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지로 찾은 곳이 보은인데 고향이 됐어요
충청도 산골 보은 촌놈이 일면식도 없는 대구지역에서 사는 것이 쉽지만은않았을 것이다. 텃세도 심한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물, 콧물 빼는 일도 수 백 번 있을 수 있다.아마도 대구지역 보은향우회원들에게 텃세 심한 타향에서 자리를 일찍 잡는데 도움이 된 든든한 백을 꼽는다면 아마도 장세환(65) 동보 한방병원장도 그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다.
사실 장세환 원장은 흔히 엄밀히 말하면 보은 사람은 아니다. 구미출신으로 보은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것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대구 경북지역에서 생활하는 보은인들로 구성된 재대구 보은향우회 모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그 모임에서 보은사람들과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을 즐거워하는 당연한 보은사람이길 자처한다.
학원사가 발행한 전국에 소문난 명의 50인과 또 우연기획에서 출판한 한국의 명 한의사 33인에도 선정되는 등 이미 ‘장세환’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미 국내 수많은 한의사 내 VIP 중의 VIP 반열에 서 있다.
그런 큰 인물이 자랑스런 보은인이라는 것에 자긍심이 생기고 괜히 우쭐해진다.
# 6·25때 피난지로 찾은 보은
장세환 원장이 보은사람과 인연을 맺은 것은 6·25전쟁이 이유다.
고향 구미에서는 알아주는 부자였던 장세환 원장의 아버지는 땅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정감록에 나오는 보은(당시 보은면 양지편 마을, 지금의 보은읍 길상1리)을 피난지로 택했던 것.
그때가 장세환 원장이 7세 때이고 그때는 누구나 그랬듯이 소 풀도 베고 들로 산으로 소를 몰고 나가 풀도 뜯기면서 자연 속에서 그렇게 자랐다.
틈틈이 외속리면 하개리 99칸 집에서 국내 금석학의 최고봉으로 문화재 위원장을 지낸 고 임창순(1999년 작고)씨의 스승인 당대 유명한 한학자인 홍치유 선생에게 7살부터 9살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월담 홍사익 선생에게 13살부터 17살까지 한문을 수학했다.
당시 내로라 하는 석학들에게 한문을 수학하던 어린 장세환은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한문책을 보며 다음 날 스승을 만나 한문 공부를 한다는 기쁜 마음에 잠도 설쳤을 정도.
그 정도로 남다르게 한문에 조예를 보였던 장 원장이다. 그의 한문 수학은 난리때문이다. 난리 통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속리초등학교를 5학년까지만 다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대신 한문을 공부하다 열 일곱 살 때 장안 속리초등학교 내에 있던 외속 고등 공민학교에 입학했으며 2학년 때 보덕중학교(3회)로 전학을 갔다.
보은군 재향군인회장을 지낸 이춘화씨와 동창이고 지금도 그때 보은에서 지내면서 사귄 친구들과 자주 연락을 하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대구 계성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그의 가족들은 대구로 이사를 갔고 전쟁 중에도 책을 놓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이던 장 원장은 한약방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대를 잇기 위해 경희대 한의학과를 들어갔고 대구한의대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전형적인 한의사다.
# 아버지·본인·장남까지 3대가 한의사
장원장의 가족은 의사 집안이다. 한의사나 마찬가지였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병약한 사람들을 돌본 명의로 손꼽혔고 그 대를 이은 장 원장은 1978년 대구 한 복판에 동양의학의 보배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동보(東寶) 한방병원을 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한방병원 내에 정형외과까지 개업했으며 지금은 대구시내에서도 명실상부 한양방을 겸한 종합 병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한의사만 3명이고 정형외과 의사도 있어 한의학과 양의학의 결합으로 환자에 대한 치료효과를 배가시켜 동보 한방병원은 서울 유명 병원 못지 않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여기에는 장세환 원장의 끈질긴 연구가 크게 뒷받침 됐다. 다름 아닌 치질 연구에 40여년의 세월을 받쳤고 결국 그의 손을 거치면 치질을 완치시키는 치질의 대가라는 호칭까지 얻게 됐다.
그에 대한 소문은 전국에 알려졌고 대구까지 멀다 않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줄을 잇고 그동안 장 원장의 손을 거쳐간 치질환자만 해도 10만명은 족히 넘는다고 할 정도다.
치질하면 수술요법만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환자들에게 수술하지 않고도 장 원장이 지어주는 약과 고약을 발라 완치의 기쁨을 맛본다고 하니 아픈 것은 고사하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치료부위를 감쪽같이 치료할 수 있는 것에 치질 환자들은 박수를 친다.
특히 암치질이라 불리는 치루에 대해서는 국내 독보적인 의술을 보이고 있어 학생은 물론 이름만 대도 금방 알만한 유명인까지 그를 찾았을 정도다.
중풍환자도 잘 고치기로 소문났는데 그의 연구와 노력으로 전국의 수많은 한의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의가 되었고 지금 그는 ‘우리시대의 허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장 원장은 그의 아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2남2녀 중 자신의 피를 이어받아 장남 역시 한의사이다. 그동안 동보 한방병원에서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한의사로 근무하다 현재는 개업 준비 중에 있다.
개인 한의원을 개업해 의술과 인술 그리고 경영능력까지 갖춘 CEO가 된 후에 동보 한방병원의 후계자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부인 신광식(63)씨는 약사로 외래 약국을 운영하다 지금은 동보 한방병원에서 함께 재직 중이며 둘째 딸은 중국에서 8년 째 한의학을 하고 있는 등 한 집안이 의약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출향 군민들의 든든한 버팀목
대구지역에서 이렇게 큰 인물로 활동하고 있는 장세환 원장은 보은 향우회원들의 든든한 버팀목 이기도 하다.
현재 향우회 고문으로 활동중인 장 원장은 비록 출생지는 구미이지만 어릴 때인 7살 때 보은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17살까지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고향을 보은이라고 여겨 고향 보은사람들을 만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눈다.
장 원장은 특별히 버팀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저 고향이 좋고 자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답한다.
비록 살았던 곳은 각 읍·면으로 서로 다르지만 고향에 대한 풍경은 서로 비슷하게, 때론 똑같이 그려낼 수 있어 대화가 통한다는 것.
나이가 들 수록 함께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하는 월례모임이나 이사회 등 향우회 모임에는 병원에 큰 일이 있지 않는 이상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고 한다.
장세환 원장은 그러면서 보은신문이 출향인들에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 번 더 갖게 만드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며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대구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명예회장으로 있는 장세환 원장은 남모르게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보훈 가족들도 돌보는 등 인술을 펼쳤으며 지난해에는 달성군 간경리와 자매결연을 맺어 70세 이상 노인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해 호평을 받았다.
이같이 사랑의 인술을 펼친 장세환 원장은 그동안 대구시장 감사장을 비롯해 보훈처장, 내무부장관 감사장을 받았고 대통령 표창과 새마을 훈장 노력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은 나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한다. 자기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혀 명의 반열에 오르고 거기다 따뜻한 가슴까지 가지고 있으니 장세환 원장이야말로 진정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이름 석자는 최고의 명의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무료진료 환자들의 가슴에는 눈물나게 고마운 사람으로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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