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현명한 소수의 홈페이지 http://www.wisemid.org 의 오늘의 주제토론 편에 있는 것임.
통일교육과 정치사회화의 문제
< 어느 통일교육안에 대한 비판과 대응 >
안 기 성(고대 명예교수)
I
필자는 최근 어느 교육계 저명 인사로부터 어느 교원단체가 발행한 “화해 평화 통일교육 길잡이”란 부제가 붙은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란 책의 일독을 권유받았다. 매우 고맙고 반가운 일이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 하에 새로운 통일교육의 방안이 우리 사회에 나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기존의 통일교육안에 식상에 있던 필자로서는 어떤 기대감마저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을 처음 대할 때부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표제부터가 어느 북녘하늘에서 날아 온 불온 전단이나 문서와 너무나 흡사했던 까닭이다. 여기서는 우리 통일의 역군인 국군의 모습대신에 그 책의 표제는 물론 그 내부 곳곳에 북의 병사의 모습을 컷으로 메우고 있고, 그 내용 또한 그 적지 않은 부분이 북의 대남 방송에서 듣던 그런 비슷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통일에 관견은 말할 나위도 없고 6.25동란이나 우리의 우방에 대한 관견 또한 북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여하간 이는 그 동안 우리가 합의해 둔 통일의 논리나 방안이 아니다. 이는 이 책이 어쩌면 지극히 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를 매우 편애하는 사람에 의해 편집된 책자처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을 한 참 읽다보면 북의 어떤 정파가 남한을 접수하고 남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교화하려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누구도 이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이 땅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는 진정 불온문서인가, 아니면 합법적인 문서인가?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불온한 자나 전단을 신고하라는 입간판이 서있다. 그리고 이를 안내 방송하는 곳도 있다. 그 신고를 접수하는 당국은 이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더구나 이 책이 성인이 아니고 나이 어린 2세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제작된 교육용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게 하는 일이다. 물론 통일교육을 맡을 교원을 훈련하기 위해 제작했다지만 어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가령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든 판단력이 있는 철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면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나라에서 있을 수 있는 일상의 평범한 일로 치부하고 그냥 넘길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 북과는 서로 총대를 겨누는 적대관계에 있고, 상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안녕과 질서, 그리고 나아가 나라의 생존을 지켜가야만 하는 현금의 상황아래서, 우리 어린 사람들을 일직부터 그들의 의도대로 키워 갈 생각으로 이 책을 만든 것이라면 이는 그 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 어린이들이 백기를 들고 그들에게 넘어가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무혈혁명 그것이다. 더구나 우리 국민전체를 의무적으로 동원해 교육하는 공교육의 현장에서 있어서는 아니 될 그런 일들이 선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강제된다면 그 더욱 참아서는 아니 될 일일 것이다.
우리 후세의 어린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주는 일은 어른들의 몫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 그리고 그의 생존은 우리 국민이 다같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누가 우리 주변에서 감상적인 발상으로 ‘겨레’나 ‘통일’을 빙자해 우리 어린 사람들을 불행한 환경에 넘겨주려는 음모나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다같이 힘을 모아 막아야 할 것이다. 모두가 다 아는 바이지만 북은 이미 파산한 무능한 정치체제이다. 그 정치체제의 휘하에 사는 사람들은 현금 억압과 빈곤으로 기아선상에 헤매는 불행한 환경에 살고 있다. 누가 우리 젊은 사람들을 그러한 환경으로 몰고 가려하는가? 누구이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신이 귀속할 환경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사람의 사주나 교화에 의해 어떤 불행한 선택이 강요되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의 젊은이들에게 불행한 환경을 선택할 것을 강요함에 있어서이랴! 이미 체제비교는 끝났다. 종래 북을 지지하던 체제는 오직 북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미 이 지구상에서 살아져 갔다. 이는 그 체제가 추구하던 이상은 이미 허구임이 확인되었고, 실제로 우리 인류에게 불행한 환경을 제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체제는 더 이상 우리의 통일의 목표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러한 허구의 체제를 비호하는 무모한 통일교육안이 지극히 편견을 가지 사람들에 의해 돌연히 작성돼, 어느 국민적인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시행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만은 우리가 철저히 막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 사람들의 행복을 지키고 우리 사회공동체를 살려가기 위해서도 이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부당한 통일교육안이 우리의 공교육의 현장에서 실시될 것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공교육은 말할 나위도 없이 개인의 성장과 발달, 그리고 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교육은 우리 사회가 공인하는 가치, 규범, 태도 등의 형식을 유지하고, 목표달성과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사회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통일과 영속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에 애정을 가진 국민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통일과 영속을 이룩해 가는 일이 그의 임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그 통일교육안이 우리 공교육 현장에서 실시되는 것은 그러한 공교육의 존재의미를 무색하게 하는 일인 동시에 그에 역행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그의 영속적인 유지와 발전을 방해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통일교육안에 대하여 깊은 우려의 눈으로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이를 철두철미 막아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란 책자가 가지는 문제의 핵심의 내용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제부터 그 핵심의 주요 문제 내용을 지적해 두기로 하자.II
이 책자의 통일교육방안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하나 둘이 아니다. 어쩌면 내용 전체가 다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미일관 이 책자의 전면을 꾀 뚫고 지배하고 있는 편향된 논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모든 것을 다 거론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핵심적인 문제는, 그들의 불온한 그 편집형식과 통일에 관한 우리의 대응논리에 대한 비판에 있고, 그리고 나아가 그들의 6.25사변관과 대우방관(對友邦觀) 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이 몇 가지 문제만을 중심으로 살펴가기로 하겠다.
그럼 우선 이 책자의 편집형식과 그 대응논리에 대한 비판에 관해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이 책자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없어야 한다면서 마치 풍선을 타고 온 불온 전단처럼 북의 병사의 웃는 얼굴을 삽화로 요소 요소에 싣고 있다. 왜 우리 통일교본에 북의 군대가 나와야 하는가? 그것도 웃는 얼굴로 말이다. 그들의 의도가 통일교육방안으로 채용되었다는 데서 오는 환희의 웃음이라도 되는 것인가? 아무리 보아도 과거 그 비극의 분단의 상태를 뉘우치는 회안의 미소는 아니다. 왜 그 삽화에는 우리 병사는 실리지 않았는가? 우리 병사는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편집자에 대하여 우려 섞인 회의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 책자는 이어 최근의 북의 지원이 아무런 대가 없는 ‘퍼주기 식’이었다는 사회적 비판에 대하여 이는 미사일 값 2대 수준밖에 안 된다는 주장으로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달리 이해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미사일 2대 값의 군사지원을 했다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참으로 억지논리다. 오히려 우리 안보를 위해 우리가 그 지원금으로 신예 미사일 2대를 샀어야 했다고 하였더라면 설득력이 있을 번하였다. 원래 평화란 군사력이 균형을 이룰 때에만 한하여 유지되는 법이다. 이는 고금의 역사가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 군사력이 국내 주둔하는 해외 지원군의 몫을 빼면 북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늘 전쟁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자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북의 군사력 강화노력과 그 위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도대체 이 책의 제작자는 누굴 위한 통일교육논자인가?
게다가 이 책자는 우리 군의 무기구입상의 문제와 무기체계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거론하였거니와 북 병사의 화상을 여기저기 빈번하게 게재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인가? 북의 군대의 우월성을 말하고 싶어서인가 그 체제를 찬양하고 싶어서 인가? 이것이 진정 통일을 갈망하는 책자라면 그 논리의 균형을 위해서도 보무도 당당한 국군의 모습도 함께 실어주었어야 하였다. 이를 보면 진정한 의미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이 책자의 저작자로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책자가 어느 일방의 선무 공작용의 것이 아니고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용의 것이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균형감각만이라도 보여주어야 하였다.
물론, 대북 지원에 관한 논조에도 같은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른바 ‘퍼주기 식 지원’이란 사회적 비평에 대한 변명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이 책자의 논자들은 이를 ‘무형의 이익’룰까지 내 새워 이를 비호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그 중에서도 남북의 화해가 곧 군비의 절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는 비현실적이고 근시안적이다. 스위스나 노르웨이와 같이 심지어 중립국을 표방하는 나라들조차도 적지 않은 군비를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면, 장차 남북 간에 어떤 화해가 혹 성립된다하더라도 여전히 군비는 요구될 것임은 자명하다. 하물며 아직 어떤 분명한 화해의 징후도 보이지 않고 단지 불안한 교류만이 진행되는 지금에 있어서이랴. 그리고 통일이 실제 이룩된 경우에도 군비는 여전히 소요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때가 되면 오히려 통일로 배가된 국경선과 해안선을 지키기 위해 남북을 합친 것 이상의 보다 많은 병력과 군비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북 지원과 군비와는 어떤 함수관계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북 지원이 곧 군비절약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자 동시에 논리의 비약이다.
그리고 국제적 이미지를 개선하느니 혹은 남과 북을 끈끈히 묶어 주느니 하는 논리도 이 이익론에 추가해 그 구차한 변명을 겨들고 있지만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와 같이 어쩌면 유치하기 조차한 소박한 무형의 이익론으로는 우리 국민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 이 책자의 편집자는 경제적 상호주의가 남북 화해의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한다. 상대가 사회주의 사회임으로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상호주의를 바라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이산가족 상봉이 북이 남에 준 그 퍼주기의 대가란 논리다. 인도주의로 해결하여야 할 이산가족의 상봉이 사회주의의 상호주의로 받은, 그 퍼주기로 받은 상품내역이었다는 말인가? 스스로 어느 네다바이 사기꾼의 봉이 되자고 자처라도 한 것 같이 보인다. 역시 어불성설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리들은 통일교육의 내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차라리 통일교육에서는 우리의 새로운 세대는 철저히 서로 이익을 나누는 상호주의에 근거해 화해를 일구어 가야한다고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통일비용에 대한 논리에도 논리적인 비약이 많다. 우선 이 책자는 통일비용 때문에 이 땅에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전제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오래 전부터 통일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점진적인 단계적 통일방안을 추진해 온 바가 있다. 우리 통일 전문가들은 지금의 남북관계도 그를 누가 주도하던 간에 상정된 통일 시나리오의 한 단계에 와 있다고 믿고 있다. 누구도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통일을 반대한 것은 지금의 평화적 공존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통일을 화해와 공존으로 바꾸어 당장의 통일을 반대함으로써 그 통일자체를 우리 의식으로부터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우리의 통일을 그 소요되는 비용 때문에 반대했다는 말인가? 어느 때고 통일의 기회가 오면 그 통일에 드는 비용은 많던 작든 숙명적으로 우리 국민이 감당하여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대북 지원이 그 통일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것은 대북 지원이 모두 소모적인 소비분야에 사용되지 않는 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그 지원비가 투자가치로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 통일교육의 내용으로 사용하는 때에는 선량한 어린 사람들이 또 다른 사기 행각에 말려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란 인간의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인간이 소망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우리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식민지든, 분단이든, 전쟁이든 이를 원치 아니했는데도 그를 경험해야 하였다. 우리는 우리 통일에 대한 많은 갈망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가 우리의 의도대로 이룩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최근 통일을 미루어두고 화해부터 하자는 식으로 남북문제를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것도 그 의도대로 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것은 우리의 통일의 역사의 한 과정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어떤 형식의 통일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도 그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지극히 편견으로 짜여진 이 책자의 형해화(形骸化)된 통일교육안에 우리는 더욱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여기서 그 통일의 형식 이른바 시나리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남북 양자의 합의에 의해 통일이 이룩되는 한 형식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통일대안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유일한 통일의 선택대안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으로 상대를 압도하여 흡수하는 형식의 통일이 있을 수도 있고, 어느 한 쪽이 실책으로 파탄하여 자연히 다른 한쪽에 흡수되는 수도 있다. 월남의 통일이 전쟁으로 이룩된 통일의 한 예라면, 독일의 통일은 파탄이 가져다 준 통일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의로 통일을 이룩했다는 통일의 예는 아직 찾아보지 못하였다. 이 합의 형식의 경우, 화해주의자들의 의도와 일치하는 통일방안이기는 하고 일부 이를 추진하는 정치세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권력의 생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통일형식에는 그다지 기대를 걸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부자간에도 다투는 것이 그 정치권력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설사 다행스럽게 어떤 합의로 잠정적으로 어떤 화해가 일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정치권력을 한 쪽에 넘기는 통일을 문제삼을 때는 다시 격한 대립의 양상을 띄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통일의 형식이 어떤 비용을 줄이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한 허상을 쫓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전쟁을 통해서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혐오한다면 적어도 군사적인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군비만을 확충한다면 이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일방의 모험주의자들이 전쟁의 모험을 선택해 통일을 이룩하려 한다면 이에 대해서도 충분한 대비 또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현안의 통일교육안은 이런 경우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마치 이런 경우가 없을 것처럼 무조건 우리 남측의 무장해제를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단유지비용을 예를 들어 북에 대한 지원이 훨씬 덜 드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전쟁에서 자패(自敗)해 상대에 흡수당하는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논리는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분단비용을 줄이자는 말은 곧 군비를 축소하자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아직도 북과 어떤 화해에 대한 합의가 현실적으로 나타난 바 없는 마당에도 말이다.
우리는 한동안 북의 국가적인 파탄 상황을 보고 우리의 통일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다. 아사직전의 북의 백성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북의 국경을 넘나드는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하기도 하였다. 그 북의 파탄이 독일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통일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누가 이를 잘못이라 할 것인가? 독일의 경우는 참으로 그랬다. 동독의 시민이 행복을 찾아 서독을 향해 경계를 넘었다. 그 수가 막을 수 없을 만큼 많아지자 지키는 파수병도 총을 버리고 서독으로 향했다. 동독의 정치체제를 지킬 사람들마저 서독으로 가버린 것이다. 동독의 파탄이 독일의 통일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것이 독일 통일의 진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역사는 늘 잔인하였다. 북의 아사직전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그 절호의 시기에 난데없는 박애주의자(?)들이 나라 안팎으로 나타나 연착륙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해괴한 논리로 북을 지원해 그 파탄직전의 북을 회생시켜 준 것이다. 우리에게 통일이 멀어진 것은 그런 우리 시대적인 환경 때문이었다. 통일비용이 문제된 것은 이 때부터였다. 그렇게 해서 통일이 지연하게 된 사실을 자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논리가 바로 통일비용론이었던 것이다. 통일로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지금의 부유한 분단상태가 그래도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찾아 온 통일을 비용 때문에 이를 마다 할 사람은 우리 주변에 그다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남북의 화해가 곧 그 비용의 절감이라는 논리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의 국가경영의 우위가 북을 두렵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남의 유복한 상황은 바로 그 국가경영의 우위를 말하는 까닭이다. 북은 지금도 남의 유복한 상황이 북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에 겁을 먹고 있다. 그것은 북의 사람들이 남을 선망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북의 와해를 가져와 남에 대한 북의 흡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때문이다. 지금에도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남북의 교류를 북이 극히 주저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에 일언반구도 없는 통일교육안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이는 진정 누구를 위한 통일교육안이란 말인가? 더구나 남의 체제가 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하지 않는 통일교육은 무의미하지 않는가? 이런 일을 어린 세대에게 말해주지 말자는 것은 우리의 통일이 어떤 체제로 되어도 괜찮다는 말로 들린다. 이는 위대한 사기 극이다. 선량한 어진 어린 사람을 사지로 모는 그런 사기 극 말이다. 만일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에 대하여 항거하는 시민운동을 미덕으로 여겨온 사람들이 장차 있게될 우리의 통일국가가 독단의 전제체제로 짜여져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의 억설이라 할 것이다. 구차한 통일비용에 관련된 논리가 설득력이 없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남에 있어서도 그 체제에 있어 약점이 적지 않다. 남은 현금 사회통합을 이루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사람들은 사분 오열의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동서의 지역분쟁이 끊이지 않는 데다가 이데올로기와 계층 간의 분란마저 겪고 있다. 그러므로 남에 있어 화급의 급선무는 사회통합의 과제이다. 이 사회통합의 과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는 어쩌면 월남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의 파탄이나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북이 남을 그들 의도대로 그들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믿고 호시탐탐 기회 있을 때마다 남한사회의 분열을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남쪽 사회의 속사정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북의 입장을 고려한 새로운 통일교육안이 우리 안에서 우리 공교육영역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성안된 것은 또 하나의 국론분열의 사유를 만들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붕괴를 돕는 일이다. 공교육이 사회 통합의 장이라는 사실에서 이를 이해하면 이는 참으로 의도된 이적행위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사회의 붕괴가 상대방 체제에 귀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가리켜 ‘한겨레’임을 빌미로 통일의 성취로 해석하려 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이는 우리의 다수 국민이 바라는 통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 다수 국민의 노예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이어 이 통일교육안의 6.25사변에 관한 견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매년 6월 ‘현충일’이 오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묘지를 참배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더구나 6.25사변으로 죽어간 그 수많은 영령들이 그 속에 있다. 그들은 민족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고 또 목숨마저 바쳤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은 그 후손들의 과제이다. 그러나 지금 막 성안된 통일교육안에는 이 사변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나이 어린 세대에 이를 무어라 설명하라고 종용하고 있는가? 그 교육안을 성안한 사람들은 그들 순국선열들에 대하여 어떤 죄의식조차 느끼는 일이 없이도 그런 기술이 가능하였다는 말인가? 그 통일교육안은 매우 편향된 사관의 연구물을 인용해 6.25사변을 단순히 ‘내란’의 연속이 아니면 외세가 개입한 ‘확대된 전면전쟁’으로 치부하려 하고 있다. 단순한 내란으로 끝났을 일이 외세의 개입으로 사태가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말이다. 해괴한 말장난의 논리다.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아 온 살아 있는 증인은 수 없이 많다. 그 시대를 실제 살아 온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의 논리는 왜 그런가? 이는 사실을 왜곡한 과도한 조작일 뿐이다. 이러한 조작은 북의 남침사실을 비호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 내란의 실패를 아쉬워함 때문인가? 내란에도 그 내란의 책임자는 의당 응징하게 마련이다. 그 내란의 책임자만이라도 밝히자고 해야 당연하지 않은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속절없이 죽어간 그 수많은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이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이다. 단지 외세의 개입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만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식민지 하에 왜를 회유해 경제와 교육의 기반을 닦고 독립운동의 군자금을 대던 사람들까지 친일파의 굴레를 씌워가며 부단히 역사의 심판이나 그의 청산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어째서 그 내란의 책임에 한해서만은 그처럼 관대하다는 말인가? 이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 책임을 거론하면 냉전시대의 논리이고 그 책임을 묵인하면 통일의 논리란 말인가? 왜 그들 논리에는 일관성이 없는가? 그런 청산의 과정이 없이도 화해나 통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런 논리로 어떻게 우리 젊은이들을 설득하라는 말인가? 남한 사회에 대하여서는 역사의 심판이란 구실로 갈기갈기 찢어 해 발려 놓고 북의 내란 책임에 대해서만은 관대해야 한다고 한다면 누구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진정 그들 입맛에 맞게 역사를 임의로 조작하고 우리 국론분열을 조장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통일교육안의 역사관은 모순된 억지 조작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그 조작된 논리에는 북의 역사논리가 수미일관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그 통일교육안에는 우리 역사를 조작하고 우리 국론의 분열을 조장하려 한 흔적은 수없이 많다. 북에 파견한 우리 요원들을 ‘북쪽으로 보낸 간첩’이라 했는가 하면, 우리 해역의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이 아니라고까지 하였고, 해방 후 발의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해명 또한 구구하게 뒤엎어 쏘련 측 입장을 두호하고 있다. 이 책자를 만들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남이 북에 첩자를 보내니 첩자를 남파하는 북에 대해서도 관대하라는 논조다. 남북의 화해약속이 아직 분명하게 이루지지도 않았는데도 먼저 무장해제를 하라는 논리와 똑 같다. 참으로 북의 첩자를 그대로 두고 보자는 말인가? 게다가 북방한계선은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이 아니라고 해 북의 편을 들고 있다. 이는 마치 독도가 합법적인 우리 땅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이 책자는 우리가 백기를 들고 무조건 북에 굴복해 가자는 논리다. 이 책자에 있어 남북의 화해는 곧 북에 대한 굴복을 말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더구나 이를 통일교육의 자료로 삼는단다. 아마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수용할 사람은 우리 주변에 있지 않을 것이다.
특히 ‘신탁통치’와 관계된 그들의 논리는 지나친 사실의 왜곡이다. 이 책자는 마치 신탁통치를 거부하고 나라를 세운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현금에도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제로 쏘련 연방에 편입돼 지금도 그들의 노예상태를 면하지 못한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갈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그런 논리가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연해주의 고려인이 스탈린의 포악한 폭정 속에 우즈베크로 강제 이전된 비극적인 사실을 모르기나 하듯 ‘신탁통치’에 미련을 두고 있다. 만일 북이 쏘련 연방의 신탁치하에 있었더라면 북은 그 연방에 강제 편입돼 그 고려인들처럼 노예적인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쏘련 국적의 사람으로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그 ‘신탁통치’의 내용이나 내력이 무엇이었던 간에 우리 민족이 그를 거부해 외세의 ‘신탁통치’를 받지 않게 된 일은 참으로 다행한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북은 그 때 이 ‘신탁통치’를 지지하여 찬탁에 나선 과오를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이유로 그들의 역사 서에는 이를 변명하는 구차한 해석을 달아 이를 정당화하고 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자의 신탁통치로는 북의 입장에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남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논리이다. 그런데 하필 남과 북의 통일을 문제삼는 이 시기에 이 책의 편집자는 왜 북의 의도대로 역사를 해석하려 하고 있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남에 대한 부정이 자칫하면 북에 대한 긍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이를 통일 시나리오로 이해하면 북에 대한 남의 흡수를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정말 그들은 남보다 북을 더 지지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 책자에 거론된 구차한 논리대로 통일교육을 전개한다면 우리 어린 사람들은 당장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는 국론의 분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 겨레의 통일이 아니라 또 다른 분열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말은 통일을 기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우리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누가 남쪽 일방의 정체성만을 파괴하고도 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를 믿으려 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책자가 보여 준 우리 우방에 대한 악의적 관견에 있다.
우리 사회의 남과 북은 아직 화해를 위한 명백한 합의에 이르지 못해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다. 안전한 전쟁예방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현시점에서의 우방과의 절연은 늘 전쟁재발의 위협이 되고 있다.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나 남은 겨우 우방의 군사력을 합쳐 북과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에 있어 남에 주둔하는 우방의 군사력은 유일한 전쟁예방의 안전벽이다. 그러므로 전쟁예방의 또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남에 있어 그 우방의 군사력의 존재는 아직은 필수적이다. 우리가 필요해서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 책자의 통일교육안은 그 우방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고 계속 이 땅에 머물러 있다고 헐뜯고 있다. 굳이 손익계산을 하면 그들에게도 이익이 있을 것이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이익이 있다. 그들로 해서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어떤 큰 이익이 또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 책자는 그들 우방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적의를 고취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 과거 동란의 와중에 일어난 사건까지 들추면서 말이다. 이는 우리 우방에 대한 적의의 차원을 넘어 극한 적개심을 품도록 어린 사람들을 세뇌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우방이 한반도에서 주둔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자는 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 동안 북이 꾸준히 요구해온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 책자를 만든 사람들이 참으로 우리의 국익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한반도에서의 힘의 불균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중대한 사안을 맹목적으로 북의 의도대로 만들어 가려는 그들의 태도에 우리가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그 우방에 대한 자주권의 확보를 거론조차하고 있다. 어떻게 들으면 남은 자주권이 없는 괴뢰정부라고 하는 것으로 들린다. 진정 이 책자를 편집한 사람에게는 남이 무력한 괴뢰정부로만 보인다 말인가? 달리 말하면 남의 우방은 타국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수탈자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역시 북의 주장과 일치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지금의 남의 정부가 모든 영역에서 의사결정을 자주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다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심하게 편향성을 지닌 사시 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뿐일 것이다. 그들은 간혹 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자주권의 시비를 문제삼으려 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에 대한 무지의 탓이다. 과거 한때 일천한 군사경험과 빈곤한 재원 때문에 협약에 따라 그 조달 가능한 우방에 작전권을 위임한 적은 있으나 이를 가지고 자주권을 문제삼을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 때는 건군 초기로 숙달한 군의 도움 없이는 군의 운용이 어려웠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 시기에는 그 위임의 결과가 오히려 국익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그 해묵은 일을 가지고 자주권 확보니 회복이니 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자 동시에 억지다. 이를 가지고 어린 사람들을 교화하는 내용으로 삼은 것은 언어도단의 우방과의 이간 책이다. 그 우방이 한반도에서 설자리를 잃게 하자는 것이다. 우방에 대한 국민의 적의를 고취해 우방과의 이간을 책동함으로서 그들이 얻어 내려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힘의 공백인 것이다. 이는 북의 통일 시나리오이다. 한반도에 힘의 공백이 이루어지면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게 되는 그들이 한반도 전지역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방국과의 이간 책으로 실제 이익을 얻는 쪽은 북이다. 누구든 이를 자문해 보면 그 속내를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여하간 겨레를 앞세워 통일교육을 문제삼는 이 책자가 북의 의도에 충실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III
이제까지 필자는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란 책자를 읽고 그 위험천만의 내용들에 대해 소감을 정리하였다. 여하간 필자는 이 책자를 곡예의 줄을 타는 심정으로 읽었다. 지금도 그 경악의 수준을 넘어 전율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우리 사회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마치 우리 사회를 파괴하려는 어느 알지 못할 세력이 우리 겨레의 화해와 합법을 가장해 무서운 음모를 진행하는 것과 같은 감을 받았다. 풍선을 타고 날아온 불온전단과 같은 내용의 문서가 버젓이 대낮에 우리 사회에 공개돼 그 실천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육은 개인의 성장발달과 사회의 발전을 위한 인간의 경영이다. 더구나 공교육은 국민형성과 사회의 통합에 중요 기능을 맡고 있다. 그러한 그런 교육의 현장에서 지금 겨레를 살리는 통일을 빙자해 우리 사회를 파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려 한다. 이는 우리가 수수방관해서는 아니 일이다. 이 음모는 국민의 이름으로 막아야 한다. 만일 음모의 문서대로 통일교육에 임한다면 이는 국민형성과 사회통합에 역행하게 되는 까닭이다. 앞에서 거론하였거니와 오리려 이는 국민해체와 사회분열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몸 받쳐 이를 막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교육이 그 본래의 기능을 저버리고 허구를 쫓는 허황한 통일론에 힘을 비러주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겨레의 통일은커녕 우리 사회의 자멸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재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지금 지리멸렬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동서의 지역분쟁에 휘말려 있는가 하면, 보수와 진보의 사상적 분열, 그리고 계층 간의 분열까지 체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기는 그 무엇보다도 사회통합의 관제가 절실한 때이다. 그런 마당에 이 문서의 출현은 또 다른 분쟁과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우리 겨레를 불행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온 겨레가 바라는 통일은 모두가 자유롭게 평화롭게 사는 사회체제 안에서 함께 사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공개된 문서의 통일방향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린 통일의 방향은 삭막한 빈곤의 암흑사회에로 가는 것이다. 단지 현실적으로 불행의 극치를 달리는 북의 발상을 가지고 그들의 통일안과 그 목표를 짜놓고 있다. 그리고 그 안을 가지고 우리 어린 사람들을 교화하자고 한다. 그들의 의도대로라면 북의 뜻대로 역사도 엮어가야 하고 또 국제관계도 맺어가야 한다. 남의 고립과 약화가 그들의 통일의 목표나 된 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겨레의 행복을 위해서도 엄격히 이에 대하여 어떤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합의된 통일방향을 설정해 놓은 바 있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의 헌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헌법은 국민투표를 통해 합의한 기본법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법은 국민전체를 규율하는 기본법이자 동시에 국민통합의 상징이다. 어떤 통일안도 이 헌법을 따라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자의 통일방안은 그렇지 않다. 필자가 이 책자의 내용을 가리켜 불온하다 한 데에는 그것이 북에서 날아 온 전단과 유사하다는 데도 있지만 그보다는 헌법과 일치하지 않다는데 더 큰 이유가 있다. 합의되지 않은 것은 독단의 산물이다. 우리가 합의한 헌법에 충실한 것은 곧 우리 행복을 지키는 일이다. 불온 문서의 당사자들에게도 헌법을 준수할 것을 권유한다.
끝으로 필자는 이 불온문서를 정중하게 관계당국에 신고한다. 그리고 이를 보고도 수수방관하는 당국이 있다면 이를 직무유기를 고발한다. 내 나라에 애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내 국민이 아니다. 내 나라에 애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내 나라의 통일을 거론할 자격이 없다. 우리 사회체제를 부정하고 다른 사회체제를 동경하는 사람은 더욱 내 나라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겨레의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내 사회에 애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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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2002년2월호), pp.254-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