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없이 사려져 버린 눈 - 폭설피해를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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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없이 사려져 버린 눈 - 폭설피해를 겪고
  • 보은신문
  • 승인 2004.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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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른 새벽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제 보은읍 이장협의회에서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신 남편의 목소리였다.
이 사람아 여태 잠을 자...하시면서 보은에 눈이 많이 왔다고 하는데 아무 일 없느냐고 하신다. 순간 밖을 내다보니 온 동네가 하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어머! 정말 많이 왔어요.’괜시레 하얀 눈으로 덮힌 앞마당을 보니 소녀처럼 즐거웠다.

통화를 끝내고 순간 하우스가 걱정이 되어서 나가 보았다.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깨끗한 눈 위를 마냥 콧노래를 부르면서 걸어보았다. 뽀드득 뽀드득 잠깐 나이도 잊은 채 즐거워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퍼붓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고추 온상 해 놓은 하우스가 내려앉지나 않을까? 좀 전에 걱정스러워서 쓸어 내렸는데... 앞이 안보일 정도로 퍼붓는 눈은 어떻게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몇 분전에 남편에게 우리 하우스는 아직 아무 이상 없다고 통화했는데... 딸아이와 열심히 쓸어 내린 보람도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큰일났네. 금년에도 고추 농사 망치는 것 아냐?’ 동네 분들 도움으로 앞쪽마저 무너질까봐 쇠파이프로 중간 중간 세워놓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가 훤한 것이 이상했다. ‘어머! 여기가 왜 이래?’ ‘희진아, 우리 축사 무너졌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서있다 생각하니 축사에 있던 강아지가 안보였다. 눈 더미와 스레트 무게에 눌려 죽었구나 생각했다. 한참 지나 눈 구덩이 속에서 강아지 소리가 나는 듯 했다.

‘찬희야, 우리 강아지 살았나봐’ 스레트를 치우고 눈을 파 보니 강아지 5마리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얼마나 놀랬는지 덜덜 떠는 것이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너희들도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게로구나?’다행이야. 조금 전에 남편한테 하우스 무너졌다고 통화했는데 또 전화를 해야 할까? 모처럼 여행 가셨는데 마음 편치 않을 텐데...

‘여보, 어떻게 하지? 우리 축사 무너졌어요.’ ‘할 수 없지...’ 안쪽에 있는 창고는 괜찮냐고 물으신다. 아직까지는 이상 없다고 통화를 끝냈다. 정말 무릎까지 쌓인 눈은 어떻게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오후가 되니까 눈이 조금 뜸해지는 것 같았다. 무너진 하우스 속에 고추 모종이 궁금해서 가 보았지만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속수무책이라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작년에는 태풍 매미가 주렁주렁 달린 고추밭을 싹 쓸어 갔는데 올해는 눈이 많이 와서 작은 모에서부터 버릴 것을 생각하니 농사를 짓는 우리에겐 큰 걱정이 앞선다.

남편도 걱정이 되시는지 자주 전화를 하셨다. 여행이 아니라 집 걱정하러 떠나신 느낌이 든다. 새삼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부터 손을 써야하지?...’ 무너진 하우스와 축사만 바라보면서 대책이 서질 않는다.

농협에 계시는 여성복지 담당이신 연용덕 과장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말티재를 못 넘어와서 농협 속리산지점에서 업무를 보신다고 하시면서 회장님 댁에는 아무 일 없는지를 물었다. 눈이 많이 와서 걱정이 된다고 안부 전화를 하신 것이다. 어제 하우스에 눈을 끌어내리느라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지 몸살기가 있는 것 같다. 움직여야 힘이 날 것 같아서 사람하나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눈길을 치우고 있는데 보은읍사무소에서 산업계장님이 올라오셨다. 눈 속에 어떻게 오셨는지 너무 반가웠다. 이장님도 안 계시는데 눈 피해가 얼마나 났는지 걱정이 돼서 올라오셨다고 한다.

3월 7일 새벽 4시 여행가신 남편께서 돌아오셨다. 청주공항에서 내려야할 비행기가 폭설로 착륙할 수 없어 인천공항에서 오셨다. 잠깐 눈을 붙이시고 아침에 집안을 둘러보시더니 폭격 맞은 것처럼 무너져 버린 축사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으신 표정이시다. 아침식사를 하시고 트렉터로 큰길에 눈을 치우신다고 나가셨다.  동네 큰길을 치우고 찬희네 집에서 따뜻한 차 한잔 준다고 해서 잠깐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딸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가슴을 쿵하고 내려친다. ‘엄마 큰일났어요. 우리 창고가 또 무너졌어요.’라고 한다. 어떻게 해 우리 창고가 또 무너졌대 희진이 차도 창고 안에 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창고만은 괜찮겠지 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눈길이라 뛸 수도 없고 발은 푹푹 빠지지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지금도 생각이 잘 안 난다. 조금 전에 읍장님과 산업계장이 오셔서 ‘이건 설마 안 무너지겠지요?’하고 가셨는데 정말 너무나 황당스럽다.

‘98년도 수해 났을 때 침수되어 철재로 세워서 튼튼하게 지었는데 축사 무너져 내린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프고 너무 아까워서 남편과 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여보, 어떻게 하지...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늘을 쳐다보신다. 희진이는 차가 자기 재산 목록 1호인데 부서졌다고 마당 한가운데서 엉엉 울고 서 있다가 급하게 뛰어오는 나를 보는 순간 엄마 내차 어떻게 하냐고 안절부절이었다.

이웃에 계시는 목사님도 쾅하는 소리에 놀라서 뛰어나오시고 어느새 동네 분들이 웅성웅성 모여 계셨다. 울고 있는 희진이를 안정시키고 이웃 분들의 도움으로 희진이 차를 꺼내 놓고 다급한 대로 무너진 창고 바닥에 있는 눈을 치웠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축사와 창고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보은농협 연용덕 과장님의 전화가 왔다. 어제 이런 상황을 고향주부모임 총무님 하고 오셔서 보고 가더니 인력지원을 해주신다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하셨다.

오후에 전경아저씨 몇 분을 지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순간 눈물이 핑 도는게 봉사의 도움이 이런 거구나! 정말로 고마운 마음이다.

아침을 먹으며 TV 뉴스를 보니 우리보다 더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농가가 가슴을 애태우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보다 더 피해가 많은 농가 먼저 지원을 해주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조금이라도 더 도와주시려고 배려하시는 마음에 감사한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서 내일은 농협직원과 고주모, 농주모, 풍물 회원님들을 모시고 사과밭에 그물 망 제거 작업 일손 돕기를 하기로 하였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사과나무 하나 성한 것이 없이 가지는 다 부러지고 몸둥이만 덩그러니 서 있는게 너무도 불쌍해 보였다. 몇 년을 애써 키워 놓았는데... 하루아침에 다 망쳐 놓다니 하얀 눈이 원망스러웠다. 보은농협 안종철 조합장님과 김철구 전무님을 비롯 직원님들 모두 휴일도 없이 벌써 몇일째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는 모습에서 용기와 희망을 얻었고 농협과 농민들 사이에 정말 상부상조하는 보람 있는 좋은 하루였다.

오늘은 남편이 봉사활동을 가신단다. 방울토마토 하우스인데 거대한 시설도 요번 폭설에는 어쩔 수 없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 열매가 죽어 가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단다.

우리 하우스, 축사, 창고 모두가 대충 치워놓은 상태인데 봉사활동이라니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우선 밖으로 나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 자신도 그렇고 남편도 그런가 보다. 봉사활동 가는데 내 것도 안하고 가는 그이가 이해가 안될 때도 있지만 아마 남편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피해가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남편을 위로해 본다.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은 갔지만 축사와 창고도 다시 짓고 비닐하우스 속에 고추 모종도 눈 속에 눌려서 살 것 같지가 않았는데 정말 매일 매일 정성을 다해서 소중하게 키웠다. ‘올해는 너희들이 잘 자라야 돼 그래야 농사짓는 우리에게 보람이 있지’하면서 나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 이후 정말로 내 마음을 전해 들었는지 튼튼한 고추모종이 되었다.

하우스 속에서 새 밭으로 이사간 고추 묘도 쑥쑥 잘 자라고 있다. 재산1호라고 생각하는 희진이 차도 새로 고치고 놀래서 며칠 밥을 안 먹던 강아지도 이젠 잘 논다. 세상을 얼마 살아보지 않았지만 수해 두 번과 또 다시 폭설피해를 입다니 이런 이 또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름답게 보이려고 꽃망울을 볼록볼록 내밀다가 폭설에 못 이겨 자기 자태를 자랑하지 못한 목련과 개나리처럼 우리 농부들의 마음도 따뜻한 봄의 문턱에서 농번기 준비를 하다 뜻하지 않은 폭설에 피해를 입은 농가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한없이 내리다가 피해를 많이 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눈 때문에 성실하고 열심히 살려는 농부의 마음을 시리도록 아프게 한 3월에 내린 100년만의 폭설은 앞으로 내 생애에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3월이 될 것 같다.

비록 쓰린 아픔은 있었지만 농협과 각 기관을 비롯해 많은 분들께서 도움을 주시면서 따뜻한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었고, 이제는 아팠던 시련을 극복하고 좋은 쌀을 생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바쁜 모내기철을 보내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지만... 등줄기에 흐르는 땀방울로 결실을 맺는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일하는 것이 힘은 들지만 아름다운 농촌을 지키며 열심히 산다는 것이 즐겁다.

올 농사 꼭 대풍이었으면.... 내일은 우리 논에 모내기하는 날인데 일찍 자야지....
/한윤숙(보은농협 고주모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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