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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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정원에서
  • 김종례(문학인)
  • 승인 2023.11.1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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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독대 앞에 둥그렇게 터를 잡았던 국화는 아직도 가을의 상징으로 남아있지만, 어제까지도 웅크리고 앉아있던 천인국,마리골드,천일홍이 밤새 서리폭탄을 맞았다. 지난 계절 그리도 아프게 피고나졌던 꽃잎들 하나둘 사라지고, 급기야 진록의 열정은 붉은 꽃물이 되어 가슴에 고이던 가을도 지나갔다. 곤충들의 박제가 흩어져 있는 꽃밭에서 꽃씨를 받아 냉동실에 월동시키는 일도 가까스로 마쳤다. 묵묵히 제자리 지키던 나무들도 빈 가지를 흔들며 가을을 배웅하고, 가닥가닥 불어오던 애잔한 바람소리에 텃새들도 후루룩 날아오르며, 한해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작은 정원이다. 잠깐 보였다 사라지는 곡예사의 멋처럼 화려하게 마술을 부렸던 정원의 한해살이를 뒤돌아보니, 푸른 잎새 하나, 붉은 꽃잎 하나가 내 청춘의 한 페이지처럼 낙인을 찍고 말았다. 폭염과 홍수의 반복으로 힘들었던 시간조차 세월의 나이테를 탄생시킨 소중한 터널이었나 보다. 씨앗을 뿌리고 소망을 품었던 봄날부터 거센 투쟁의 몸짓으로 씨름하던 여름을 거쳐서, 그리움과 애수가 단풍빛깔로 스며들던 가을도 이렇게 지나가는 중이다.  
  오늘은 남편이 정원의 검불때기 잔해마저 빈 수레에 실어 내보내니, 머리가 별빛처럼 맑고 개운해진다. 채우기만 하던 만선의 밧줄을 슬그머니 풀어주고 다 비워낸 정원에 서보니 참 홀가분하다. 쓸쓸함과 공허함이 엄습해 오는가 싶었지만 의외로 마음이 가라앉으며 고요하다. 시래기를 엮어서 창문틀에 걸어놓는 일, 월하감 껍질을 깎아 감발을 만드는 일도 남편의 몫이다. 점점 노쇠해져가는 육신을 끌고 감나무 아래에 무 저장고를 파는 일로 월동준비가 끝나면, 생명의 태반을 품었던 정원의 꿈은 막을 내리고, 암세포처럼 자맥질하던 꽃 뿌리들도 동면에 들어갈 것이다, 속절없이 흔들거리며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이 앞서는 내게, 빈 나뭇가지에 걸린 낮달이 어슴푸레 미소를 보낸다. 누구나 순환의 굴레에 적응하고자 나름대로 씨름하면서 겨울을 마중하는 요즘이다. 모든 걸 내려놓음으로써 무한정의 평화를 갈망하면서~ 비워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곳간 섭리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또한 11월의 정원은 우주 만물 모두가 거래의 원리임을 가르친다. 마른 가지 장작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겨울이 온다 하여도, 그 또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와 이동임을 알아차리게 한다. 모두가 우주의 섭리에 따라 본질을 찾아가는 겸손함과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세월과 함께 달리는 사계절과 24절기의 변화도 에너지의 교류이고 이동이라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하게 지나갈 뿐인데 ~ 아픈 산고 꽃샘추위를 겪어야 새 봄이 올 것임을 미리알고 침묵할 뿐인데 ~ 공연히 사람들의 발걸음만 동동거리며 분주한 11월이 아닌가 싶다. 
  둥근 돌이 하루아침에 우연히 생길 리 없고, 오랜 나무가 공연히 버텨온 이유가 없을 것이며, 지는 낙엽 또한 사연이 없을 리가 있으랴만, 모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 것이다. 꽃도, 시간도, 사람도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을 배우게 되는 11월이지만, 우리는 새해, 새봄의 소망을 꿈꾸며 다가오는 겨울도  승리해야 할 것이리라. 진정한 승리는 비워야 승리할 수 있다는 우주섭리를 새기며 묵묵히 가는 것이리라. 달도 차고 넘치면 기우듯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이치에 순응하며, 계묘년의 남은 시간도 의미있게 보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 형태를 불사르고 한 줌의 재로 남아야 하는 인생의 숙명이 정원의 한해살이와 비교되는 이 순간에, 저음의 환타지아‘낙엽따라 가버린 ~ ~’을 흥얼거려 보는 것도 과히 어색하지만은 않음이다.   
  울타리에 상반신을 기대고 개울 건너편 산야를 내어다보니, 거기에도 청정하고 수려한 겨울 수묵화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목련나무 그늘 아래서 차담을 즐기던 빈 탁자에는 낙엽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덩그마니 앉아있는 빈 의자를 넘나드는 바람만이 고독한 편지를 쓰는 중이다. 나도 늘 곁에서 함께 익어나가던 사람이 이 쥐똥나무 울타리를 벗어나서, 구불거리는 골목을 지나서 영원히 떠나지는 않을까 ~ 갑자기 조바심이 드는 순간이다. 우주의 섭리 가득한 11월의 정원을 서성대는 내 가슴에 폭설이 성급히 내려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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