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 청년 등짐으로 물건 날라 휴게소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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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청년 등짐으로 물건 날라 휴게소 운영
  • 송진선
  • 승인 2006.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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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천골 휴게소 최명씨
속리산 법주사 매표소에서 문장대까지 편도 6.9㎞구간에는 기념품 판매점을 포함해 크고 작은 휴게소가 많다. 아마도 단일 등산로에 문장대 구간처럼 휴게소가 많은 곳도 없을 것 같다.

휴게소에서는 파전과 동동주, 어묵, 커피, 과자, 사탕, 물 등 음식물과 잡화는 물론 간단한 등산장비까지 판매한다.

그런데 경사가 아주 심하고 차량이 닿지 않는 곳에 휴게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런 곳에는 물건을 어떻게 구비를 할까.

정답은 차량이 닿는 태평이나 세심정, 용바위골 휴게소를 제하면 거의 모두가 등짐으로 짐을 나른다. 물건이 많고 무거운 것은 지게를 이용하고 간단한 것은 매일 휴게소로 출근하면서 배낭을 이용한다.

LP가스도 배달이 안되니까 45㎏ 정도 되는 가스통을 지게로 져 나른다. 등산객이 휴대하면서 마실 수 있는 500㎖, 1.5ℓ 물 한 짝도 지게로 져서 나른다.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다.

등산로를 맨 몸으로 걸어가기도 힘들어 쉬면서 겨우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보통인데 가벼운 등짐도 아니고 몸무게가 45∼50㎏되는 사람을 업고 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장대 구간 휴게소 운영자 중 가장 나이가 젊고 아버지가 하던 것을 대물림 한 냉천골 휴게소 주인 31세 청년 최 명씨. 그 나이에는 편안하게 직장생활 하는 것이 보통이고 힘들면 보다 쉬운 일거리를 찾아 직장을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한데 그는 힘든 물건을 지게로 져서 나르는 휴게소 운영을 도맡아 하고 있다.

복천암 위 용바위골 휴게소 인근 차를 주차해놓고 이곳에서 부터 냉천골 휴게소까지 등짐을 지는 거리가 3㎞ 가까이 된다.

매출이 예전 같지 않아 재미가 덜하다는 냉천골 휴게소 주인 최 명씨를 만난 것은 2월2일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휴게소까지 가는데 미끄러워 고생을 했다. 하얀 설경을 즐기는 등산객들 틈에 끼어서 겨우 겨우 냉천골 휴게소까지 올라가 31세 청년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 초교 2학년까지 휴게소에서 생활
냉천골 휴게소는 속리산이 국립공원이 되기 전인 도립공원 시절 부터 운영했다. 최 명씨의 아버지 최정수(59)씨가 마혼 시절 그의 큰 형과 함께 운영하다 결혼하면서 단독으로 운영했는데 올해로 33, 4년 정도 된다고 한다.

당시 공원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때였고 등산로 구간에 지금보다 훨씬 많은 휴게소가 운영됐으나 공무원들이 일일이 철거를 하는 등 정비를 했다.

냉천골 휴게소도 여러차례 철거 됐지만 공무원들이 철거하고 가면 최 명씨 가족들은 다시 가건물을 세우고 또 영업을 하는 등 그렇게 철거반원과 숨바꼭질을 했다.

결국 최씨 가족들은 공무원들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고 현재의 자리에 당당히 방이 4개이고 부엌, 그리고 좌판을 펴놓은 냉천골 휴게소 이름이 걸린 휴게소 영업을 하게 된 것이다.

최 명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휴게소에서 생활해 3㎞이상을 걸어서 수정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통학이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어릴 때부터 산을 더 잘 타서 큰 어려움이 없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휴게소에서 생활하고 최 명씨와 동생 2명은 사내리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특히 최 명씨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대신해 밥도 직접 해서 먹고 학교를 다닐 정도로 소년가장 아닌 소년가장 역할을 했다.

초등학생이 그것도 남학생이 밥을 해먹고 다니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참 착하다 싶었다. 얼굴을 보니 착한 인상이 풍긴다. 선한 모습을 하고 있다.

◆ 88년대 휴게소 호황
냉천골 휴게소가 가장 호황을 누린 때는 88년 무렵이라고 한다. 당시에 휴게소에는 물건을 대주는 짐꾼들이 있었는데 3명이 하루 2, 3번 많을 때는 4차례나 물건을 조달해줄 정도로 휴게소는 호황을 누렸다. 속리산 주민 중 상당수가 짐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으니 휴게소 영업의 호황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아마도 거의 모든 휴게소 영업이 최고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을 것이라고 최 명씨는 말한다.

80년대 일반 등산객들도 물건을 가득 실은 지게를 지고 가는 짐꾼들을 등산로 곳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어깨에 짐 하나 메지 않고 맨 몸으로 혼자 오르기에도 힘든 등산로를 물건을 가득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휴게소 물건 값이 참 비싸다는 생각을 했는데 많은 인건비를 들여 물건을 조달받으니 그만큼 먼 거리에 위치한 휴게소 일 수록 물건값이 비쌀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참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때 세계화 정책으로 인해 외국여행객들이 늘기 시작했고 IMF이후에는 경기 침체로 관광객도 줄었고 휴게소 이용률도 줄었는데 그 여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1년 중 봄철과 가을철 가장 많은 등산객이 몰리기 때문에 냉천골 휴게소는 물론 거의 모든 휴게소가 이 때 최대의 영업실적을 올려 외상으로 구입한 물건 값 갚고 1년 살이 생활비를 마련한다. 이같은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 2000년부터 휴게소 운영 시작
꿈이 회사원이었던 최 명씨가 냉천골 휴게소의 주인으로 들어앉은 것은 2000년부터다. 97년 김천 전문대 식품가공과를 졸업하고 99년 군제대 후 최 명씨는 쌍곡계곡에서 가든을 운영하는 부모님 대신 휴게소 운영을 맡았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아르바이트 식으로 부모님을 돕다가 일자리를 구해 취직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휴게소에 있었는데 2003년 어머니가 뇌 수술을 받았고 아버지가 어머니 병수발을 해야 하는 처지여서 가든을 접게 됐다.

초등학교 때는 밥만 해먹는 소년가장이었다면 이 때부터 정말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청년가장이 되었다. 최 명씨가 돈을 벌어서 가계를 꾸려가야 했던 것이다.

중3때부터 지게로 등짐을 져 휴게소에 물을 날랐기 때문에 등짐을 지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산중에서 오래 생활해 두려운 생각도 없었다. 최대한 영업수익을 많이 내 어머니 병수발도 해야 하고 생활비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LP가스통, 물까지 60㎏이 넘는 물건도 거뜬하게 지고 올라갔다. 정규 등산로를 이용하면 등산객들 때문에 잘 올라가지 못해 힘이 배로 들어 자신만이 아는 등산로를 개발해 놓고 물건을 나른다.

가을에는 하루에 이 정도 무게의 물건을 두 번 정도 나르고 여름과 겨울에는 1주일에 두 번 정도 간단하게 배낭을 이용해 물건을 나른다.

오이는 여름에 주로 찾는 물건이고 아이스크림은 겨울만 빼고 3계절 모두 잘 팔리는 품목이며 가을과 겨울에는 어묵과 동동주가 잘 팔린다. 산중에서 먹는 맛이 최고인 컵라면은 한 철도 빠지지 않고 사철 잘 팔리는 품목이다.

휴게소를 이용하면서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는 포대자루에 담아 역시 지게를 이용해 산 아래로 운반한다.

등산객들이 많이 오고 휴게소를 많이 이용해 쓰레기를 담은 포대가 많이 나오면 무겁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산 아래로 지고 내려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최 명씨는 휴게소내 방 한 개만 남겨두고 모두 뜯어냈다. 전에는 휴게소도 미처 하산하지 못하는 등산객들은 휴게소 내 있던 방에서 묵고 이튿날 내려갈 정도였다. 방송 촬영팀이나 새해 해돋이를 온 사람들이 가끔 이용했는데 요즘은 전혀 이용객이 없다고 한다.

습이 많이 차 휴게소 벽은 곰팡이가 설기도 하고 습이 배인 자국도 있다. 연초에 손수 흰색 페인트칠을 했지만 하나마나한 상태다. 지붕은 함석으로 덮고 함석이 삭아 구멍이 날 때마다 고친다.

일단 부수면 새로 짓지는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대처방법이다. 최 명씨는 갈수록 등산객이 줄어 이제는 휴게소를 접고 내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만 소나무 숲 공원 조성, 연꽃단지 조성, 영화 캐릭터 공원 조성 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어 혹시 관광객이 증가하지 않을까 싶어서 휴게소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최씨의 바램처럼 속리산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해 사내리 상가도 활성화 되고 휴게소도 호황을 누리기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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