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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에서
[1348호] 2017년 10월 12일 (목) 김정범 내북면노인회장 webmaster@boeuni.com
긴 연휴라 해도 내게는 별로 다를 게 없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니 그냥 따라 갈 뿐, 그래서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추석 다음 날 가족이 함께 1박2일 일정으로 남해안을 다녀왔는데 역시나 여정의 절반은 도로 위에서 보낸 것 같다. 나는 전에도 몇 차례 다녀 온 적이 있지만 예전에 보았던 남쪽 바다가 좋았다고 해서 다시 찾아가는 길이 지루하고 답답하여 짜증이 나도 오랜만에 나온 아내는 그래도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집에 돌아와서는 하는 말이 집 떠나면 고생이니 뭐니 뭐니 해도 내 집이 제일이란다.
열흘이나 되는 추석 연휴가 끝나고 나니 가을이 성큼 달아난 느낌이다. 비가 내리면서 기온도 내려 갈 것이라 했어도 그냥 살짝 스쳐 갔을 뿐 그런대로 날씨도 좋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요즘 같은 때에 비가 자주 내리게 되면 가을도 젖어 날씨도 쌀쌀해지려니와 추수에 어려움이 많아지기 때문에 지난해에도 그랬기에 금년에도 또 그럴 가 염려가 되어서이다.
어제는 집 앞에 몇 십 포기 심어놓은 수수를 잘랐다. 지난해에는 새들에게 다 빼앗겨서 애써 지은 농사를 새들 좋은 일만 했다고 아내가 속상해 하며 남들처럼 망이라도 미리 씌울 것이지 그랬다고 원망을 들었기에 금년에는 나도 이삭이 나와 영글기 시작 할 무렵에 망 주머니를 사다가 씌워 놓았더니 그 모양이 마치 영국 왕실의 근위병과 흡사하여 내가 수숫대와 병정놀이를 한 것 같아 혼자서 실없이 웃어보기도 했는데 이젠 역모를 꾀한 죄인도 아니면서 목이 잘린 채 뼈대만 서 있는 모습에서는 왠지 내가 죄인이 된 느낌이다.
창조주께서는 만물을 지으실 때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 지으셨다고 했다. 그러기에 그 모든 자연은 사람에게 속해 있고 사람 또한 그 자연 속에 있으니 자연이 나를 안아주듯 나 또한 자연의 순리에 따르며 사는 것이 창조주의 뜻을 따르는 삶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또 자연 속에는 수많은 생명이 있고 그 생명들 가운데 나도 속해 있으므로 내가 사는 날 동안에는 나도 선택 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생각하며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주신 은혜만으로도 가치를 찾아 누리는 삶이 되도록 해야 될 것 같다.
다음 주 초에 벼 베기를 하려고 날을 잡아 놓았다. 이젠 머지않아 풍요로운 논밭이 빈들이 되어 그 잔해들만이 찬이슬 찬 서리에 덥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가을도 끝날 터인데 그렇더라도 이러한 자연 속에 내가 있어 이렇듯 달아나는 시절을 따라 이젠 익어 간 곡식들을 또 거두어들일 때가 되었으니 풍성함이 주는 감사의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가을로 인해 이 땅위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때문에 연민하는 것 또한 쫓겨 가는 가을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하던 대로 들길을 걷기 위해 나섰다. 갈대 무리가 아무렇게나 엉켜서 하얗게 흔들리며 손짓을 하고 있다. 개울을 끼고 가는 들길이 오늘 따라 낮 선 느낌이다. 문득 코흘리개 내가 찾아오면서 그때 여기서 같이 놀던 얼굴들이 떠오르고 이름도 하나 둘 불러보며 그 옛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나도 모를 착각이겠지만 그래도 평온한 느낌이다. 또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꽤 넓은 농로가 되어 있지만 그 때는 풀밭 길이였기에 학교를 청주에서 다닌 나는 여름 방학 때 집에 오게 되면 오후에는 소를 몰고 이 곳에 와서 풀을 뜯기곤 하였는데 그 때 내 손엔 책이 들려 있었다. 논밭 갈고 달구지 끄느라 고되게 일 만 하던 우리 집 소도 이 때만은 그래도 한가로이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가 꼴을 먹으려면 두 세 시간은 걸려야 하기에 고삐를 목에 감아 주고 놓아두면 착하고 온순한 소는 제가 알아서 꼴을 뜯고 그러면 나는 그 사이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펼치게 되는데 그 때 읽었던 명작들은 지금도 내 속에 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석양이 산마루에 거리게 되고 어느 때는 소가 보이지를 않아 한참을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그래도 /고개 넘어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놀지는 저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논둑길 휘파람 불면서 /아이들도 지금 쯤 소 몰고 오겠네, 라는 동요를 부르며 돌아가던 이 길이 지금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제 같기도 하고 아득한 옛날 같기도 한 세월 탓인지 아니면 길이 변한 탓인지 아니면 내 나이 탓인지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문학소년 소녀였듯이 책 읽기를 좋아 했던 나도 그 무렵 그래도 꽤나 많은 책들을 읽게 되었는데 그 때 책을 읽으며 배우고 깨닫고 생각하게 된 것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를 잡아주고 이끌어 준 스승이 되어 주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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