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암이 조정에 들어가 마지막 유배되기까지 관직에 있은 기간은 약 10년이다. 그 동안의 주요 관직을 보면 대부분이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문신 중에서도 가장 부러움의 대상인 언간(言官)과 경연관(經筵官)을 주로 역임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인격과 학문이 문신들 중에서도 출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경연에 진강(進講)하는 등 거듭 중용(重用)되어 34세에 형조판서에 오르기에 이른 것이다. 조정에 있는 동안 많은 주청과 진강을 하면서 주상에게 임금이 가야할 길을 상주(上奏)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제왕은 공정한 정사를 펴 성군의 길을 걸어야 하며, 임금과 왕후는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하고, 언로(言路)를 열어 공론을 수렴해야하며, 소인배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인재를 등용해야하고 ,향약을 보급하여 풍속을 순화해야 하는 등 직간(直諫)과 정심(正心)으로 임금을 보좌하고 왕도와 인륜의 근본을 강조하여, 당우(唐虞) 3대의 성세(聖世)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30세 되던 해 조정에서 벗어나고자 청귀양소( 請歸養疏)를 올려 순창군수에 제수되었다.
34세에 형조판서와 예문관제학에 탁용되면서 조정암(趙靜庵)과 같이 至治주의의 왕도정치를 펴는데 진력하였다. 이와 같이 정암과 충암을 주축으로 한 신진사림파의 등장으로 뒤로 밀려난 훈구세력들은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중종반정 때 함부로 공신칭호를 받은 76인에 대하여 공훈을 삭제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니 더 큰 앙심을 품게 되었다.
위훈삭제사건을 두고 일부에서는 신진사류 측이 너무 과격했다는 지적도 있으나 조선조 개국 이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많은 공신이 생겨났고 ,공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훈작과 더불어 광대한 토지를 마구 나누어 주다보니 국고세수는 줄어들고 새로 임명된 관직에는 나누어줄 땅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 할 때 사회기강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도 반정공신에게 남발된 훈작을 삭제하고, 토지를 환수한 것은 불가피 하였던 조치로 이해된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충암은 그 지역의 흥학교화(興學敎化)에 힘썼고, 예법을 가르쳤으며, 미신을 타파하고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였다.
1년여의 제주에 머무는 동안, 언제 사약이 내려질지 모르는 극한 상황 하에서도 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는 등 마지막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이웃과 사회를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였다.
이때 저술한 제주풍토록은 지역최초의 풍토지리지라는 점과,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수필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며, 1500년대의 제주도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충암은 20세에 11잠을 지어 유학자로서의 심성과 행실의 지표로 삼고 자성과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1잠은 일종의 자경문(퇴계의 자성록이나 율곡의 자경문과 유사).으로서 무려 일만여 자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고 그 내용은 서문으로 시작하여 언잠, 행잠, 지잠, 용잠 등 11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20세 젊은 나이에 벌써 성인의 도를 깨닫고 고고한 정신세계에 도달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거경궁리지학(居敬窮理之學)에 몰입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른들의 명으로 과거를 보아 대소과에 거듭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그런 것은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과 도덕은 정지(精志)를 핵심으로 하여 자강불식(自彊不息)하며 부화(浮華)를 배격하고 양심에 근거하여 지선을 추구하되 공리주의를 배제하고 있다.
그는 행잠(行箴)에서 위선(爲善) 무근명(無近名)을 거금지시(居今之時)에 가이종신행지(可以終身行之)라고 하였다. 즉 선을 행하는 것은 명성에 가깝지 아니하다 했는데 지금 시대에도 이를 행할 만 하다는 것이다.
지잠(志箴)에서는 그 뜻을 지키기를 돌과 같이 한다(守志如石)하였고 ,군자지행은 도덕에 어긋남이 없고, 선(善)을 보았을 때는 내가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을 걱정하고, 악(惡)을 보았을 때는 열탕(熱湯)을 더듬는 것같이 경계하라 하였다. 예(禮)와 의(義)를 지킴에 있어서는 밝기를 일월과 같이하고 곧기를 빙옥(氷玉)과 같이 한다 하였으며 군자가 정도로서 처신함에 확연불발(確然不拔)하고 백도재전(白刀在前)이라도 불변어색(不變於色)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도덕의 실천에 있어서는 확고하고 의연한 의지를 지녔지만 그 도학지상주의 속에는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이 있어서 항상 훈훈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었다. 기묘사화에 화를 입고 죄인의 몸이 되어 과거 군수로 재임하였던 순창을 지날 때 순창백성 남녀노유가 술과 음식을 들고 나와 연도에 늘어서서 울면서 선생의 피죄를 원통해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분한잠(忿恨箴)에서는, 남에게 원한의 마음이 있다 해도 그것을 말이나 태도로 나타낸다면 어찌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호오잠(好惡箴)에서는 설령 남이 나를 모함한다 해도 나는 그 사람을 모함하지 않겠다. 덕으로 덕을 갚는 것은 남도 알고 나도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일을 나는 남에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군자는 용서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니 지난날의 남의 잘못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특별히 남을 좋아하지도 않고, 특별히 남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누구를 헐뜯어 말하지도 않고, 누구를 추켜세워 말하지도 않는 것이 성인의 태도이다. 좋아하고 미워함이 지나치게 치우쳐 공정하지 못한 것은 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그의 단점을 알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그의 좋은 점을 아는 자는 세상에 드물다고 하였다.
특히 일락잠(逸樂箴)에서는, 안일하게 놀기만 하면서 잘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인간의 복락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 즐거움이 다하기 전에 반드시 근심할 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렇게 천일을 즐겁게 지냈다한들 지나고 나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천일동안을 즐겁게 지낸 것이 하루 동안 마음 쓰며 산 것 만 못하다고 하였다. 현대인은 행복의 기준을 육신의 즐거움과 물질적 풍요에 두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만 집착하다보면 인간은 마침내 타락하고 말 것이며 ,근심. 걱정이 끊일 날이 없을 것이다. 충암 선생은 이러한 점을 미리 엄히 경계하여 항상 마음을 늦추지 않고 성인의 길을 좇아 학문과 수행에 성열을 다한 것으로 보여 진다.
충암은 이름 높은 경세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학자요, 예술가요, 강직한, 성리학자로서 후세의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는 조선조의 명현이다. 그러나 그는 기묘사화의 주 피해자이면서도 주위의 무관심으로 정암 조 광조에 가리워져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경향이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김 홍 영(마로갈평)
·보덕중(5회)중동고, 고려대
고려대 경영대학원
·한국 증권거래소(26년), 현대증권
·미시간 주립대 학술연수(2년)
·경기대사회복지대학원
·재경보덕중 직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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