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면 탄금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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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면 탄금2리
  • 송진선
  • 승인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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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숲이 막을 친 숨은 마을 막음골
지난 호에서 삼승면 탄금1리 탄금대 마을을 취재하고 탄금2리를 취재하기 위해 지명지를 살펴봤다. 별다른 특이사항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걱정이다. 무슨 내용을 취재할 것인가. 그동안 마을 소개 기사를 한 면 전체에 담았는데 이번 탄금 2리 막음골 마을은 땜질 식으로 기사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마을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마을을 찾았다. 삼승면 원남방향에서 삼승초등학교를 지나 나타난 국도 19호선 변의 탄금2리 방향표지판을 따라 얼마간을 달렸다. 마을 진입로인데 찾는 마을은 보이지 않고 농경지만 눈앞에 펼쳐졌다. 콘크리트 포장길이 끝나자 구인∼장재간 군도인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닿았다.

찾는 마을은 보이지 않았고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차의 머리를 돌리란 말인지 마을을 안내하는 이정표도 없었다. 차에서 내려 마을이정표를 찾아 들어간 곳은 이곳에 마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꼭꼭 숨어있었다. 지명 그대로 막음골이었다.

언덕길을 치고 올라가니 내리막길이다. 작은 마을에 눈앞에 펼쳐졌다. 과거 나무나 하러 다니던 아주 좁은 길이 탄금1리 사립학교가 폐교되고 상가리에 삼승초등학교가 생기면서 길이 만들어진 아리랑 고개가 마을 뒤쪽에 있다.

주민들이 마을의 진입로로 사용했던 장고개는 마을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농로이자 마을간 연결되는 고개이고 동쪽은 버드나무(楊柳) 숲 등 사방이 장막처럼 둘러쳐져 있어 막은동(막음골)이라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마을 앞에는 버드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숲을 만들어 마을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외부의 침입을 막았는데 지금은 나무가 많이 죽고 버드나무 4그루와 소나무 2그루만 남아 있어 주민들은 조상들이 마을 앞까지 숲을 조성해 마을을 보호했던 것을 상기하며 소나무나 느티나무를 심는 계획도 갖고 있다.

여느 시골마을 처럼 인적하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함을 이곳에서도 느꼈다. 날이 뜨거운데 다들 농사일 하느라 논이나, 과수원에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을의 전통을 이어오는 점, 마을 주민들의 출자로 만들어진 새마을금고 운영 등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점이 발견되었다. 다행이었다. 충분한 수확이었다. 김강희(50)이장과 취재약속을 하고 찾아간 마을회관에는 전 이장인 김기복씨와 정순용 노인회장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해뜨기 훨씬 전에 들에 나가 오전 일을 하고 11시경 아침밥을 먹고 오후 뜨거운 햇살이 약간 고개를 숙이면 다시 들에 나가 일을 한다는 김강희 이장의 오후 농사일에 훼방을 놓으며 취재시간을 잡은 것이다.

이장 김강희씨와 정순용 노인회장(79), 김형구 새마을지도자(40), 송갑호 부녀회장(62)은 20가구에 주민이라고 해봐야 60명이 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인 탄금2리 막음골은 옛 전통을 지키며 주민 화합을 일구고 있었다.

# 마을 역사 기록으로 보존
이 마을을 주민화합의 으뜸 마을로 평가를 한 것은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마을금고를 운영한다는 것 외에도 정부에서 길을 내주기 전 동네 기금으로 땅을 구입해 마을길을 내고 자력으로 마을회관을 건축하는 등 마을을 위한 일이라면 팔을 걷어 부치는 주민들이다.

이런 막은리 주민들이 막은리 역사를 세세히 기록해놓았는데 지역 향토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명유래 및 이에대한 소고와 마을 주민들이 세운 공적비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적고 있다.

마을 새마을금고 설립, 농로용지 매입이며 마을진입로 개설에 따른 토지 매입자금과 마을 안 길을 넓히는데 개인적으로 희사한 토지며, 마을에 전기를 끌어다 준 출향인 공적비, 서당 운영으로 문맹자들의 눈과 귀와 입을 열게 해준 사람의 공적비 등이 담겨져 있다.

또 가훈 갖기와 1가구 1통장 갖기를 권장하는 등 윤택한 생활을 위해 저축을 강조했던 마을 이장의 노력 등 마을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현실들이 기록돼 있다.

이는 모두 탄금리 막음골에 대한 기록으로 탄금리가 1리와 2리로 분리되기 전 1981년 12월 31일까지로 한하고 있는데 군지나 지명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또 하나 귀중한 문화재적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막은리 마을의 규약이다. 규약은 막은리가 이곳에 터를 잡고 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 조상의 손길로 다져진 향토문화와 뜻을 후대에 보전하기 위해 글을 남긴다고 적고 있다.

이 규약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향토를 길이 보존해 복지증진과 문화창달에 힘쓰고 소득증대로 윤택한 생활환경을 보장하고 복지부락을 건설하고 사회질서와 동네와 주민의 복지, 동네발전을 도모하는 등 동중사의 절서유지를 위한 것으로 마을이 분구해 새로운 마을로 탄생한다고 하지만 마을 규약을 이같이 만드는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을은 사방이 막혀있지만 진취적이며 앞을 내다보는 선견을 갖고 있고 획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장 등 마을 책임자의 자격에서부터 임기 벌칙 등 아주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구성해 사회단체의 회칙보다 더욱 세련됐다.

# 주민 화합 최고
막은동 주민들의 주민 화합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는 앞 부분에서도 대충 언급이 됐지만 70년대 새마을사업 초기로 마을 건설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벌써 마을 진입로 개설과 농로를 내는데 동네 자금이 쓰여졌으며 사람들이 돈을 내고 마을 회관을 건립하는데 십시일반 주민찬조가 이어졌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일이다. 다른 지역도 마을 진입로가 좁다고 느꼈지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부지를 매입해 확장할 생각을 안했고 농로 또한 마찬가지였을 시기의 일이다.

탄금2리 막은리 주민들은 1971년 아리랑 고개를 넘어 국도 19호선까지 1㎞의 마을진입로를 마을 자력으로 낸 것이다. 안길도 1972년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옥을 헐면서까지 대지를 희사받고 동네자금으로 부지를 확보해 안길을 확장한 것이다. 또 한번 마을 주민들의 개척정신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모두가 마을의 규약처럼 동네발전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팔을 걷어 부친 것이고 올해 95세로 동네 최고령자인 황팔순 할머니도 마을에 번듯한 마을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91년 마을회관 부지 20평을 희사해 동네발전을 꾀하는데 한 몫했다.

황 활머니의 부지 희사로 마을회관이 앉을 자리를 갖게된 막은리 주민들은 출향인인 안성찬 건축설계사의 설계 지원과 군비 1000만원을 보조받고 부족한 1000만원은 주민들이 주머니를 끌러 번듯한 주민들의 담소의 장을 만들었다. 주민 모두가 마을발전을 위한 마음이 없다면 이루기 힘든 것들이다.

# 삼부 마을금고를 아세요
이같이 주민 화합이 으뜸인 탄금2리는 탄금1리와 분구가 되면서 1982년 200만원의 마을 기금으로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은 금융기관일 마을금고를 탄생시켰다.

주민과 출향인 35명을 회원으로 둔 마을금고는 23년간 아무 사고없이 건전하게 운영되고 있는 마을의 큰 자산이다. 삼부(三富) 새마을금고인 마을금고 이름에는 동민이 부자 되고 동네가 부자 되고 나아가 국가가 부자가 되길 기원하는 3가지의 큰 뜻 담고 있다.

현재는 4500여만원의 자금이 있으며 처음부터 대출은 연리 7%인 이율에 1인당 500만원까지만 융자해주는 조건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과거 농협의 대출이율이 비싸고 사채이자도 비쌌으며 정부의 영농자금 이자도 지금처럼 4, 5%대가 아닌 10% 넘을 때도 있는 등 고가여서 삼부 새마을금고의 돈을 쓰는 조건이 좋아 마을금고의 대부업이 활기를 띠었다.

자녀 학자금도 내고 생활비로도 쓰고 결혼할 자녀의 셋방을 얻어주는 자금으로 활용되는 등 마을금고의 돈은 주민들에게 요긴하게 사용됐다. 이 돈의 도움을 받지 않은 가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구좌 당 5000원을 출자금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은 출자가 제대로 안돼 회원들에게 돌아갈 출자배당금을 재 출자해 기금을 유지하고 있다.

# 마을위한 봉사 공적비로 뜻 기려
서로서로 도와가며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막은리 주민들은 마을 선각자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주민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공적비, 공덕비 등을 세워 공을 기리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정태경씨의 제궁비(濟窮碑)이다. 일제시대인 1929년, 1930년경 살인적인 흉년으로 주민 전체가 굶주려 인명을 하늘에 맡길 정도로 기아에 허덕였는데 정태경씨가 가산을 바쳐 주민을 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 후 흉년이 풀리고 주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자 1936년 주민들이 제궁비를 건립 정태경씨의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의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고향에 들어와 보니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고 전기까지 없는 암흑세상인 것을 안타깝게 여긴 김기돌씨가 1972년 경 그 때 돈으로 1000여만원을 지원해 동네에 전기를 가설해줬다.

당시 원남과 탄금1리에만 전기가 들어왔던 시대로 탄금 2리는 삼승면내에서 세 번째로 전기가 들어온 동네가 됐다. 주민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빛을 준 김기돌씨의 뜻을 기리는 선덕비를 세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또 서당을 세워 글을 배우지 못한 이들의 눈과 귀와 입을 열게 해 준 화은 이우필씨에 대한 공덕비도 세워져 있다.

현 마로면 민원부서 이준상 주사(지방농업 6급)의 할아버지인 화은 이우필 선생이 17년간 서당을 운영하며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가르쳤는데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인근 상가리, 내망리, 천남리 탄부면 서부지역마을에서도 이곳을 찾아 글을 배워 길러낸 제자만 해도 1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고마운 뜻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공덕비를 세운 것이다.

# 비 3개를 군도 변으로 옮기는 것이 숙원
현재 이 비들은 당초 마을의 주요 진입도로였고 과거 외부인들도 이용했을 정도로 통행량이 많았던 장고개에 설치돼 있는데 현재는 농로에 불과해 공적비를 세운 보람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이 그저 흔적하나 남긴 것에 불과한 꼴이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들의 은공을 후세들이나 외부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아리랑고개를 건너 구인∼장개간 군도 변의 도로부지 자투리땅으로 옮기고 이곳을 공원으로 가꾸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있다.

펌프도 없었고 상수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이용했던 공동우물을 없애지 않고 우물 정(井)자로 돌을 쌓아 우물이었음을 알려주고 매년 음력 정월 초삼일이면 어김없이 동 제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막은리 사람들.

유구한 세월동안 계속 되는 전통을 지키고 마을 화합을 최고로 삼으며 온고지신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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