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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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의 방
  • 송원자 편집위원
  • 승인 2012.09.1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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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시기별로 여러 가지(희노애락)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속에서 순간순간 또는 반복적으로 좋은 추억을 쌓기도 하고 상처도 받는다. 세월의 두께가 있는 나에게도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가슴속으로 처음 느꼈던 시기가 있다.
시골초등학교를 다녔던 내게, 학교를 오고가는 길은 볼거리와 놀을 거리가 많았다. 길 양옆에는 패랭이꽃, 달맞이꽃, 고마니, 물봉선 등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들꽃과 강아지풀, 오이풀 등 수 많은 풀잎이 있었다. 난 작은 풀꽃과 풀잎을 들여다보며 만지기도 하고 꺾기도 하였다. 그리고 밭이 있고 그 곳에 콩, 팥, 수수 등 농작물이 계절에 맞게 심어지고 수확이 이루어지곤 했다. 그 중에서도 생각이 나는 것은 목화밭이다. 목화 꽃은 병 꽃처럼 처음에는 흰색으로 피다가 붉은색으로 변하며 목화솜처럼 환상적이다. 목화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맺고 열매가 익으면 툭툭 터지고 그것이 바로 목화솜이 된다. 둥근 타원형인 목화열매를 영글기 전에 먹으면 달근 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늘 배가 고팠던 것 같다. 그 때 우리는 어른들이 오지 않나 망을 보며 목화밭에 뛰어 가서 열매를 몇 개씩 따서 먹곤 했다. 그 것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마와 김장무 밭에서 그것들을 뽑아서 껍질을 입과 손으로 벗겨 먹기도 했다. 그런 행동을 할 때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배는 채울 수 있었어도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은 이미 따라와 있었다.
하교 길에 여자아이들은 흙길에 앉아 주변에 있는 작은 돌을 주워 모아 공기놀이를 하곤 했다. 그 공기놀이란 것이 지금처럼 다섯 개 갖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많은 돌 공기를 두고 서로 따먹기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 다른 친구들보다 공기를 못해서 속상해하곤 했다. 우린 공기놀이가 끝나면 그 작은 공기 돌을 우리가 놀았던 주변에 다시 흩어 놓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4학년 무렵인 것 같다. 가을운동회를 위해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햇볕이 쏟아지는 학교운동장에서 무용과 체조 등을 지겹도록 연습을 했다. 추석 전날, 총연습을 끝내고 드디어 운동회날인 추석 이튿날 학교를 향하는 길이었다. 운동회 날의 복장인 짧은 검은색 팬츠에 반팔 흰 셔츠를 입고 청군백군 머리띠를 하고 학교를 가는데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좀은 한기를 느꼈다. 여름날 장마에 무너진 둑길이 복구되지 않아 길이 평탄하지 않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건너야 했다. 냇물을 건너고 일부 남은 둑길을 오르는데 안개 속에 한 무더기의 코스모스가 보였다. 안개속이라 주변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다가가 자세히 꽃을 들여다보았다. 빨간색과 흰색 그리고 가장 많은 중간색인 분홍색 꽃이 어우러져 이슬을 맞아 함초롬히 젖어 있었다. 평소에 함부로 코스모스 꽃을 따서 친구와 가위 바위 보를 하며 꽃을 튕기기도 하고, 아카시아나무를 꺾어 가시에 꽃을 하나씩 끼워 코스모스 나무를 만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코스모스가 주변에 흔했기에 예쁜 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그 날 난 학교 길을 멈추고 그 모습에 취해 있었다. 그 순간 내 삶에 최초로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라는 감정과 단어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날 보았던 안개 속에 피어있던 코스모스는 내 추억의 방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언제라도 꺼내 보면 아름답고 경이로운 모습이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해 어머니의 바쁜 가을걷이도 끝나고 김장까지 해 놓았던 시기인 것 같다. 날씨가 추워 서리가 내릴 거라고 한 바람이 아주 차갑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난 따뜻한 방에서 책을 들고 나와 집 주변을 다니며 풀잎들을 따서 책갈피에 넣었다. 난 서리가 내리고 온 세상에 나뭇잎과 풀잎들이 다 시들고 말라버리면 푸른 잎들이 보고 싶고, 그 때에 이런 풀잎들을 꺼내 보려고 했다. 내 마음에는 정말 바람이 쌩쌩 불고, 하얀 눈으로 온 세상이 몇 번씩이나 뒤 덮이다 보면 푸름을 볼 수 없다는 것, 세상에서 무엇인가 사라진다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미리 생각했던 것이 처음인 것 같다.
유년시절,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서, 성장통과 함께 삶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되는데, 내 삶에서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최초로 느꼈던 그 순간이 아름다운 추억의 방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들로 인해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그 때를 반추해보니 내 가슴이 말한다.
“삶은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삶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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