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지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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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지기 벗
  • 오계자 (소설가)
  • 승인 2021.03.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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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이 따로 없이 눈만 뜨면 바라보는 벗이다. 동쪽 창 아래 책상을 둔 탓에 창문만 열면 바라본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반세기를 바라 본 벗이다. 천년의 세월을 안고도 언제나 편안하고 넉넉한 품으로 우리 동네를 보듬은 진산이다. 호적에 이름이 있을 터이나 그 이름조차 모르고 그냥 반세기 동안 뒷산이라 불러 온 벗이다. 언제나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반겨 주던 여고시절 학교 정문 앞 단팥죽 아줌마 같은 품이다. 내가 단팥죽을 좋아해서 자주 들리면 “배고푸재” 하며 옹심이 더 주시던 아줌마를 닮았다. 그래서 더 편안하고 좋다. 내가 힘들 땐 말없이 안아주고, 기쁠 때는 따라 웃는 벗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산자락에서 태어나고 산에 묻힌다는 관념 때문인지 산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특히 우리 동네 뒷산처럼 해가 뜨고 달이 뜨는 마을의 동쪽 산은 거의 신앙이 되어 두 손 모은다. 나의 벗은 사람으로 치면 가문 문벌에 해당하는 앉음새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명당이다. 훤칠한 체격이나 번듯한 외모 또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품새다. 깊은 계곡이 없어서 물을 저장한다거나 관광 거리가 되지 못하니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쓰임새에서 살짝 거시기하다. 하지만 된바람을 막아주고 든든한 진산이 되어주는 쓰임새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어디 그 뿐이랴. 마을 앞 저수지가 눈물과 한을 받아 준 너른 가슴이라면 50년 지기 벗은 언제나 내게 희망을 주었다. 정월 대보름날 월출에 맞춰서 두 손 모으고, 설날이면 아침놀 퍼 올리는 벗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그때마다 헌 마음 씻어내고 새 마음 담아주던 벗이다.
어릴 적 본의 아니게 저지레를 해놓고 겁먹은 가슴 조일 때, 엄마는 쓰다듬어 주시며 “알면서 잘못을 저지르면 절대 용서 못하지만 실수는 반성하고 다음부터 조심하면 된다.”고 하셨다. 진정 든든한 정신적 힘이 되셨던 엄마처럼 살다가 고달플 때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준 뒷산도 엄마 품을 닮아서 더 좋다.
고민이 생겼다.
서너 해 전부터 봄이면 아까시 나무가 자꾸만 늘어나는 것이 현저하게 보인다. 지난  봄에는 하얀 아까시 나무 꽃이 뒷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했다. 점점 불안하다. 저러다가 온 산을 전부 장악할 것 같다. 아까시 나무와 칡넝쿨은 옛 저잣거리 무뢰배들 같은 느낌이 들고 다른 나무들은 무뢰배들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는 착한 주민들 같은 생각이 든다. 예쁜 꽃을 피워 꿀을 제공하는 고마움도 있지만 생명력이 지나치게 강해서 다른 나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세력을 확장하니까 나쁜 이미지를 가졌는지 모르겠다. 오늘 마침 겨울이지만 다소 포근해서 창문을 열었다. 그나마 아직 버티고 있는 상록수들 덕에 군데군데 검푸른 색깔로 의젓하게 품새를 유지하고 있다. 올 정월에는 동네 회의 하는 날 상의를 해 봐야겠다. 실은 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 동네 산도 아닌데 넵둬유.” 이렇게 여론이 모아질까 염려되어 망설인 것이다. 산주가 누구이든 수종갱신해서 아름답게 꾸며주면 우리 동네는 좋을 것이라고 우겨야겠다. 삼라만상이든 사람이든 외모 출중해서 나쁠 것 없다. 사기꾼도 잘생겨야 믿어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살다보면 외모로 인해 울고 웃는 일이 많다. 우리 동네를 품고 있는 진산이 아름다운 나무들을 많이 품어서 지금보다 더 출중해지면 동네에 좋은 기운이 들어올지 모른다. 무뢰배 같은 아까시 나무는 아무래도 마을에 좋은 기운을 주지는 않을 것 같다.
묵묵히 앉아있는 것 같아도 가끔은 나에게 설렘과 감동을 주기도 하는 벗이다. 지난여름 어느 날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을 못 하고 비온 뒤 산책 나갔다가 벗의 멋진 자태를 보고 몽환적 설렘으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자욱한 산안개를 두르고 있는 몸체는 보이지 않고 봉우리만 은은한 동양화처럼 몽환적인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산 아래 절의 기와지붕이 분위기를 한결 업그레이드 했다. ‘와! 과연 멋진 벗이구나.’ 행복한 감동이었다. 50년 지기 벗을 아름답게 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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