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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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 위에서
  • 회남초등학교 교감 김종례
  • 승인 2012.07.1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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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날이면 논두렁 밭두렁 걷기를 좋아하여 땅거미가 질 때까지 들녘을 돌아다닌다. 여름 풀잎과 들바람과 농부의 땀 흘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해질녘 풍경을 즐기며 영혼을 살찌우는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이다. 얼마 전만 해도 벼 포기들이 연둣빛 살을 비벼대며 초딩 아이들처럼 여리고 여린 모습이더니, 며칠 사이에 하늘을 향해 검푸른 진녹빛을 뿜어대며 청소년들의 기상으로 쑥쑥 자라고 있다. 머지않아 한여름의 불타는 태양 볕이 온 들판에 작열하면 서서히 황금물결을 만들 가을풍경이 눈앞에 선하다. 한 포기도 웃자라지 않으면서 한 포기도 뒤쳐지지 않으면서 옛날에 무성하던 깜부기조차 하나 보이지 않는 논마다 가득가득 동고동락 한다고 할까? 내 발자국에 놀라 천상으로 후루룩 날아오르는 백로 한 쌍이 전원의 풍경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산 아래 오솔길로 접어드니 산호랑꽃, 비비추, 누드베리카, 야생양귀비들이 마음을 잡으려고 살포시 아양을 떤다.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주고는 옆집 밭두렁으로 접어들었다. 주말에만 내려와서 반질반질 가꿔놓은 영주네 밭이랑은 콩 포기며 고추, 오이, 가지, 참깨, 들깨, 방울토마토들이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어 싱그럽고 키다리 옥수수들은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었다. 한솥밥 공동체처럼 끼리끼리 눈웃음치며 말없이 어우러져 가는 모습이 정겹다. 그러나 새벽이슬 맞으며 함초롬히 피어나는 여름꽃 보다도 논마다 튼실하게 자라나는 진록의 아우성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며 살아가는 여름이다.
텃밭에서 기른 가지가지 열매들을 치마폭에 우수수 따가지고 집집마다 맛을 보이는 옆집 아낙네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거뜬히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나면,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아랫집 마당에 놓인 평상위에는 서너 집 식구들이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요즘이다.. 온종일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평상위에 올라와 맛깔스러운 저녁후식으로 차려진다. 전형적인 농부인 우리 마을 터줏대감 부부, 도시에서 장사를 하다가 때려치우고 얼마 전에 귀농한 아랫집 젊은이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곳에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몇 달 전에 대도시에서 이사 온 중년부부, 그리고 평생 교육 공무원인 우리 부부다. 얼마동안은 서로 하는 일이 달라서인지 대화의 축을 형성하지 못하고 겉치레 인사만 오가더니, 요즘 들어서는 어쩌다 얼굴이 안 뵈는 날은 궁금하여 걱정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은 금방 캐온 햇감자가 얼음을 둥둥 띄운 매실음료와 함께 등장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푸짐한 채소 바구니와 함께 야채 쌈 파티가 열리기도 하며, 어느 날은 과일 쟁반과 함께 김 오르는 옥수수 바구니가 나오기도 한다. 농사를 안 지으니 특별히 내밀을 특산물이 없는 우리 차례가 되면 간혹 불고기 파티도 열리기도 하여 평상 위 여름 디너는 언제나 축제 분위기다. 덩달아 극성을 부리며 윙윙대는 모기떼들을 이리저리 수건으로 쫒아내면서 하루들을 엮어온 삶을 한바탕 입담들로 풀어 놓고서야 일과가 끝나는 요즘이다. 전원 속에서 우주의 비밀을 순리적으로 배워 가듯이, 퐁퐁퐁 쏟아지는 companion 비타민을 풍족히 나눠 먹으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이웃과의 소통이 자연에 못지않게 진솔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원래 companion의 원어는 빵을 나눠먹는 동무라는 뜻인데, 작은 공동체가 함께 나눠 먹어야 효력이 발생하는 비타민이다. 그리고 평상위에서 다 행복한 비타민을 섭취하려면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는 것도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첫째는 마음의 두레박이다. 성공적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의 하나가 자기 영혼의 두레박을 무한정 내려놓는 일이다. 세상을 담아두고 이웃을 담아 둘 수 있는 영혼의 두레박을 준비하는 일이다. 둘째는 이해의 사다리이다. 이웃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바라보는 이해의 사다리를 튼튼히 세울 수 있는 아량과 배려심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는 봉사정신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이기심과 이타심이 구분된 봉사적인 태도가 꼭 필요하다. 이웃과의 소통의 장인 여름 평상위에서 서로서로 인생 여정을 공유하면서 함께 빵을 나눠먹는 작은 배움터가 여름 저녁을 날마다 기다리게 하는 요즈음, 하늘의 별은 보이지 않아도 인생의 여정마다 쌓아두었던 은하수들을 마구 쏟아놓으며, 소박한 먹을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허물없는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고 있다. 작열하는 여름태양 아래서 논마다 가득히 몸을 비비며 동고동락하는 벼 포기들처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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