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문(文)향(鄕)
불볕 더위다. 내리쬐는 햇볕이 얼마나 강한지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에서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고 얼마 못 가서 등판은 땀으로 범벅이다. 얼굴도 달아오른다.더위에 지친 가로수 잎들도 축 처져 있다. 차량이 정차시켜 쉴 수 있을 정도로 가로수 그늘이 만들어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차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더위를 식히고 있다.
에어컨 바람 대신 자연바람을 맞기 위해 창문을 다 열고 달리는데 조금도 시원하지 않고 더운 바람만 차안으로 들어온다.
그래도 그 무더위에도 녹색 들판에는 농민들이 태양과 한 판 승부를 겨루듯이 가지거름을 낸다. 그리고 제초기를 어깨에 메고 논둑을 깎는 농민들도 보인다. 그들의 온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오전 10시. 이렇게 땀나는 아침을 보내고 나면 한가한 한낮 시간을 보낸다. 마을마다 있는 큰 느티나무 그늘은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이다.
부채도 필요가 없다. 평상에 누워 불어오는 바람에 온 몸을 맡기고 잠을 청하거나 하나, 둘 느티나무 아래로 모여드는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더위는 싹 가신다.
정말 덥다는 생각을 하면서 찾아간 행정마을로 관기2리인 사여리는 그야말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비교적 나이 젊은 수령의 느티나무 그늘에 할머니 네 분이 모여 더위를 피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 사여리와 관터 전혀 다른 마을
이번 호에 소개할 마을인 사여리는 마로면의 소재지인 관기리에 속하지만 사실상 소재지와는 거리가 있다.
더욱이 관기 우회도로가 건설되면서 사여리(관기2리)와 관터(관기 1리· 3리) 사이에 높은 언덕이 생겨 완전히 관기리와는 분리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우회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도 적암천이 횡단하고 있어 사실상 같은 마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한계를 갖게 했다.
그렇다면 관터와 사여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고봉정사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능성 구씨가 관터 구씨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세거를 하도록 관기에 뿌리를 둔 구수복 선생이 고봉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위해 학문을 강하던 곳이다.
그로 연유해 관터 구씨가 사여리에도 거주하게 된 것이 아닐까. 혼인을 하지 않았던 동생이 관터 큰집에서 보모와 형님과 함께 살다가 혼인으로 일가를 이루게 되자 사여리로 살림을 나거나 하는 식이 아니었을까.
또 사여리의 한자어가 선비 사(士)와 남을 여(余)자를 쓰는 것을 보면 선비들이 거주하는 마을이라고 해석할 수 있어 당시 양반가였던 관터 마을의 주류인 구씨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같은 마을로 볼 수 있도록 형성되어온 것이 아닐까.
# 사여리는 선비들이 살던 곳
사여리라 불리는 관기2리는 총 35호 100여명의 주민 살고 있다. 윗사여 9가구, 아랫사여 26가구이며 최흥복(53)이장과 지도자 구중회(43), 부녀회장 구본선(53), 노인회장은 구연정(71)씨가 맡고 있다.
사여리는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선비들이 살던 곳이란 뜻의 이름이다.
이는 사여리에 있는 고봉정사가 충암 김 정 선생이나 원정 최수성 선생이 학문을 연마하고 병암 구수복 선생이 그 유지를 이어받은 곳이기 때문에 이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주변에서 선비들이 몰려들어 이곳에 하나의 단일마을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마을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글을 읽는 선비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선비 사자가 마을 이름에 연유한 것이 아닐까.
현재 보은군 및 보은문화원에서 간행한 군지와 지명지에는 사여리가 왜 사여리인지 기술하지 않고 있다.
또한 한 마을의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도 이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주는 어른들이 없었다.
다만 사여리를 표기하면서 한자로 士余로 표기하고 있어 이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풀어놓았을 뿐이다.
고봉정사는 사여리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게 만들었다. 충암 김 정이나 원정 최수성이나 병암 구수복이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서도 글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여리는 문향의 고장이었던 것.
관기리 시장에서 기대리 방향에 있는 고봉정사는 원래 지금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봉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원정 최수성 선생이 건립해 후학을 길러낸 곳으로 형조판서를 지낸 김 정 선생과도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후 기묘사화로 낙향해 관터에 터를 잡은 병암 구수복 선생이 이어받아 후학을 길러낸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산 정상에 있던 정자는 없어지고 후에 구수복 선생의 5대 손인 이천선생이 봉 아래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을 때 지금의 건물로 지었고 그 후 아래에 있던 정사도 퇴락해 1981년에 보수, 삼 문을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학문의 경지가 높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들었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고봉정사 현재의 현판은 1979년 12월부터 1980년 8월까지 대통령을 지낸 제 10대 최규하 대통령의 친필이다.
정사 옆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인 고봉사를 둬 이곳에서 학문을 강했던 최수성, 김 정, 구수복 3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봄, 가을로 이들의 후손 및 유림 등이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제 92호로 관리되고 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줄 아는 강직한 선비들의 학풍이 이어졌던 고봉정사는 현재는 이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나 다름 없는 곳이다.
원래 고봉이란 말은 옛날 천지개벽 때 적암리의 시루봉에서 상봉이 떠 내려와 외롭게 정착되었다고 해서 고(孤)봉(峰)이라고 한다고 한다.
정말 외로운 산봉우리라는 지명에 딱 맞게 고봉산은 들판에 홀로 떠있다. 그러나 지형은 너무 멋있다. 옛날 산수화에서 보던 그런 그림같은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 마을 앞 적암천 물길 변경
사여리 주민들은 예로부터 논농사를 많이 지었다. 마을 앞 농경지는 지금과 같이 논이 주를 이뤘고 밭은 산에 화전을 일궈 콩 등을 재배했다.
이렇게 논농사가 주를 이뤘던 것은 아무래도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과 연관이 있다.
논농사가 주를 이뤘으니 쌀이 아주 귀했던 시절 다른 지역에 농지가 없어 화전을 일구어 입에 풀칠하며 겨우 겨우 살았던 마을과는 달리 그래도 생계를 유지하는데는 다소 나았다.
사여리 논농사의 젖줄이었던 적암천은 200여년 전만 해도 최광언씨와 구본양씨 소유의 축사가 있는 곳에서 윗사여에서 아랫사여로 내려오기 위한 모퉁이를 지나 성뫼산 핸드폰 안테나 있는 곳을 지나 삼가천과 합류되었다.
이 마을 구자성씨는 지금의 하천과는 전혀 다른 물길인 셈이다. 즉 지금 마을이 형성된 곳과 마을과 연접된 논이 하천이어서 조금만 땅을 파도 모래가 나온다며 당시 마을은 성뫼산기슭과 산막골 기슭, 솟대배기 기슭 등 산 기슭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선대 할아버지로 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 가축 수 단일마을로는 면내 최고
논농사가 주를 이룬 사여리에는 80년대 초반부터 축산을 시작했다. 집집마다 밭갈이용으로 소를 한 마리씩 기르긴 했으나 다섯 마리, 여섯 마리씩 한꺼번에 많은 마리를 기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현재는 전체 35호 중 10농가가 축산을 하고 있고 총 사육두수는 1200여 두에 이를 정도로 단일 마을로는 사육 두수가 가장 많다.
최흥복 이장도 이때 처음 낙농을 시작해 지금 젖소와 한우를 포함해 200여 두에 이른다.
전업농을 기준으로 한우나, 돼지, 젖소 등 축산이 과수나 벼농사보다 소득이 높은 것으로 볼 때 사여리는 농가당 평균 소득 면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부유한 편이다.
축산농가가 많으면 없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축산 분뇨냄새가 많이 나게 마련인데 사여리는 그런 면에서 마을 주민들이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고 축산농가들을 잘 이해해주고 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의 화합정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인데 농기계를 가진 농가에서 기계가 없는 농가를 위해 모내기 및 비료살포 등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주는가 하면 젊은 사람들이 어울려 연로한 농가를 돕는 등 상부상조하는 마을을 가꿔가고 있다.
이렇게 푸근한 시골인심과 정이 살아있는 사여리 마을 주민들이 꼽는 숙원사업은 바로 마을 뒤 산막골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하수도로 유입하면서 복개한 것을 장기적으로는 원상복구하는 것이다.
자칫 큰 홍수가 져서 산림이 훼손되면 나무 등이 복개한 부분을 막을 경우 계곡수가 마을로 쏟아져 내려와 주택이 쓸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합 잘되고 주민간 서로 도와가며 생활하는 사여리 주민들이 내리 쬐는 퇴약볕을 피해 마을 어귀 둥구나무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면서 골똘히 생각하고 꺼내놓은 현안사업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참 신중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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