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발원지, 서원계곡을 따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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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발원지, 서원계곡을 따라....(1)
  • 보은신문
  • 승인 2005.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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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광 우 (보은발전협의회 사무처장)
1. 물과 나무, 서원계곡과 정부인소나무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요즘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새봄'이라는 시다. 그는 6,70년대의 대표적인 민중시인이다. 그가 1970년 담시 '五賊'을 발표하였을 때의 충격과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을 때의 살벌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가 교과서에 실렸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세월은 바뀐다. 사람도 바뀐다. 마찬가지로 시대의 정의와 도덕도 바뀌지만 하늘과 산과 들과 물은 아주 조금의 변형이 있을 뿐이다. 유한 생명체인 인간이 자연을 경외하는 까닭은 10년 아니, 100년쯤은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드는 변하지 않는 영원성 때문이다.

뜬금없이 김지하의 시를 내놓은 것은 우리 일행이 답사하게 된 서원.장내리 문화기행이 600년을 변치 않고 서있는 잘 생긴 소나무인 -일명 '정부인소나무'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국민들을 상대로 좋아하는 나무에 대해 설문했더니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반 이상이 소나무를 꼽았다 한다.

소나무의 한자어인 松자는 그 구성으로 볼 때 나무(木)자에 벼슬(公)자다. 이름에서부터 이미 벼슬을 한 귀한 몸이거니와 언제부터인지 거기에 정2품송의 부인으로 정경부인 반열에 올랐으니 정부인송은 귀하디귀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나무는 앞으로도 수십,수백년 이곳을 지키며, 말없이 많은 걸 증거할 것이라 생각하면 왜 사람들이 오래된 나무를 서낭나무로 삼아 경외하는 것인 지 이해할 만하다. 다만, 남편 나무인 속리산 상판에 있는 정이품송에 비하여 정부인송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는 같이 간 일행인 최규인(삼년산향토사연구회장)님은 '사람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장수하지 않나'라고 해 함께 웃었다.

앞서 인용한 김지하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서 구구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금 사족을 단다면 '봄날 처연히 떨어지는 벚꽃 지는 모습이 섭섭하여 소나무가 좋았지만 생각해보면 소나무만 있는 산보다는 화사한 벚꽃도 함께 어우러진 조화로움이 좋다'는 뜻인 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우리들 사람 사는 사회도 그런 다양성이 잘 존중되고 조화할 때 훨씬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속리산 천왕봉(1057m)에 내린 한 방울의 빗물이 동으로 떨어지면 그것이 낙동강 물이요, 서.북으로 떨어지면 한강수가 되고, 남으로 떨어지면 금강이 되어 흐르니 금강으로 흐를 그 빗방울이 한 번 삼가저수지에 모이고, 이어 서원계곡을 따라 흐르고 흘러 금강에 이른다. 우두커니 앉아 계곡의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한 느낌이 든다.

老子는 '道德經'에서 上善若水라 하였으니 최상의 도는 물과 같다는 것이다. 물이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며, 물은 어느 그릇에서도 자유롭게 자기 형체를 바꾼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자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은 스스로를 낮은 곳에 두어 남과 더불어 승리를 다투지 않고, 대립하지 않으매 마땅히 사람이 배워야할 위대한 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은 돌을 이긴다. 물의 영구불변한 진리의 상징성 때문에 사람들이 맑고 좋은 물을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리라. 물이란 그런 것이다.

특히나 명산 속리산에서 발원되어 금강의 발원이 되는 서원계곡의 맑은 물은 이 계곡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2. 사람이 곧 하늘이니....

서원계곡을 따라 난 505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목장승 한 쌍이 서있으니 그곳이 저 유명했던 1893년의 동학 취회지다. 장승에는 '사람이 곧 하늘이니' 와 '동학농민혁명만세'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2000년도에 문화운동가 박달한씨가 기획하고 류재석씨가 장승을 깎았으며, 교사인 김성장씨가 글씨를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늦가을 추수를 다 했을 때이니 꼭 5년 전 이다. 장승으로 향하는 들길 사이로 메뚜기 떼가 우수수 길을 내어준다.

올 농사는 썩 잘된 것 같지 않았지만 메뚜기는 풍년이다. 갑자기 궁금하기 시작한다.

동학교도들은 왜 하필 장내리에 대도소를 설치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역량으로 급격히 늘어난 동학교도들은 교세를 정비하고, 교단의 지도부가 근거지없이 떠돌아서는 전국의 교도들을 지휘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보은의 장내리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보은은 호남, 경상, 충청을 아우를 수 중심지였으며, 오랫동안 군현과 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던 교단 지도부들이 갑작스런 관군의 출몰에 대비하여 피신이 용이한 산악지형이기도 하였고 호남,충청,경상의 3도 경계지역이기도 하였다. 물론 상주.청산 등 가까이에 교도가 많은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893년 정월 장내리를 동학 동학교도의 大都所로 결정하자 이때부터 장내리는 전국적인 동학의 근거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내리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삼가천과 옥녀봉 사이의 비탈에 돌성을 쌓았다. 이 돌성은 관군에 대한 수비를 목적했다기보다는 경향 각지에서 온 교도들의 질서를 도모하고 바람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돌성을 쌓는 작업을 통해 협동심을 기르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1백여 걸음의 길이와 반장(허리춤)까지의 높이로 쌓았으니 수 만 명의 숙련된 농민들로서는 단시간에 쌓았을 것이다. 지금도 장승을 세워둔 논둑은 그들의 손길이 닿은 돌들로 빼곡함을 볼 수 있다.

동학농민들이 구름과 안개 메워지듯 수 만여 명이 모여 19세기말 불합리한 사회개혁과 척양척왜의 외세배척의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의지와 간절한 바람이 이젠 희미한 돌성의 자취로 남아 있으며, 11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듯 목장승만이 가을 들판을 지키고 서 있다. 또한 지나는 길가의 감나무엔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해마다 수백 개의 감을 따지만 우리는 그중 몇 개를 '까치밥'이라 하여 남겨둔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혜의 산물이다. 동학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니...서로 섬기세"라고 씌어진 장승을 보며 '자연도 사람도 서로서로 섬기세' 라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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