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억이가 생각난다. 삼억이는 오래전에 우리 집 작은 마당에서 일 년 남짓 살다가 가출한 개 이름이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큰아들이 어느 날 두 달짜리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왔다. 개에 대한 안타까운 소녀시절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아내는 아연실색했다. 개를 키우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쩔거냐는 것이었다. 삼억 원을 준대도 ‘절대 안된다’는 엄마에 대항해서 작은아들까지 형제가 담합해서 붙인 이름이 삼억이다. 이 녀석은 엄청나게 많이 먹고 빨리 자랐는데,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싸움 개만큼 커 버렸다.
그런데 어쩌다가 삼억이는 치명적인 심장사상충에 감염되어, 식욕을 잃고 잠만 잤다. 우리 식구들은 앉기만 하면, 삼억이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겹겹이 잘 싸서 고향 집 감나무 밑에 묻어주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외출하기 위해서 삼억이 혼자 마당에서 놀라며 목 끈을 풀어놓고 대문을 여는 순간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흘 동안 대문을 열어 놓고 잠을 설쳐가며 기다렸지만, 삼억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사후 처리를 걱정하는 우리 식구들의 얘기를 엿듣기라도 한 것일까. 병원에 간 앞집 아재의 퇴원이 늦어지자 집을 지키던 순돌이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삼억이 생각이 났다.
우리는 개 짖는 소리를 ‘멍멍’이라고 표현한다. 중국 개는 ‘왕왕’(汪汪)하고 짖는다. 영어권의 의성어는 ‘바우와우’(bow-wow)다. 독일 개는 ‘바우바우’(wau-wau)라고 굵게 짖고, 프랑스 개는 ‘우아우아’(wouaf-wouaf)로 조금 더 섬세하게 짖는다. 유럽에서 개는 믿음의 상징이다. 개 짖는 소리를 ‘왈왈’(wal-wal)이라고 표기하는 크로아티아나 ‘아브아브’(av-av)로 듣고 있는 세르비아에는 각각 ‘개는 믿음을 논하지 않는다’거나 ‘개처럼 믿음직스럽다’는 속담이 있다. 폴란드인들은 개가 ‘아우아우’ (au-au)하고 짖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루마니아로 가면 개는 ‘함함’(ham-ham)하고 짖는다. 동남아에서 개 짖는 소리는 더욱 흥미롭다. 태국에서는 개가 ‘홍홍’(hong-hong)하고 짖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공공’(gonggong)한다고 한다. 종족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먹는 것도 조금씩 다르다. 그래선지 사람에 따라서 같은 소리도 다르게 들린다는 것이다.
콸라룸푸르로 영어 연수를 갔던 큰아들이 주말을 맞아 수강생 동료들과 함께 말레이 반도 북부의 작은 마을을 방문하였다. 그 마을에는 유독 닭이 많았다고 했다. 닭 우는 소리는 고향 동네에서 익히 듣던 ‘꼬끼요’가 분명했다. 그런데 현지인들에게 닭 우는 소리를 물었더니 ‘꼬떽’(kotek)이 아니냐고 반문을 했다. 함께 간 한 여학생이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울먹이는 표정을 해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서울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여학생의 귀에는 닭 울음소리가 ‘엄마야’로 들렸던 것이다. 어찌 개 짖는 소리나 닭 울음소리 뿐이랴. 총소리를 영어권에서는 ‘뱅뱅’(bang bang)이라고 표현하고,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우리의 ‘탕탕’하는 총소리가 ‘도르도르’ (dor-dor)로 들린다.
우리는 지금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빠르게 변화를 거듭하며 가까워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구촌 구석구석의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에서 만나고 있다. 칠레 포도가 식탁에 오르고 남아공에서도 쉽게 한국 라면을 구입할 수 있다. 우리 차가 사막을 누비고 있고, 우리의 반도체가 무한 공간을 유영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이웃과 서로 다른 생각과 판단을 인정하는데 몹시 인색하다. 나와 다른 남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주저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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