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문화원 주최, 10주년 오장환 문학제 ‘아 내 노래는 당신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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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문화원 주최, 10주년 오장환 문학제 ‘아 내 노래는 당신의 것입니다’
  • 송진선
  • 승인 2005.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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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시심에 포옥 빠져보세요
생가터 표지석 설치도 못해
오장환문학제가 태어난 것은 1996년이다.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난 오장환 시인의 생가터라는 표지석을 설치하고 추모예술제를 지냈던 것이 시작이었다.

해방전후기 한국문단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오정환 시인이 1988년에 해금된 후 8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였지만 그래도 마을 주민들에게 오시인은 ‘빨갱이’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때이다.

그가 해금된 시인이고 그를 연구하는 교수들도 많고 박사학위 논문도 나오고 한국 문단의 거장이라는 점이 시골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생가터 표지석은 만들어 놓고도 2년여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회북면사무소 마당 한쪽에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98년 11월말에 주민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 마을잔치까지 벌여가며 마을회관 앞 광장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오장환 문학제를 시작으로 오장환 기념사업은 오장환 생가터 복원사업으로 확대되고 문학관 건립 사업으로 일취월장 발전했다.

올해로 오장환문학제가 탄생한지 10주년, 그동안의 오장환 문학제가 그의 이름에 걸맞는 문학축제로 평가받고 있는가로 물을 때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아 내 노래는 당신의 것입니다
10주년인 올해 문화원은 생가복원과 오장환 문학관 건립 등 문학의 본고장으로써 변모와 함께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전국단위 문학제로 발전시키기 위한 문학제 사업을 마련했다.

충북문인협회와 충북작가회의, 보은문학회, 충북민예총보은지부, 보은 청년회의수, 보은서예협회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백일장은 초·중·고등학생 및 대학생과 일반인 등 6500여명이 시, 산문부분에 출전해 당일 현장에서 제시하는 제목으로 글을 짓게 된다.

이번대회는 보온청년회의소 회원들의 협조를 얻어 글짓기 대회장에 지도교사 등이 출입할 수 없도록 차단해 참가한 학생들의 순수한 작품을 받을 계획이다.

이는 그동안 지도교사나 부모 등의 대회 장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아 참가한 학생들을 현장에서 지도해 수상작에 객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아온 것을 이번 대회부터 없애겠다는 것.

휘호대회는 보은청년회의소와 보은서예협회의 도움으로 대회당일 오장환의 시에서 출제한다.

특히 이번 대회에는 기존의 시화전과는 달리 오장환의 시를 읽고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한 그림 작품을 사전 각 학교에 주문 작품을 받아 전시하는 시그림전을 개최한다.

오장환 생가 예술제는 민예총 보은지부가 주관해 회북면 중앙리 오장환 생가에서 오장환 생가 표지비에 대한 헌화 및 헌배가 있고 문학강연도 연다.

보은군 풍물연합회가 문화예술회관을 출발해 양우당→김천슈퍼→평화약국→중앙사거리→동다리를 거쳐 행사장으로 돌아오는 길놀이로 문학제의 길을 열어 본 행사인 오장환 문학제가 열린다.

이번 문학제에서는 오장환의 시 ‘어린 누이야’와 ‘고향’에 가락을 붙여 시를 노래하는 혜화동 푸른섬이 부른다.

작곡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와 윤도현의 ‘가을우체국 앞에서’를 작곡한 김현성이 했다.

이어 오장환의 시낭송과 해설이 있는 시낭송, 가야금 연주, 축가 등이 불리어지고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영상물도 상영한다.

두 달여 동안 시인 도장환 문학제추진위원장이 발품을 팔아 문단 거장 오장환 및 인간 오장환을 영상에 담은 것으로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또 고은숙 방송인이 낭송하는 시에 대해서는 동덕여대 김사인 교수가 해설을 맡아 해설이 있는 시낭송 프로그램도 열린다.

영상에 담은 것들
◆ 오장환 시작 아침, 화염
10주년 문학제의 중심은 아무래도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영상기록물일 것이다.
추진위원장인 도종환 시인이 정리한 ‘오장환 시인의 발자취 찾아서’를 보면 오장환의 미발표 시와 새로 찾은 사진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오장환이 시발표를 1933년 11월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한 것을 공식적으로 삼고 있으나 이보다 먼저 1933년 2월 휘문고 교지에 ‘아침’과 ‘화염’이란 두편의 시를 발표한 것을 확인해 시계의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목욕간’이 산문시이고 사실주의적 작품으로 오장환시인의 시풍을 산문적, 사실주의적으로 평가했는데 이전 발표작인 ‘아침’과 ‘화염’은 이미지즘적이고 시각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단형시로 평가 됐다.

3행에 불과한 단형시이지만 16살 고등 보통학교 2학년의 솜씨치고는 최상급으로 문학적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화가 이중섭과의 인연
1947년 6월에 출간된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의 속표지 그림은 화가 이중섭이 그린 그림이다.
이 시집의 속 표지 그림이 8·15 해방부터 월남 전까지의 기간동안 이중섭의 작품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고 한다.
이외에 이중섭이 그린 오장환 관련 그림은 ‘추모’라는 작품이다. 알루미늄 박지에 긁어 그리고 유체로 매우는 방법으로 그린 것인데 오장환이 한국 전쟁 도중 도진 지병을 고치기 위해 소련에서 수술까지 받았으나 1951년 끝내 사해 월남하자마자 이 소식을 들은 이중섭이 바로 이 작품을 그려 추도했다고 한다. 꽃구름을 그려 오장환이 좋은데 가서 살라고 그린 거란 얘기다.

◆ 교과서에도 실려
1947년 미군정 시대 중학교 5, 6학년 교과서에 ‘석탑의 노래’가 실려있는 것도 수집했다.
해방 직후 폐허처럼 변해버린 조국의 땅 위에서 천년, 이 천년 웅비해야 할 자세를 노래하고 있는 시로 폐허를 이기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탑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을 가르치고 싶어 한 교과서 편집자들의 의도가 시를 교과서에 싣도록 하지 않았나 라는 도종환 시인의 생각을 적고 있었다.

◆ ‘정지용 능가한 문단의 왕’ 평가
정지용의 제자인 오장환의 시에 대해 1939년 시인 서정주는 문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고 평했을 정도로 한국 문학계의 거장이다.
즉 오장환이 나타나기 전에는 정지용이 왕이었지만 오장환이 나타나고 그 왕의 자리에 오장환이 올랐다는 것.

그러나 오장환시인을 고향 사람들이 얼마나 알까 거리에서 인터뷰한 결과 오장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정작 시성의 고향 보은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오장환문학제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고 했다.

오장환 시인은 1918년 5월15일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태어났다. 1924년 회인 공립 보통학교를 입학, 재학중에 경기도 안성으로 전학한 때가 1927년이었다.

31년 휘문보통학교에 입학했으니 사실 그가 고향 보은에서 지낸 것은 불과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시에는 회인골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많이 내포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에 대한 소질이 있었던지 16살에 이미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했고, 35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지산중학교에 전입 수학했는데 그곳에서 시민부락과 낭만지 동인으로 활동하며 서정주, 김동리, 함영주 등과 함께 시작활동을 벌이고 시적 영역을 넓혔다.

1937년에는 일본 명치대 문과에 입학 자오선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그해 8월에는 첫 시집인 ‘성벽’을 간행했다.

또한 1939년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낭만서방에서 두 번째 시집 ‘천사’를 출간했고 1946년 5월 ‘에세-닌 시집’을 펴냈으며 7월에는 세 번째 시집 ‘병든 서울’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시작활동을 벌였다.

1947년 6월에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간행하고 1948년 정부수립 이전 국토분단을 전후해서 좌우 이념의 심한 대립양상을 보였던 때 혼란을 겪던 시인 오장환은 월북했다.

특히 1946년 제1회 전국 문화가대회에서는 문화예술 분야의 최고 예술가 상을 탔을 정도로 오장환은 그의 스승 정지용을 능가한 당대 최고의 시성으로 평가받았다.

그런 시성을 오는 21일이면 만나볼 수 있다.
우리의 자랑인 시인 오장환을 만나러 21일에는 뱃들공원, 문화원으로 나들이를 준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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