는 지나는 이들이 차를 세우고 읽어볼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마을에는 아직도 마리아 상이 문 앞을 지키는 성당이 남아 있지만 폐허가 된 지 오래다. 어려웠던 시절 성당에서 주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대주기도 하는 등 많은 교인들이 드나들던 곳이 이제는 서늘한 가을 바람만 주위를 맴돌다 떠나갈 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장내1리 마을은 동학 취회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면소재지인 장내2리는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로 6개 반이 있다고 한다.
마을 앞 넓은 들녘은 추수를 앞둔 가을철이면 노랗게 익은 벼이삭들이 황금물결을 일으켜 보고만 있어도 뿌듯한 마음에 배가 절로 부를 정도다. 국도변과 연결된 마을 진입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농가가 모여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기에도 규모가 큼을 알 수 있다.

현대식 가옥들이 많아 부촌이냐고 물으니 주민들이 검소해서 제 살림을 알뜰하게 잘 꾸리며 살아간다고 한다.

장내2리에 과수 농가가 몇 농가 있을 뿐 장내리는 벼, 고추 재배가 주를 이루며 특수작물을 경작하는 농가는 없었다.

장내 2리에 속해 있는 장터는 예전에 장이 섰던 곳으로 국도와 관광도로 분기점에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시외버스도 정차하는 버스 정류장과 장안 보건진료소, 식당, 슈퍼, 이발소 등이 있으며 행정구역상 하계리 구역이긴 하지만 농협과 연쇄점, 우체국도 있어 주민들이 생활하는데 편의를 더한다.

장내1리 마을 봉사자로는 심학웅(66) 이장과 김석기(80) 노인회장, 이상영(39) 새마을 지도자, 김병남(38) 부녀회장이 있으며, 장내 2리 마을 봉사자로는 조상래(52) 이장과 김종수(70) 노인회장, 엄선용(41) 새마을 지도자, 고옥진(50) 부녀회장이 있다.

# 원 지명은 장내가 아닌 '장안'
장내리의 원래 지명은 장안이다. 보은의 지명지에 보면 말을 놓아기르던 마장(馬場)이 있었는데 마장 안쪽에 마을이 있어 장안 또는 장내(場內)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평리 사각면(思角面)의 구인리를 병합하여 장내리(場內里)라 하고 1947년 외속리면에 편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웃말(장내 1리)과 아랫말(장내 2리)로 이루어진 단일 마을이 긴 장(長)자 편할 안(安)자를 써서 장안(長安)이란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일제 식민지 시절 서울 장안을 표기하는 긴 장자를 쓰지 못하게 해 지금의 장막 장(帳)자를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장안 마을은 60년대 후반 웃말은 장내 1리로, 아랫말은 장내 2리로 분구가 되었으며 당시에는 200호가 넘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장내 2리 김종수 노인회장이 부친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마을에 집이 몇 채 없었다고 한다. 장내 2리에는 현재 20호 정도가 살고 있는 방천너머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전부 가시숲이어서 집이 없었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같은지는 알 수 없으나 장내 1리 심학웅 이장은 예전에는 웃말의 집들이 산 아래 있었으며 기와집이 많고 부자가 많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땅을 파다가 기와 파편을 발견한 적이 있어 그 말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했다.

장터는 집은 없고 주막이 하나 있는 정도였으나 50년대 말 무렵 장이 처음으로 서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 주민들이 장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장터가 형성되었다.

장내2리 조상래 이장은 어릴 적 장 구경을 가면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꽤 큰장이 섰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주민들이 곡식을 장에 내다 팔기도 하는 등 장터는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60년대 말 즈음부터 장이 안 서고 가게들만 장사를 했다고 한다.

동학교도 취회시 "서울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 장안이 장안이다"라는 동요가 있었을 정도로 장안이라는 명칭은 조상 대대로 불려져온 역사성을 가진다.

군내뿐 아니라 다른 도에서조차도 장내리는 장안으로 통한다. 장내라고 하는 것보다 장안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더 잘 안다는 말이 사실이다.

몇 해전 작고한 장내2리에 살던 이흠수옹은 군지 보정작업을 하던 중 외속리면이 원래 '장안면' 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심학웅 이장은 그런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웃말과 아랫말(새터라고도 불리었음), 장터는 장안이었다. 장내 1리 유래비에는 "조선조 말에 장안을 한자로 잘못 표기하여 장내(帳內)리로 문서상에는 기록되었으나 실생활에서는 조선조이래 줄곧 장안으로 불러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 동학 취회지가 있던 역사적 유적지
장내1리 마을에서는 동학 취회지가 있던 곳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과 장승을 볼 수 있다.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속리산 아래 보은을 근거지로 하여 오랜 시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머무는 동안, 주민들의 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고 마을 앞으로 도로가 통해 있어 내회(來會)가 편리한 길목의 요충지 보은 장안을 거사 장소로 결정하고 동학도들이 이곳에 집결토록 했다.

동학교도들이 20여일 간 지배층의 부정 부패와 외세의 침투에 강력한 항쟁을 벌였던 곳으로 동학의 대도소를 관아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평지마을의 특정한 장소에 정한 것은 매우 의미가 깊으며 동학 장안집회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를 반영한다.

1893년 1월 옥녀봉 아래 설치한 동학본부였던 대도소가 있었던 터는 현재 모두 농경지로 변하였고 당시 돌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현존한다.

심학웅 이장은 이 돌무더기에 관해 다른 견해를 내비치기도 했다. 밭을 논으로 개간할 당시 땅에 돌이 워낙 많아 그것을 다 갖다버릴 수가 없어서 그 돌로 둑을 만들어 쌓는 것을 본인이 직접 봤기 때문에 돌성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수만 명의 동학교도는 마을 앞 냇가(그 당시 만세동천이라 부름) 평지를 중심으로 움막을 짓고 집결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냇가가 좁고 수량도 적었으며 주변이 평지로 되어 있어서 밭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 냇가의 폭이 넓고 깊은 현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 동학도들의 집결이 가능했던 것이다.

심학웅 이장의 말에 따르면 10여 년 전 충북대 교수 한 사람이 마을을 찾아와 놉을 얻어 현재 장승이 세워져 있는 곳을 1미터씩 군데군데 팠다고 했다. 그랬더니 땅 속에서 성 기초 혹은 집 주춧돌로 여겨지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 후 장내 취회지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 주민들의 노력으로 마을 발전 일궈
장내리는 달밤에도 가뭄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땅에 자갈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대추나무가 많아 대추가 주산물이었다. 그러다가 삼가저수지가 생기고 경지정리가 되면서 밭을 논으로 개간해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경운기가 아직 출시되기 전이라 주민들이 소를 이용하거나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 날랐다고 한다.

장내2리는 얼마 전까지 벼 생육화단지로 벼농사를 선도적으로 해온 마을이기도 하다. 또 여성농기계 시범단지로 선정돼 전국에서 최초로 여성이 기계화 이앙을 실시했으며 당시 부녀회장을 맡고 있던 송태순(63)씨가 이앙기로 모를 심는 모습이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은 환갑을 넘겼거나 그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2,30년 전 풋풋하던 새댁이었을 적 마을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장내 2리 부녀회원들.

회원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집에다가 막걸리, 잡화 등을 놓고 장사를 했다고 한다. 또 보리 베기, 모심기 등 다양한 공동작업을 통해 부녀회 기금을 마련 그 돈으로 지금의 마을회관 부지를 매입해 마을에 희사를 했다.

젊은이들은 모를 것이다. 어린 시절 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자치기를 하고, 군것질 거리를 사려고 들락날락한 구판장이 있던 그 자리에 값지게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의 젊은 시절이 배어있다는 것을.

돌아오는 추석 때 고향을 찾아 한번쯤 어머니 옆에 앉아 옛날 얘기를 들어본다면 훗날 내 자식들에게 들려줄 소중한 유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장내1리는 대부분 노인인 데다가 주민수도 적어 경로잔치를 해도 일할 사람이 없어 못한다고 한다. 장내 2리 역시 주민들이 거의 60대 이상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도 남달라 해마다 경로잔치를 베풀고 있다.

지금은 농로 포장이 잘 돼 있어 주민들이 농사짓기가 한결 편해졌으며 마을 입구에는 넓은 광장을 만들어서 주차장으로도 사용하고, 마을로 들어오는 차량이 쉽게 차를 돌릴 수 있도록 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다.

역사와 전통은 오늘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주민들은 "장안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길 희망하고 있다. 옛것을 외면하는 사회는 고명 없는 떡국이나 새알심 없는 팥죽과도 같다. 옛 지명에 애정을 갖고 바꾸고자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기자의 눈에는 아름다워 보였다.
/김춘미 프리랜서

<새로쓰는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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