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1】
당대에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고승이 있었다. 가문도 벌쭉하여 출세의 길로 들어가려고 등과하여 태학에 들어가 정진했다. 효심이 지극한 그는 어머님의 병환으로 집에 돌아온 계기로 불경에 매진한다. 이후 타고난 어진 성품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스승인 지눌 선사가 입적하자 조계종 2세가 되어 큰 족적을 남겼다. 이런 스님이셨지만 맑은 물속에 비친 자기 머리털을 보고 ‘눈과 서리 누가 가꾸었나?’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우연히 맑게 고인 맑은 물속 들여다보니
눈과 서리 머리 가득 나 몰래 가득 찼네
훌훌 턴 근심걱정인데 흰 머리 누가 가뀠나.
偶爾來臨止水淸 滿頭霜雪使人驚
우이래임지수청 만두상설사인경
不憂世事兼身事 誰得栽培白髮生
불우세사겸신사 수득재배백발생
누가 가꿔 이 흰 머리털 나게 했던가(臨水)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무의자(無倚子) 진각혜심(眞覺慧諶:1178∼1234)으로 고려의 고승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어머니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와 불경을 공부했다.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들어가 조계종 2세가 되어 불심을 전한 선사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우연히 와서 맑게 고인 물을 들여다보다가, 머리에 가득한 눈과 서리를 보고 깜짝 놀랐네. 세상일도 내 일도 근심하지 않았건만, 누가 가꿔 이 흰 머리털을 나게 했던가]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물가에서]로 번역된다. 무의자 대선사의 불심을 기리는 찬시 한 수가 있다. [임 떠난 지 팔백여년 남은 불향 피워 물고, 이 땅에 환한 촛불 온 누리 밝히시니. 화순골 태생지에서 피어나는 연화랍니다] 자신의 머리가 희어짐을 느낀 날에 허탈함에 젖어 보았던 경험이 있을게다. 혜심에게도 어느 날 문득 그런 느낌을 받았음을 본다.
스님이란 본디 세상사 근심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늙지 않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세월’이란 사람을 위해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머리에까지 눈과 서리를 재배하고 말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조견경백발(照鏡見白髮)]을 쓴 장구령(張九齡)이나, [백발유공도불비(白髮惟公道不悲)]라 ‘오는 백발도 슬퍼할 기력이 없다’고 탄식했던 삿갓의 표현에서 보듯이 누구나 시대를 막론하고 세월 앞에선 무기력해졌으니. 거울 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이겠다.
【한자와 어구】
偶: 우연히. 爾來臨: 여기에 오다. 止水淸: 고인 물을 들여다 보다. 滿頭: 머리에 가득 차다. 霜雪: 서리와 눈. 使人驚: 놀라다. 곧 머리가 본인을 놀라게 하다는 사역형. 不憂: 근심하지 않다. 世事兼身事: 세상의 일과 자신의 일. [兼]은 연사임. 誰得: 누가. 栽培: 재배하다. 白髮生: 백발이 나다.
저작권자 © 보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