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이되면 전세계는 크리스마스 축일 행사를 위하여
들뜬 분위기입니다. 경제가 잘 돌아가든지 안돌아가든지
크리스마스 축일 준비는 변함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않는 사람들이든지 이날 만큼은 하나가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적인 연합을 가져오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날의 의미는 정말 세계적인 연합을
가져다 준 축하할 만한 행사입니까? 정말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일이며 그분을 진심으로 축하는 날입니까?
이러한 축하 행사가 그리스도교와는 크게 관련도 없는
동양에서 널이 퍼져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약 200년 전에,
한국의 한 유명한 학자가 중국의 베이징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성당의 천장에 있는 그림을 쳐다보다가,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놀라운 그림에 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부인이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병든 듯한
아이를 무릎에 안고 있는데, 안타까워 차마 아기를
볼 수 없는 듯 그 부인은 고개를 못 가누고,
멀리서는 수많은 귀신들과 아이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데,
올려 보고 있노라니 곧 떨어질 것 같아 놀라며 손을 내밀게 되었다.”
그때는, 유럽에서 중세의 암흑기가 지나고
종교 개혁이 시작된 지도 한참 후였습니다.
그렇지만 동양인들 대부분에게 그리스도교는
그 그림만큼이나 생소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상황이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아기 예수의 장면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동양은 그러한 장면에 매우 익숙해졌고,
이제 동양의 많은 거리들은 유럽을 방불케 합니다.
1998년 11월 25일 밤,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두고,
프랑스 파리의 그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는
300그루의 가로수에 달린 전구 10만여 개의
불빛으로 밝게 빛납니다. 그와 비슷하게,
한국 서울의 중심 거리에서도 한 유명 백화점이 선보인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그 수도의 밤을 환히 밝히기 시작합니다.
곧 이어 서울의 거리는 갖가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수놓아집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그리고 신문들도 연일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나라 전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술렁이며
연말의 들뜬 기분에 젖어 듭니다. 방문객들
대부분이 깜짝 놀랄 정도로 수가 많은 서울의 교회들도,
이제 서둘러 장식을 시작합니다. 미국이 11월 말에
추수 감사절 축하 행사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한국을 포함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이렇듯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드는 것입니다.
동양의 나라 대부분은 그리스도교국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은 국민의 26.3퍼센트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합니다. 홍콩은 7.9퍼센트,
타이완은 7.4퍼센트, 일본은 단지 1.2퍼센트가 그렇게 공언합니다.
분명히, 대다수의 동양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지 않지만,
그들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실은, 그 열기가 흔히 서방을 앞지르는 듯합니다.
홍콩의 경우, 인구의 대다수가 불교나 도교 신자인데도,
그곳의 크리스마스는 화려하기로 유명합니다.
인구의 0.1퍼센트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중국에서조차, 크리스마스는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동양에서 크리스마스를 그토록 널리 축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탄생일로 여기는 크리스마스 축하에 가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참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따라야 합니까?
동양의 유서 깊은 나라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대중화된 경위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크리스마스―왜 동양에서까지?
동양에는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를 연상시키는
오래 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왕신에 대한
한국의 민간 신앙인데,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왕신은 부엌을 맡은 신, 즉 고대 한국의
불 숭배와 관련이 있는 불의 신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옛날에 한국 사람들은 절대로 불씨를
꺼뜨리는 일이 없도록 숯불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사람들은, 이 신이 1년 동안 집안 식구들의 행실을 지켜 본 다음,
부엌의 아궁이와 굴뚝을 통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조왕신은 음력 12월 23일에 옥황 상제에게
지켜 본 내용을 고해 바쳤다고 합니다. 그 신은
각 사람의 행실에 일치한 상과 벌을 가지고,
그 해 마지막 날에 다시 굴뚝과 아궁이를 통해
돌아올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 신이 돌아오는 날,
가족들은 부엌을 비롯하여 집안 구석구석에 촛불을
켜 놓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엌 신을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산타클로스와
유사한 점이 또 있는데, 바로 옷이 붉은색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며느리가 버선을 만들어서 동짓날에
시어머니에게 드리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이 관습은 시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상징하였는데,
그 날 이후로는 낮이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과 크리스마스 사이에는
유사한 점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와 관습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굴뚝, 촛불, 선물 주는 일, 양말, 붉은색 옷을 입은 노인, 날짜 등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유사점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한국에서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가 한국에 처음 소개될 무렵에는
이미 조왕신에 대한 신앙이 거의 퇴색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그러한 신앙이 있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은, 동지 및 연말과 관련된
관습이 어떻게 여러가지 다른 경로로 전세계에
퍼졌는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기원 4세기에,
로마 제국의 지배적인 교회는 농신제, 즉
태양신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교 로마의 절기를
이름을 바꾸어 크리스마스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민간 관습을 이름만 달리하여
부활시켜 놓은 것인 셈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선물의 역할
유독 사라질 줄 모르는 한 가지 관습은
선물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기를 무척이나 즐겼습니다.
이 관습이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일이
대중화된 한 가지 원인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한국 국민과 유대를 강화하기를
원하고 있던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교회는
만남의 장소 그리고 선물과 구호 물자를 나누어
주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호기심에서
교회를 찾았고 거기서 처음 보는 초콜릿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그때부터 많은 아이들은
다음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러한 아이들의 눈에, 산타클로스는 빨간
고깔 모자를 쓴 미군 병사였습니다. 잠언 19:6에서는
“선물을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동무”라고 알려 줍니다.
그렇습니다. 선물의 효과는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그러한
선물이 지속적인 우정을 보증해 주지는 못합니다.
한국에서도, 어린 시절에 초콜릿을 맛본 것이
교회에 가 본 경험의 전부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더불어 상업주의가
세력을 확장하였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소비자들의
소비 행위를 부추길 수 있는 호재였습니다.
이제 상업계는 자기들의 이윤을 챙기는 데
크리스마스를 활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동양의 크리스마스의
내면을 보여 줍니다. 크리스마스 특수 시장을 겨냥하여
신상품을 개발하고, 한여름부터 광고 제작에 들어갑니다.
그 모든 크리스마스 선물과 카드와 음반 판매에 힘입어,
매출액은 연말에 최고치를 기록합니다.
사실 각종 광고들은, 평범한 청소년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에 머물거나 선물을 받지 못할 경우,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크리스마스 날이 다가오면, 서울에 있는 상점과
대형 매장에는 선물을 사려고 나선 인파가 몰리는데,
동양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도시는 교통 체증에 시달립니다. 호텔, 상가, 음식점,
유흥가들은 넘치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곳곳에서 떠들썩하게 흥청대는 소리―고성방가―가 들립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는
거리에서 술에 만취한 남녀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동양의 크리스마스는 더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축일이 아닙니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상업주의가
그 주도권을 잡고 이 그리스도교국의 축일을
한껏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가 이렇듯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벗어난 데 대한 책임을 상업주의에만 돌릴 것입니까?
참 그리스도인들은 관련된 문제의 심각성을
좀더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
야수를 동물원의 우리로 옮긴다고 해서 야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동물이 우리 안에서
한동안 살아 왔고 새끼들을 낳아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고 해서
온순해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 것입니다.
동물원 사육사들이 그런 동물의 공격을 받은
예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크리스마스에 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밖에 살고 있던 “야수”였습니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한국어판)은 크리스마스의
‘로마 농신제와의 관계’ 제하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교의 농신제와 브루말리아 축제(새로운 태양맞이 축제)는
민간의 관습에 너무나 깊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향으로 제거될 수 없었다. ··· ]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
(포이부스와 미트라스의 날일 뿐만 아니라 주의 날)을
법적 공휴일로 인정한 것은 4세기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생일을 물리적 태양의 생일과 동일시하는 데 어떤 타당성을 느끼도록 해 주었을 수도 있다.
소란과 흥겨움이 뒤따르는 이교의 축제는 너무나
민간에게 널리 행해졌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정신이나 방법에 있어서 거의 변화시키지 않고
그 축제를 계속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한 일이 아무런 반대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동 백과 사전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서방과 근동 지방의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일이
볼썽 사납고 천박하게 기념되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의 기독교인들은 서방의 기독교인들을
이교의 축제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상 숭배와 태양 숭배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참으로, 처음부터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축일은 급속하게 수용되었고
결국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서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혁명조차도 그 절기를 어쩌지 못했다”고, 동 백과 사전은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참 그리스도교 밖에 있던 태양신 축제를
당시의 지배적인 교회 안으로 들여온 것입니다.
축제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이교적인 속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축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교 교회들 안에 이교적
분위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의 영성을 오염시키는 데
한몫을 하였습니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그리스도교국이 발전함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래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도덕적 타락과 폭력적인 전쟁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크리스마스는 가짜 이름을 달긴 했지만,
떠들썩한 연회, 과음, 환락, 춤, 선물을 주는 일,
집을 상록수로 치장하는 일 등으로 원래의 이교적 속성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상업주의는 판매 신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크리스마스를 이용해 왔습니다. 대중 매체는
그 아이디어를 칭찬하고, 일반인들은 그저 재미있어 합니다.
서울의 중심가에서는 한 속옷 전문점이 속옷만 가지고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을 꾸며 쇼 윈도를 장식하였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볼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모시는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세속 축일인가, 종교적 성일인가?
중국에서는 그를 크리스마스 노인이라고 부릅니다.
영국에서는 산타 할아버지(Father Christmas)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서리의 할아버지’(Grandfather Frost)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미국에서는 산타클로스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룩한 큰 배와 눈같이 흰 수염이 있는
이 유쾌한 노인이 바로 크리스마스를 의인화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가 하나의 신화라는, 즉 4세기 미라
(지금의 터키에 있음)의 한 주교와 관련이 있는 전통에
근거한 전설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관습과 전통은 언제나 축하 행사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크리스마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산타 신화는 인기 있는 축일과 관련 있는 민간 전승의
한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 관습들이 성서에
기록된 사건들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관습들은 대부분 이교에 기원을 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크리스마스 트리입니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교도들이었던 유럽인들 사이에서 성행하였던 나무 숭배는
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도 존속하였는데,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신년에 집과 헛간을 상록수로
장식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새들을 위해 나무를 세우는
스칸디나비아의 관습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
감탕나무나 그 밖의 상록수로 관(冠)을 만드는 것도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 역시 이교 숭배에 깊이 뿌리를 둔 전통입니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를 위해
한겨울에 여는 7일간의 축제인 농신제 기간에
감탕나무 가지로 신전들을 장식하였습니다.
이 이교 축제는 무절제한 환락과 방탕으로 특히 유명하였습니다.
겨우살이 가지(삽화 참조) 밑에서 입맞춤을 하는
크리스마스 관습이 일부 사람들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관습의 기원은 중세로 거슬러올라갑니다.
고대 영국의 드루이드 교도들은 겨우살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겨우살이는
악귀와 마법과 그 밖의 재액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호신부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우살이 밑에서 입맞춤을 하면 결혼을 하게 된다는
미신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전후로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거나
이교의 가르침에서 직접 유래한 현대의 크리스마스
전통들 가운데 몇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영예를
돌린다고 공언하는 축일이 어떻게 비그리스도교
관습들에 그토록 깊숙이 연루되게 되었습니까?
더 중요한 것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현대 크리스마스의 기원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시즌은
연중 매우 즐거운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푸짐한
식사를 하고 오랜 세월 존중되어 온 전통들을 지키고
가족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때입니다.
크리스마스 축일은 또한 벗들과 친족들이
카드와 선물들을 즐겁게 교환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크리스마스는
그와는 매우 다른 축일이었습니다. 역사학 교수인
스티븐 니센바움은 자신의 저서 「크리스마스를 위한 투쟁」
(The Battle for Christmas)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크리스마스는 ··· 술에 흠뻑 취하는 시기로서, 무절제한
‘사육제’, 즉 12월의 참회 화요일과 같은 일종의 축제를 위해
사람들의 공적인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들을 잠시 무시하는 때였다.”
경건한 외경심을 가지고 크리스마스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묘사는 혼란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을 기념한다고 주장하는
축일을 모독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을 들으면, 당신은 놀랄지 모릅니다.
잘못된 기초
크리스마스는 4세기에 시작될 때부터 논쟁에 휩싸여 왔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일에 관해 의문이 있었습니다.
성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날이나 달을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날짜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3세기에 일단의
이집트 신학자들은 그 날을 5월 20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보다 더 이른 날짜들, 이를테면
3월 28일이나 4월 2일 혹은 4월 19일을 선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8세기 무렵에는, 예수의 탄생이 일 년 열두 달 모두와
각각 관련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12월 25일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습니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12월 25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의 탄생일로 정하였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날짜를 ‘무적 태양의 탄신일’을 알리는 표가 되는
이교 로마 축제일과 일치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세기 반이 넘게 이교도들에게 악랄한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왜 갑자기 박해자들에게 굴복하였습니까?
부패가 들어오기 시작하다
1세기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회중으로 몰래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그릇 인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디모데 둘째 3:13)
이러한 대배교는 사도들이 사망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20:29, 30)
4세기에 소위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있은 후에,
엄청난 수의 이교도들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형태의 그리스도교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초기 그리스도교와 이교」
(Early Christianity and Paganism)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진정으로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비교적
소수의 그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거대한 다수 속에 파묻혀 버렸다.”
바울의 말이 참으로 옳았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마치 이교의 부패가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삼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염된 상태가 축일들을 축하하는 일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었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유일한 기념 행사는 주의 만찬입니다. (고린도 첫째 11:23-26)
로마 축제와 관련이 있는 우상 숭배 관습들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3세기의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공공 행사장에 나오지 않으며,
공개 전시회에도 관심이 없고, 공개 연회를 거부하고,
신성한 경기들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이오.”
한편, 이교도들은 이렇게 우쭐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연회와 노래와 경기로 유쾌하게 신들을 숭배하오.”
4세기 중엽에는, 그러한 불평이 수그러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점점 더 많은 사이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우리 안으로 슬며시 들어오면서,
배교적인 사상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로 인해
로마 세계와 타협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현대 그리스도교 내의 이교 사상」
(The Paganism in Our Christianity)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이교 축제들을
전통에 따라 받아들이고 그 축제들에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명확한 방침이었다.”
그렇습니다. 대배교가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교 축하 행사들을
기꺼이 용인함으로 인해, 이제 그러한 행사들이
그리스도교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만큼이나
많은 연례 축제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 가는 축제가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국제적인 세속 축일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있는 교파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도 퍼져 나갔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의 탄생일에 영예를 돌리는 기쁨을 주는
축제를 계속 존속시키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라, 기원 567년에 투르 공의회에서는
“크리스마스부터 공현축일까지의 12일간을
신성한 축제 기간으로 공포”하였습니다.―
「학교 및 가정용 가톨릭 백과 사전」
(The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and Home).
머지않아 크리스마스는 북유럽의 세속 수확제의
특징들을 많이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일에 흥청망청 빠져 듦에 따라,
경건함보다는 흥겹게 즐기는 것이 더 보편적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방종에 대해 항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행실을 승인하였습니다.
(비교 로마 13:13; 베드로 첫째 4:3)
기원 60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에 있는 선교인 멜러터스에게 편지하면서,
“그러한 고대의 이교 축제들을 중단시키지 말고,
단지 그러한 축제들을 지키는 이유를 이교적인 것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바꾸어 그러한 축제들을 교회의
의식에 맞추어 조절”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한때 이집트 정부의 고대 유물 감찰관이었던
아서 웨이겔은 그와 같이 알려 줍니다.
중세에 개혁 정신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러한 지나친
일들에 대해 항의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과도하게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악습”을
금하는 많은 포고령을 발하였습니다. 페니 레스태드 박사는
자신의 저서 「미국의 크리스마스 역사」
(Christmas in America―A Histor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 교직자들은, 타락한 인류에게는 방종과 탐닉의
시기가 필요한데, 단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감독 아래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는데,
이교 관습들이 이미 크리스마스에 너무 깊숙이
스며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관습들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술가 트리스트럼 코핀은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자신들이 항상 해 오던 일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었으며] 도덕주의자들의
논쟁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유럽 사람들이 신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할 무렵,
크리스마스는 잘 알려진 축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식민지에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청교도 개혁가들은
이 축하 행사를 이교적인 것으로 여겼고,
1659년에서 1681년 사이에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이 축하 행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금지령이 해제된 후, 크리스마스 축하는
식민지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특히 뉴잉글랜드
지방의 남부 지역에서 그러하였습니다. 하지만
축일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에게 영예를 돌리는 일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특히 피해를
주었던 한 가지 크리스마스 관습은 술을
진탕 마시는 관습이었습니다. 줄지어 선
젊은이들의 대열이 부유한 이웃 사람들의
집으로 들어가 ‘장난을 칠까요, 대접을 할래요’
하는 식으로 음식과 술을 거저 달라고 요구하곤 하였습니다.
집주인이 거절하면 대개 욕설을 퍼부었으며,
때로는 집 건물에 손상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1820년대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크리스마스
무질서”가 “사회의 심각한 위협”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니센바움 교수는 말합니다.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와 같은 도시에서는
부유한 지주들이 경비원을 고용하여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뉴욕 시는
1827/28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있었던 폭동 때문에
최초로 전문 경찰대를 조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새롭게 바뀌다
19세기에는 인류에게 전례없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도로망과 철도망의 출현으로 사람과 상품과 뉴스가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산업 혁명은
수많은 일자리들을 만들어 냈고, 공장에서는 상품을
신속하게 생산하여 안정되게 공급하였습니다.
산업화는 또한 새롭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을 낳았으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방식에도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축일들을 이용해 왔으며, 크리스마스 역시 그러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장려하는 사람들은, 오래 된 몇몇
크리스마스 전통들을 선택적으로 수정함으로써,
크리스마스가 난폭하고 사육제와 같은 축제에서
가족 중심의 축일이 되도록 변경시켜 실효를 거두었습니다.
사실, 19세기 말엽, 크리스마스는 현대 미국 생활이
낳은 부작용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레스태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축일 가운데서 크리스마스는, 종교와
종교적 감정을 가정으로 돌려놓는 그리고
일반 세상의 탐닉과 실패를 바로잡는 완벽한 도구였다.”
레스태드 박사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선물주기, 자선 행위, 심지어 다정하게 축일 인사를 주고받는 일,
그리고 거실이나, 나중에는 주일 학교 강당에
상록수를 세워 두고 장식하고 즐기는 일 등은
각 핵가족의 성원들을 서로에게로 그리고 교회와 사회로 연결시켜 주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짐하고 가족의 연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합니다.
물론,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영적인 부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에 영예를 돌리려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특별
예배에 참석하거나, 예수의 탄생을 묘사하는
그림을 집에 걸어 두거나, 감사의 기도를 예수에게
직접 드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러한 일들은
그분의 승인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서에서 알려 주는 내용을 고려해 보십시오.
크리스마스는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크리스마스는
(1) 가족과 함께 보내는 때이다
(2) 파티를 여는 때이다
(3) 종교적인 때이다
(4)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때이다
(5) 향수에 젖는 때이다
(6) 노골적인 상업주의에 물드는 때이다.
뜻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국에서 1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단지 6퍼센트만이 크리스마스를 주로 종교적인 시기로 간주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48퍼센트는 크리스마스가
주로 가족과 함께 보내는 때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많은 사람은 크리스마스가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때라고 단언한다. 전형적인 예로 11세
된 한 소녀는 크리스마스와 관련하여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들뜬 기분, 행복감 [그리고] 선물주기”라고 대답하였다.
「현대 크리스마스의 형성」
(The Making of the Modern Christmas)에서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에서 ··· 가장 강조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고향, 가족 그리고
특히 어린이들”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특히 서방의 그리스도교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친척들이 함께 모여 선물을 주고받는 가족 행사이다.
동방 정교회가 지배적인 나라들에서, 사람들은
부활절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도 대개 크리스마스철은 휴가 기간이다.
크리스마스―참으로 그리스도교의 축일인가?
「월드 북 백과 사전」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날이다.”
그렇지만 이 백과 사전은 또한 이렇게 기술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의 출생을 축하하는 것이
이교 관습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았다.”
골비와 퍼두의 공저 「현대 크리스마스의 형성」
에서도 이렇게 동의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았다. 생일 그 자체가
이교 관습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탄생한 정확한 일자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생일 축하가 그리스도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그토록 탁월한
“그리스도교”의 축일이 되었는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공경하라!
오늘날 예수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다. 그분은 능하신
유력자로서 하느님의 하늘 왕국의 왕이시므로,
그러한 신분으로 공경을 받으셔야 한다.―
디모데 첫째 6:15, 16.
이제 어른이 된 당신 앞에서 사람들이
아기 때 사진들을 내보였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는가?
그러한 사진이 부모에게 자녀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을 상기시켜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일개인으로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다른 사람들이 현재의 자신을 그대로 봐 주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와 비슷하게, 예수의 추종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이교 전통과 유아를 공경하는 일에 푹 빠진 나머지
예수를 왕으로 공경하지 않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생각해 보라.
심지어 1세기에도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현재와 같은 분―하늘에 계신 왕―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았을지라도,
확실히 지금은 더 이상 그분을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고린도 둘째 5:16.
머지않아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서,
고통, 고난, 질병 및 죽음을 제거할 것이라는
예언적 약속을 실현시키실 것이다. 그분이 바로
낙원 상태가 된 이 곳 지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주택과 보람 있는 일을 보장해 주실 분이다.
(이사야 65:21-23; 누가 23:43; 고린도 둘째 1:20; 계시 21:3, 4)
분명히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께 불명예를
돌리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자신의 모범을 따라서,
사람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
하느님의 목적에 대한 이해―를 이웃에게
전해 주려고 애써 노력하며, 그 선물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다. (요한 17:3)
예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러한 선물을 주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준다.―
사도 20:35; 누가 11:27, 28.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사랑을 연중 언제라도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빌립보 2: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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