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면 내망1리 김정환·장월선 부부
5남1녀 중 넷째 아들이었던 김정환씨는 17살 되던 해 당시 삼승면사무소 서기로 있던 김 모라는 친일파에 의해 차출돼 징용을 갔다.같은 마을의 최모씨와 함께 징용당했던 김정환 할아버지는 히로시마에서 연탄 및 군수품을 상·하역하는 노무에 혹사를 당했다.
3년간 노무자로 일했던 김정환씨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터뜨렸을 때 친구와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간신히 죽음을 피해 1945년 9월 20살 때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린 삭신이 격한 노무에 혹사당해서인지 집에 돌아와서도 힘든 일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24살 때 19살인 장월선씨를 만나 결혼해 가정을 꾸렸을 때도 힘든 일을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농사의 대부분은 부인 장월선씨의 몫이 되었고 왜 남편이 일을 못하는 모르는 장월선 할머니는 남의 남자들처럼 일 잘하는 남편을 소원했을 정도였다.
자연히 가정은 궁핍하기가 이를데 없었고 때꺼리가 없어 고구마죽으로 연명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위로 딸을 다섯 낳고 아래로 아들 둘을 낳은 장 할머니는 자식들 옷 하나 사면 누더기가 됐을 정도로 기워 입히고 동생에게 물려주는 절약생활을 했다.
그래도 가산이 일어날 기운은 보이지 않아 딸 4명은 초등학교까지만 마쳤다 초등학교만 나온 딸들은 공장에 취직하고 또 남의 집 가정부로 들어가 돈을 벌었다.
그렇게 돈을 번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 막내딸과 아들 둘을 고등학교까지 가르치는데 많은 조움을 받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그때 얘가를 하면 기자양반도 눈물을 흘릴 것이라며 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돌아보기 싫은 시절임을 느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유한 가정에서 일도 많이 안해봤고 가정이 이렇게 어려운지도 몰랐고 또 남편이 아픈 줄도 모른 채 시집을 와 고생을 많이 했다는 장할머니 그 모든 것을 혼자 삭이느라 화병이 생겼을 정도다.
김정환 할아버지는 76년부터는 다리에 마비증세가 와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고 용변도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지금은 아예 몸저 누웠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모두 장 할머니 몫이 됐다.
욕창이 생길까봐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자세를 바꿔주느라 장할머니는 다른 곳보다 팔이 빠질 정도로 아프다고 한다.
장 할머니는 징용만 안갔어도 할아버지는 이런 고생도 안했을 것이고 나도 이런 고생을 안했을 것 아니냐며 일본이 원수이고 징병갈 때 일본놈 앞잡이였던 김가라는 놈이 살아있다면 모든 분풀이를 하고 싶다며 분해했다.
그러면서 장 할머니는 대소변 받아내며 수발 드는 일을 며느리나 딸들이 하지 않도록 내가 죽기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제일 좋겠다는며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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