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파일 다운로드(Essay 234호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린 한국경제.pdf) 소감 글수 14 개
제 목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린 한국경제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쓸 돈도 없고, 장사도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투자도 안 되고 일자리도 없단다. 세 가지 문제가 머리에 떠오른다. ① 한국경제,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가? ② 무엇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는가? ③ 한국경제의 전망은 어떤가?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을 먼저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경제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성장잠재력의 상실이다. 성장동력, 경제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경기부양책을 쓴다고 해도 해결될 수 없다.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2) 왜 이런 문제가 생겨났는가? 한국경제가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한국경제가 좌향좌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좌파적 가치는 서로 돌보면서 똑같이 나눠먹자는 것이다. 즉 사회적 형평, 복지, 분배평등이다. 분배가 성장보다 먼저라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지금 한국경제를 사과 속의 벌레처럼 갉아먹고 있다. 좌파적 가치는 경제의 싹, 심지어 경제의 뿌리까지도 도려낼 만큼 위험하다.
(3) 해결책은 있나? 한국경제를 좌파적 가치의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한국경제를 우향우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다. 현 정부는 좌파적 가치의 정서를 더욱 더 심화하고 이를 광범위하게 제도화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경제의 오늘과 내일은 참담할 뿐이다.
한국경제의 문제 : 장기적 저성장의 구조적 문제
2003년 성장률 3%, 실업률 4%, 청년실업률 9%,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상황이다. 설비투자는 지지부진하고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는 거의 멈췄다. 대신 국내기업의 해외 공장이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가 단기의 경기 순환적인 성격이 아니라 장기의 구조적인 성격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력이 상실되고 있다는 것,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는 것, 이것이 한국경제의 실상이다. 벌레 먹은 사과처럼 한국경제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일인당 소득 1만 달러 수준이 8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더 이상 성장 기력이 없다는 증거다. 또 1989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1960~1988년)의 GDP성장률은 평균 8%를 상회했지만 그 이후(1989~2002년)에는 그 절반인 평균 4%미만으로 하락했다(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 오래 전부터 한국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하면 한국경제가 장기적으로 경제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성 증가, 기술혁신 등과 같은 요인에 의한 질적 성장률 변화(KDI 김동석 외)도 흥미롭다. 1989년 이전(1964~1988년)의 성장률은 평균 6%인 반면에 1989년 이후(1989~2000년)에는 3.4%로 약 절반으로 감소했다. 설비투자율도 장기적인 하락추세를 보이고 있다. 1960년대 이후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설비투자증가율이 연평균 두 자리 숫자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2002년까지 연평균 3.1%로 급격히 하락했다(연세대 정갑영 교수).
2003년은 국내외 기업이 가장 많이 공장을 옮긴 해이다. 2004년에도 이런 추세를 대폭 역전시킬 전망도 없다. 한국에서 기업하기 싫다는 것이다. 노사불안, 규제, 높은 임금 등 기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기업, 중소기업 모두 한국경제를 외면하고 있다. 중소기업에 대한 최근의 어떤 여론 조사를 보면 400개 기업 중 80%가 2년 아니면 5년 이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중소기업뿐이 아니라 개인 사업가도 탈 한국이다. 그야말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산업공동화 현상이 무서울 정도로 심화되고 있다. 기업들은 떠나고 일자리는 없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투자하기도 싫고 투자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기업만이 한국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등을 돌린다. 고급인력의 유출이 그것이다. 이민도 간다. 불안해서 살수 없다는 것이다. 조기 유학을 위한 학생, 학부모의 탈 코리아도 만만치가 않다. 기업과 사람만이 한국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까지 해외 행이다. 노후를 위해서 또는 재산 증식을 위해서다. 장래가 불안하니까 한국에서 돈도 관리할 수 없다고 떠난다.
사람과 자본, 기업이 떠나는 나라는 성장이고 번영이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한국경제는 지금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문제에서는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단히 위험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김대중정부의 투자촉진을 위한 소비부양책이다. 그러나 투자 증가는 없었고 신용카드 ‘남발’, 가계금융의 부실과 신용파탄만이 야기되었다.
노무현정부는 최근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택지공급 확대, 중대형 임대아파트 건설 등 공급확대정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정책도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 건설경기의 침체가 수요부진 탓인데 공급물량을 늘이는 정책이 말이 되는가?
주택 수요가 부진한 이유는 2003년 정부가 도입한 주택수요억제정책 탓이다. 주택거래규제, 양도소득세와 취득·보유세 증가가 그런 것이다. 투기억제, 위화감 억제 등 모두 좌파적 가치를 위한 제도들이다. 이 조세정책 때문에 주택 경기가 침체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공급 증가만 열을 올리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장기적 저성장을 경험한 나라 : 영국, 스웨덴, 독일
좌파적 가치가 경제정책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의 열풍이 불어 닥친 1980년대 후반부터다. 1989년 이후부터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김대중정부 때부터다. 좌파 이데올로기의 열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경제의 문제를 잠깐 멈추고, 좌파적 가치의 덫과 경제침체의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외국의 사례를 보자. 장기적인 저성장과 고실업을 경험한 나라들 말이다. 이 나라의 사례는 한국경제의 문제와 원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길잡이를 제공해 준다.
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 모두 매우 어려운 상황을 겪었다. 수년간 낮은 성장과 높은 실업의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 스웨덴과 그리고 최근의 독일, 이 두 나라는 장기 저성장, 고실업의 침체에서 헤매고 있다. 독일은 더욱더 참담하다. 언제 회복될지 아직도 불분명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기침체를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이런 나라들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공통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이 국가들이 처음에는 잘나가던 경제였다. 그리고 자유경제였다. 국가는 사회간접자본 확충만을 맡고 나머지는 시장에 일임했다. 둘째로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는 도중에 이 나라들 모두가 시기적으로는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동일한 정치적, 이념적 사건이 벌어졌다.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는 좌파적 가치를 앞세웠다. 그런데 각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세 번째다. 좌파적 가치의 포로가 되면서, 이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경제침체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경제침체가 시작된 시기와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린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모두 그렇다.
이런 사실을 인식한 많은 경제학자들은 좌파적 가치가 어떻게 경제를 갉아먹는가를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규명했다. 이런 연구 결과로서 이제는 좌파적 가치와 경제침체의 관계는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명확한 인식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나라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영국경제는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잘나가던 경제였는가? 그러나 2차 대전 이후부터 경제가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좌파적 가치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빈번한 파업, 과도한 임금인상, 복지를 위한 재정적자의 확대였다. 이런 것들이 영국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자본주의 전성기에 영국경제를 이끌어 왔던 정신적 자본도 소멸되었다. 기업가 정신, 경제 하려는 의지, 자조와 독립심 등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경제의 역동성과 성장의 원동력도 소멸되고 말았다. 이런 정신적 자본의 소멸과 함께 대영제국의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겨우 국제통화기금의 원조에 연명하는 수모를 겪었다. 1960~70년대의 일이다. 좌파적 가치의 포로가 겪는 치명적 결과란 이런 것이다. 1980년대 좌파적 가치의 포로에서 영국경제를 구출한 것은 대처 수상이었다.
스웨덴과 독일을 보자. 한국의 좌파 지식인과 정치인들, 특히 청와대 일각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나라다. 그들은 분배를 통한 고도성장을 달성한 나라라고 믿고 있다. 이런 나라를 본받자고 한다. 그 믿음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런 나라를 본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좌파의 그런 믿음은 반쯤 틀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틀렸다. 스웨덴과 독일이 분배를 통해 성장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좌파적 가치는 한 나라 경제의 싹을 도려내는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케이스가 독일과 스웨덴이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싹을 도려내는 것이 좌파적 가치라는 것이다.
스웨덴 케이스부터 보자. 스웨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주 잘나가던 나라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경제침체에 빠졌다. 저성장 고실업이 그것이다. 1970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3위의 일인당 소득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1990년에 들어와 세계 14위로 처지고 말았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보고에 의하면 스웨덴의 경제적 잠재력은 2003년 60개국 중 18위에서 2004년 25위로 추락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과거의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업화를 이룩한 나라 중 하나다. 18세기 이래 정부의 개입이 없는 자유무역을 중시했다. 전적으로 시장경제에 맡겼다. 국가가 담당한 것은 오로지 사회간접자본 확충, 초등교육과 기술교육뿐이었다.
이런 자유 속에서 스웨덴 기업가들은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누비면서 돈을 벌어들였다. 기업가적 정신을 생산적으로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술혁신, 경제의 역동성은 눈부실 정도였다. 이런 경제가 본격적으로 좌파적 가치의 포로가 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다. 포로가 된 경제에서 살찐 것은 정부뿐이었다. GDP대비 조세수입은 70%에 육박했다. 돈벌어서 거의 전부를 국가에 바쳐야 했다. 민간기업의 고용은 거의 없었다. 공공부분의 고용만이 증가했다. 돈벌면 70%는 국가에 받치고 공공부문의 고용만 증가하는 경제, 이런 경제가 도대체 본받을 만한 경제란 말인가?
매우 흥미로운 것은 독일경제의 사례다. 마찬가지로 잘나가던 경제였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유럽경제를 이끌면서 유럽통합을 주도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 경제는 참담하다. 유럽경제의 환자가 되어버렸다. 2003년 성장률이 제로였다. 실업은 11%내외에서 맴돌고 있다. 잘나가던 독일 경제가 왜 이 지경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독일경제도 좌파의 가치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축적해온 정신적 자본을 좌파의 가치가 갉아 먹어버렸다. 그 결과가 심각한 장기침체다.
제2차 대전이후부터 1970년 초까지는 독일경제가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리기 전이다. 이 기간이 독일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경제적 자유와 기업 활동의 자유가 허용된 기간이다. 기업부문의 규제도 없었다. 노동조합은 친목단체였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에 그쳤다. 무역도 자유로웠다. 이런 자유 속에서 독일인들은 전 세계를 누비면서 거침없이 경제활동에 종사했다. 기업가 정신을 마음껏 발휘했다. 인적 자본과 기술의 축적은 눈부셨다. 이것이 독일 경제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독일경제는 좌파적 가치의 포로가 되었다. 점차 사회가 벌겋게 물들어갔다. 노조의 힘이 강화되고 복지정책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평준화교육이 지배했다. 엄격한 고용보호, 세계최고의 노동비용, 노동자 경영참여 등으로 독일은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의 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다. 일자리 창출은 멈추었고 신규채용은 극히 드물다.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국제경쟁력이 사라지고 해외로의 공장이전이 속출했다. 경제성장이 침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풍부한 복지정책 때문에 독일은 일하기 싫은 사람과 실업자의 천국이다. 그야말로 실업도 ‘괜찮은 직업’이다. 복지정책이 실업자를 생산하고 있다는 말이다. 복지정책으로 인한 기업의 부담과 납세자의 부담은 만만치 않았다. 번 돈의 60%는 국가에 바친다. 기업경영에 대한 압박도 견디기 어렵다. 그러니까 독일을 등지는 기업과 고급인력 해외유출이 증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풍부한 복지정책으로 사람들은 일할 의욕도 상실했고 연구의욕도 상실했다. 추진력, 모험심까지도 상실했다. 평준화 교육으로 인하여 지적 수준도 기술 수준도 낮다. 그 결과는 IT, BT 산업 등, 지식기반 첨단산업으로의 진출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미국보다 30년 뒤졌다. 이 분야의 기술자도 없어서 해외에서 수입한다.
이들 외국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좌파적 가치는 제아무리 부국이라고 해도 여지없이 망가트린다는 것이다. 즉 제아무리 강력한 경제도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린다면 여지없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한국경제의 저성장 원인 : 좌파적 가치의 덫
한국경제가 오늘날 왜 역동성을 상실하고 장기침체의 길을 가고 있는가? 계량분석의 결과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미 1980년대 말 이후부터 한국경제는 역동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 이후의 스웨덴, 1970년 이후의 독일, 그리고 제2차대전 이후의 영국처럼 말이다.
한국경제가 활기를 잃고 성장잠재력이 상실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 나라들의 경제에 관한 경험적 그리고 이론적 원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좌파적 가치의 포로가 된 경제는 여지없이 망가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원리는 보편타당성을 가진 매우 중요한 사회과학 ‘법칙’이라고 믿어도 무방하다. 좌파적 이념이 휩쓴 1960~70년대의 미국도 그랬다. 남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경제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경제의 활력 상실 원인도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1980년대 말 이후의 한국경제를 보기 전에 그 이전의 한국경제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 이전에도 그 이후나 마찬가지로 한국경제는 국가의 간섭주의 덫에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이후(년 평균 4%)에 비해서 그 이전의 성장률(8%)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분배평등, 또는 노사평등과 같은 좌파적 정책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이런 정책 대신에 ‘인위적 성장(artificial growth)’을 위한 국가의 간섭이었다. 잘하는 기업, 또는 수출실적이 큰 기업, 대기업에 대한 금융,조세특혜의 형태가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펼쳤던 전형적인 성장정책이다.
그렇다고 해서-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인데-국가가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간섭했기 때문에 한국경제가 연평균 8%의 높은 성장을 달성했다는 말은 결단코 아니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자유시장경제에 충실하고, 이런 자유경제로부터 저절로 생겨나는 ‘자생적 성장(spontaneous growth)’에 의존했더라면, 한국경제는 8%보다 더 높은, 그리고 훨씬 더 ‘건실한’ 성장을 달성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맥락에서 확인하는 것은 과거의 한국경제의 성장은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국가간섭 때문이라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 경험으로 보나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 오히려 그런 국가간섭은 한국경제의 성장을 촉진시킨 것이 아니라 억제했다는 것이다. 관치경제 때문에 성장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관치경제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성장을 한 것이다. 따라서 자유시장에서 달성했을 성장에서 필요이상의 국가간섭에 의해 감소된 만큼의 성장을 뺀 결과, 이것이 ‘한강의 기적’이다. 이 기적은 정부간섭에도 불구하고 허용되었던 경제적 자유의 덕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인위적 성장을 위한 국가의 간섭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가 있다. 즉 인위적 성장을 위한 국가간섭은 보다 건실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방해할 뿐이지, 경제의 싹을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분배를 위한 국가 간섭과 성장을 위한 국가 간섭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평등분배를 위한 국가간섭은 원천적으로 경제의 싹을(아니면 뿌리까지도) 도려낸다. 좌파의 이념과 가치가 무서운 것은 이 때문이다.
경제의 싹과 뿌리를 도려내는 좌파적 가치는 1980년대 후반, 맨 처음 대기업규제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의 힘의 평준화 문제였다. 약자로서의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로 대기업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대기업의 발목 잡기는 집요하고도 끊임없이 증가되어 왔다.
대기업이라는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규제로는 출자제한, 사업분야 규제, 특정 지배구조 강요, 특정 부채비율 강요, 수도권 공장신축 또는 증축 제한 등이 있다. 그 결과는 대기업의 해외이전이다. 국내에서는 투자를 증대할 수 없으니까 탈 한국을 도모한 것이다. 국내인력보다 해외인력을 더 많이 가진 기업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탈 한국의 전형적 현상이다.
좌파적 가치의 상징인 강성 노동조합이 경제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말 이후다. 민주화 바람과 함께 노동조합의 활동은 전투적으로 벌어져 빈번한 파업, 장기파업, 악성 노사분규 그리고 과도한 노임 인상으로 이어졌고, 결국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또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기업 노동비용 상승률이 연평균 14%, 중소기업의 경우 연평균 12%였다. 그 결과 1990년대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가 장기간 계속되었으며, 1997년 경제위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돌이켜볼 때 좌파의 이념이 체계적으로 제도화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정부 부터다. 국정지표의 철학적 바탕이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공식적으로 선언까지 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좌파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제이념이다. 성장 대신에 분배를 중시한다. 그 전형이 스웨덴식 또는 독일식 자본주의다.
이런 좌파이념을 더욱 더 광범위하게 제도화하고 심화시키는 정부가 노무현정부다. 행정수도 이전, 토지공개념, 노사정위원회의 확장, 그리고 산별노조의 실현, 노동자경영참여, 참여민주주의와 같은 좌파정책이 구체화되었고, 성장보다는 분배가 더 시급하다고 여기는 이념이 일반화되었다.
이 좌파적 가치가 한국경제에서 어떻게 제도화되었는가, 그리고 장차 어떻게 제도화 될 것인가를 ① 노동조합, ② 기업규제, ③ 평등주의 교육, ④ 복지정책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자.
(1) 노동조합. 한국은 ‘파업하기 쉬운 나라’, ‘파업공화국’이라고 부른다. 2004년 IMD의 보고서에 의하면 노사관계는 60개국 중 맨 꼴찌다. 노조가 전투적인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노조가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아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장기 경제침체가 있는 곳에는 항상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다. 영국이 그렇고 독일이 그렇다. 김대중정부는 노사정위원회의 도입, 복수노조의 허용 등, 제도적으로 노조의 권력 증대를 보장했다. 노무현정부는 노동계의 강력한 후원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친노동 좌파성향의 정당이 의회를 장악했다는 것, 그리고 노동조합이 정당을 결성하여 의회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사용자간 권력의 추가 노동계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뚜렷해졌다.
노동조합의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노동자경영참여, 산별노조, 노사정위원회의 강화 등을 제도화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공헌 기금조성, 통일 교육 기금조성, 부유세 도입 등 황당한 요구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요구를 제도화하는데 노조는 친노동 성향의 정부와 의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대폭 커졌다.
사용자로부터 노동계로의 권력의 이동은 경제에 이로울 것이 없다. 노사불안, 기업하기 어려움 등으로 기업경쟁력이 약화된다. 기업의 한국탈출을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자본유출도 재촉한다. 비정규직의 증가, 일자리 축소, 실업자의 증가현상이 나타나고, 결국 저성장과 고실업은 필연적이다. 이익을 보는 계층은 오로지 현재 노조원으로서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뿐이다.
(2) 기업규제. 한국은 기업활동을 방해하는 기업관련 규제입법이 많기로 유명하다. IMD의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60개국 중에서 45위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순위를 보면 세계43위다. 정부는 탈규제를 강조하지만 규제수준이 외환위기 이전과 다르지 않다. 322개 업종 약 40%가 아직도 진입규제를 받는 부문이다.
이런 규제의 결과는 뻔하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의 해외이전이다. 국내에서 사업할 수 없으면 탈한국이 불가피하다. 세계에는 기업인을 국빈(國賓)으로 대접하는 나라가 부지기수이지만, 한국에서는 반(反)기업정서가 만연한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이 대기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물론 반기업정서에는 기업 자신의 책임도 크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등이 그것이다.
반기업정서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서 두드러졌다. 김대중정부는 대기업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만들고 이런 이미지를 대기업 개혁의 구실로 삼으려고 했다. 노무현정부에서는 불법 정치자금 때문에 기업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반기업정서가 심화되었다.
그러나 반기업정서는 경제성장에 좋을 리가 없다. 지금 기업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기업인들이 심리적으로 심각하게 위축되어 있다. 심각한 투자위축도 바로 반기업정서의 탓으로 볼 수 있다. 반기업정서가 여론화되어 정책에 반영되고 제도화될 가능성도 전보다 커졌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더 큰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정서적으로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3) 평등주의 교육. 교육비(공교육비와 사교육비 총 38조원)는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중고생 절반이 정규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야말로 고비용 저효율의 구조다. IMD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의 교육경영은 60개국 중에서 44위로 교육의 낙후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기업만 탈한국이 아니라 교육도 그렇다. 조기유학생의 수도 1998년 1,600명 수준이던 것이 2003년 3만명에 가깝다. 이런 교육의 고비용-저효율은 평준화 교육 때문이다. 모두 똑같이 만들려는 교육제도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이런 평준화 교육도 정서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김대중정부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좌파적 가치에 따른 교육사회주의의 확보다.
좌파는 평준화교육을 더욱 더 강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 대학 평준화를 위한 제도도 제안하고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 학생을 대학에 배정하는 제도, 국공립대 공동학위제 등이 그것이다. 대학의 서열을 없애자는 것이다. 모든 대학을 똑같이 만들어 대학생도 모두 똑같이 만들자는 것이다. 잘하는 사람을 키우기 보다는 모두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평준화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교육의 공급자인 교사와 교수이다. 경쟁이 없으니까 연구하지 않아도,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지 않아도 도태될 위험이 없다. 피해보는 것은 교육의 수요자다. 결국 학력의 저하, 인적 자본 축적의 저하는 사회의 물질적 및 정신적 번영의 저하로 나타날 것이다. 사회적 퇴보의 지름길이 바로 평준화 교육이다. 교육에도 경쟁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교육의 경쟁만이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 경제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경쟁만이 지식축적과 인적자본 축적을 위한 길을 열수 있다.
(4) 복지정책. 한국경제를 후퇴시킬 징조는 국가독점의 복지제도 확충에서 볼 수 있다. 의료사회주의, 연금사회주의가 그것이다. 연금보험과 의료보험을 사회주의 방향으로 틀어놓은 것이 김대중 정부다. 복지의 주 공급대상을 사회의 취약계층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으로 설정하고 있다. 개개인들의 일자리, 건강, 노후 등의 위험을 국가가 떠맡고 있다.
국가독점의 의료보험은 간단히 말해서 고비용·저효율의 구조다. 의료산업과 제약산업의 낙후성은 불 보듯 뻔하다. 과거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목격한 문제가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국가독점사업인 국민연금은 선택할 자유도 없이 강제저축과 동일하다. 또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로는 밑 빠진 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의료보험의 민영화가 시급하다.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기초연금만 정부가 책임지고, 나머지는 개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는 것이다. 자유로운 연금시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하위 빈곤층을 위한 기초생활보장제도도 문제다. 수혜대상자의 범위가 급증하고 있다. 차상위 계층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것이 확대되면 차차상위 계층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 제도가 수혜자의 확대와 수혜규모의 확대를 통하여 스스로 증폭되어 가고 있다. 이런 길을 마련한 것도 김대중정부이고 이 길을 따라가는 것도 노무현정부다. 자기 증폭성을 막기 위해 기초생활 보장제도의 수선이 필요하다.
한국경제의 문제, 해결책은 우향우
저성장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우향우다. 자유경제의 확립이다. 좌파적 가치의 포로 신세로부터 한국경제를 석방하는 일이다.
자유시장 속에서만이 기업가 정신을 생산적으로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정부가 할 일은 기업하기 좋은 제도적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길만이 먹고 살 소득과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일자리는 정부가 만들 수 없으며, 시장에서 기업만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평등, 정의, 개혁을 아무리 외친다고 해도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자리만 줄어든다. 좌파정치인, 좌파지식인, 노동조합이 개혁을 합창하는 동안 한국기업이 중국에 100만개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았던가, 또 개혁을 합창하는 동안 수많은 조기유학생들이 한국을 떠났고, 조국을 등지는 재산의 해외 유출이 급증하지 않았던가? 개혁을 합창하는 동안 국가독점 사회보험 체납자의 재산압류만 늘어나지 않았는가?
정부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얽히고설킨 수많은 규제를 풀어 제치는 일이 정부가 할 유일한 일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지시하고 규제를 강화해서는 일자리와 소득은 늘지 않는다. 우향우를 해야 한다. 영국이 위기를 극복한 것도 우향우였다.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위기를 극복한 것도 자유경제였다. 오늘날 독일과 스웨덴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두 좌향좌에서 우향우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는 달리 우리 현실에서 나타나는 정책은 장기침체 극복을 위한 정책 대신에 엉뚱하게도 경제의 발목만 잡는 대형정책들이다. 자주국방의 논리를 외치다가 주한미군감축으로 현실화되었다. 국방비의 부담증가는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또 국토균형발전의 논리는 천도 또는 행정수도이전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긍정적인 효과는 최대한 부풀리고 비용은 최대한 감추면서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북핵문제 해결후의 대북투자 약속도 그렇다. 사회간접자본 확충, 공단건설 등 대북투자를 통해 북한경제를 살려주겠단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되기 전에는 북한경제는 돈으로는 결코 실릴 수 없는 경제라는 것이다. 북한 경제는 망하든가 아니면 시장경제체제로 대전환을 하든가 둘 뿐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다.
정부가 내놓는 정책을 보면 거대한 계획경제가 연상된다.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망한 이유를 곰곰이 따져볼 것을 정부에게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대형 계획의 혼돈 속에 휘말려 살 길 찾아 허둥댈 시민들이 걱정이다. 내놓는 정책이 거액의 돈 드는 대형사업들 뿐이니, 한국이 ‘부채공화국’이 될 날도 머지않은 듯 국가재정이 불안하기만 하다. 납세자의 호주머니가 애처롭게 보인다.
우리 사회는 성장보다 분배가 먼저고 분배를 통해 성장이 가능하다는 이상한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또 좌파정서가 점차 제도화되어 가고 있다. 부유세제도를 아무 거리낌 없이 주장하는 분위기다. 노동자 경영참여가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좌파와 관련하여 종전에 터부로 여기던 모든 것이 이제는 터부가 아닌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다. 가진 자에 대한 적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업할 맛이 날 리가 없다. 재산도 불안하다. 그러니까 기업과 재산의 해외 탈출은 필연적 현상이다.
고실업, 저성장, 이것은 무서운 현상이다. 실업은 인간성을 앗아간다. 인간을 처참하게 만드는 것이 실업이다. 청년 실업의 심각성은 더 크다. 청운의 뜻을 품고 열심히 학교에서 학업을 닦고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다. 얼마나 절망적이고 참담하고 황당한 일인가?
성장 없는 경제에서 실업은 물론 분배도 악화된다. 분배의 악화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 이런 갈등은 또 다시 성장과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악순환은 정말로 두려운 일이다. 성장은 고용과 분배의 개선을 위한 지름길이다. 최선의 분배정책, 최선의 고용정책은 경제성장이다. 그래서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일 만큼 경제가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권은 경제보다 정치를 중시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 더 안타깝게 만드는 것은 경제까지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정치화하고 있음이다. 정치밖에는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듯 하다. 모두가 정치다. 경제는 없다. 이것이 좌파적 가치에 따른 사고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