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한면 교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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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면 교암리
  • 송진선
  • 승인 200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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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심에 있는 마을회관은 사철 주민 화합의 장
수한면 교암리를 찾았을 때 마을 주민들 상당수가 회관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느 농촌마을처럼 노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노인 중에도 남자노인 보다는 여자노인이 더 많은 것처럼 회관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주민들이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그 중 연세가 더 지긋한 할머니는 누워만 있어도 어깨부터 다리까지 온 몸을 안마해주는 기계에 누워 안마를 받고 있다. 옛날에는 손자들이 어깨를 토닥여주면 “어 시원하다”고 감탄하며 손자들을 칭찬해줬을 터인데 지금은 손자들이 모두 도회지에 나가 있고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들을 명절 때나 가족 대소사 때만 겨우 본다.

늘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허전해 하는 고향의 부모님들을 위해 하루에 한번, 그것이 어렵다면 이틀에 한번 전화라도 넣어서 안부를 여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기계로 안마를 받는 할머니를 보고있는데 연세로 보아서는 벌써 일손을 놓아야 할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회관에 들어와서 걱정을 쏟아놓는다.

 “고추를 땄는데 어디 벌크 여유가 있는데 없어유? 일기예보를 들어보니까 비는 계속 온다고 하지 그냥 두었다가는 그것마저도 물러 터져서 모두 버려야 할 것 같아. 어떡하지 큰일이네”

모여있는 주민들은 모두 “지금 한창 벌크를 돌리는 중이라 말려주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네 어떻게 한댜”하고 답하면서 모두 자기 일인 양 걱정한다. 정말 피를 나눈 사람만 친척이고 형제인가. 이웃사촌이란 말이 딱 맞는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정겨운 시골마을 수한면 교암리 마을을 찾아서 가슴 한가득 따뜻함으로 채웠다.

#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
단일 마을로 하나의 행정 마을을 이루는 것도 있지만 보통 시골마을은 본 동네 외에도 새동네, 새터, 무슨 무슨 골 등으로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으면서 하나의 행정 마을을 이룬다.

교암리도 마찬가지였다. 거먹골 12가구 외에 새로 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이름을 얻은 새 터(가르침바위 마을) 29가구, 봇 들 5가구, 줄골 2집으로 형성돼 있다.

당초 교암리는 줄골에서 시작돼 거먹골(거마동)로 중심마을이 변했다가 일제시대 신작로(지금의 국도 19호선)가 생기면서 새터(가르침바위 마을)가 형성돼 이제는 가장 많은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48가구에 120여명의 주민들은 교암리 조용복(49)이장과 김영식(76) 노인회장, 박귀열(51)새마을지도자, 김선숙 부녀회장과 함께 서로 화합하고 도와가며 행복한 마을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 바위는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바위라고 말하고 속리산으로 향했다는 세조의 말에 의해 가르침 바위가 된 곳. 또 가르침 바위 마을에 통폐합된 마을 중 거먹골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아우인 세한재 송시도 선생(장성공이라 부름)의 장례를 지낼 때 많은 사람들이 수레를 타고 왔다 해서 거마동(車馬洞)이라고 하던 것이 거먹골로 변했는데 당시 가르침 바위 마을의 중심이었을 정도로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거먹골은 집안의 안채에 해당하고 가르침바위 마을은 바깥채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안 채와 사랑채로 나눠졌던 마을을 1914년 일제가 통치하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해 거묵동을 가르침바위 마을에 편입시켜 마을 이름도 가르침 바위, 이를 한문화 한 교암리로 바꿨다.

# 세조가 가리킨 바위라 해서 가르침바위
보은 수리티-회인-피반령-청주로 통하는 국도 25호선과 보은-내북-미원-괴산으로 통하는 국도 19호선과 어느 노선이 형일까. 국도 번호순서대로 보면 19호선 대 25호선이니까 19호선이 먼저 인 것 같지만 역사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조선 세조가 한양에서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 수한면 교암리 앞을 지나서 장재리 대궐터를 지나 박석티를 넘어 속리산에 닿았다.

세조가 수한 교암리에 다다라 길옆에 있는 큰 병풍바위를 가리키며 “참 큰 바위로다”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규모 면에서 상당했을 테고 바위 모양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7개의 기암괴석으로 된 병풍바위라고 불렸을 정도로 장관을 이뤘다. 교암리 입구에 있었던 크고 넓은 이 바위에 정자를 지어놓고 젊은이들을 가르쳤을 정도로 명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합방 후 1939년 소로를 신작로로 닦으면서 7개의 바위 중 5개를 깨트려 가르침 바위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그마저도 1980년대 국도 25호선을 확·포장하면서 나머지 2개의 바위 마저 깨 버려 지금은 가르침바위의 흔적만 남아있는 정도다.

대신 그 가르침 바위에 정자를 세워 후세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던 이권영 선생의 공적비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세워져 그곳을 지키고 있다. 가르침바위였던 병풍바위가 자리한 산은 7개의 돌로 이뤄진 병풍바위처럼 7개의 봉우리를 가졌는데 동정 저수지 쪽에서 교암리 뒷산을 보면 7개의 봉우리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가 있다고 한다.

# 가르침 바위에 얽힌 전설 두개
가르침 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전설에는 수리티라는 마을에 수재라는 젊은이가 살았는데 하루는 거리고개에 살고 있는 스승을 찾아가는 길에 바로 이 바위 밑을 지나게 되었는데 바위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니 밧줄이 하나 내려와 있었고 밧줄을 타고 올라갔는데 노인 둘이 띠를 짜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옆에서 쉬는데 속히 가야만 스승을 만난다고 재촉하기에 일어나 내려와 보니 올라갈 때 잡았던 밧줄은 다 썩고 없어져 노인들이 다시 준 밧줄을 잡고 내려와 보니 밧줄도 노인도 종적 없이 사라지고 바위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사람들이 가르침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이 바로 세조와 연관이 있는 것인데 세조가 영월로 귀양을 보낸 조카이자 선왕인 단종을 무참히 살해하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묘마저도 파헤치고 평민의 무덤같이 만들어 버렸다.

이후 꿈속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었는데 침 자국이 곪기 시작해 온 몸으로 퍼져 좋다는 약을 써보왔지만 허사였다.

세조는 부처의 힘으로 고쳐보겠다고 생각하고 1464년 청주에서 피반령을 넘어 회인을 지나 교암리 앞을 지날 때 냇가 옆을 바라보며 가는데 장엄한 바위가 푸르스름한 냇물에 수려한 자태를 비추며 일행을 맞아들이는 형태로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바위를 보자 세조는 지난 날 왕위를 빼앗고자 참혹하게 충신을 처단하고 어린 조카를 살해한 일들에 자책감을 가졌고 세조는 연을 멈추게 한 뒤 바위 앞에 나가 참회를 하고 바위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바위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고 부드럽게 감싸안는 것이 세조에게 느껴졌고 세조는 바위를 가리키면서 “이 바위는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바위다”라고 말하면서 그 곳을 더나 속리산으로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바위 이름을 가르침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거먹골과 새터 서로 다른 풍습
새터보다 역사가 더 깊은 거먹골에는 아직 옛 풍습이 남아 있다. 매년 정월 초삼일만 되면 산제를 지낸다.  거먹골 앞산에 있는 산에서 산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 후 수해 때 떠내려간 수백년 수령의 가죽나무가 있던 자리에서도 지내고 악귀가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줄을 쳤다.

농촌의 노령화와 더불어 편리함을 좇는 세태에 밀려 옛 전통의 풍습이 사라졌다. 상당수의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지 않아 이제는 동제 지내는 것이 매우 보기 드문 사례가 됐는데 거먹골 주민들도 올해까지만 지내기로 합의를 했는데 그것은 또 내년에 가봐야 한다고 마을회관에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지내다 안 지내면 괜히 마음이 꺼림직 하고 부정탄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혹시 동네 무슨일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지 괜히 불안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 그러면서 지금은 안 지낸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그 때 가봐야 안다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의 중심이며 가구수가 가장 많은 새터는 아예 처음부터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교암리 한 마을이면서 이렇게 풍습이 달랐다.

지금과 같이 저수지 등 관개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때 비가 안와 벼를 심지 못하면 농부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한 숨만 내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암리 주민들은 하지가 지나는데도 비가 오지 않으면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며 70년대까지만 해도 가뭄 때 바로 이 칠봉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효험이 닿으면 비가 오고 정성이 부족하면 비가오지 않는다고 믿는 주민들은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지냈고 기우제를 지낸 탓인지 때마침 비가 오면 주민들은 하늘에 감사해 하며 논을 장만하고 벼를 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보청저수지가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었고 일제 때 만든 거먹골 소류지가 있었지만 이 것만으로 교암리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항상 농민들은 물 부족을 경험해야 했다.

거먹골 소류지로 지금도 1만여평의 논에 용수를 공급할 정도로 중요한 수원이며 98년 보은 대 수해 때 유실됐으나 보수해 지금도 인근 농경지에는 없어서는 안될 농업용수이다.

벼와 고추가 주작목이고 특용작물로 일부 농가에서 오이를 재배해 소득을 높이고 있는 교암리 주민들은 가르침 바위가 주는 의미를 되새기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베풀면서 선하게 그리고 지혜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새로쓰는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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