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칼럼] 역사에 恨풀이 말라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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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4-07-22 04:27:21  |   icon 조회: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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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복칼럼] 역사에 恨풀이 말라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04.07.18 18:29 27' / 수정 : 2004.07.18 20:54 00'

▲ 송복 명예교수

영국인들이 즐겨 쓰는 속담에 ‘과거는 과거로 돌려라 (Let bygones be bygones)’라는 말이 있다. 마치 유행어처럼 ‘과거사는 물에 흘려 보내라’다. 우리 옛 선인들이 익히 외우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도 오이왕지불간(悟已往之不諫)하고 지래자지가추(知來者之可追)라는 구절이 있다. ‘이미 지난 일, 아무리 탓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노라. 앞으로 다가올 일 바르게 좇음만이 옳음을 알았노라’이다.
과거 따지는 사람치고 제대로 사는 사람 없고, 과거사에 매달리는 나라치고 제대로 발전하는 나라 없다. 인간적으로도 과거사 들먹이는 사람은 늘 문제가 있다. 제대로 인격이 형성된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 인격 미비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면 그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미래 만들기에 바쁜 사람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할 일 없는 사람, 무능력한 사람들이 조상탓을 한다. 조상은 과거의 심벌이다. 그 심벌에 십자가를 들이대는 사람은 모두 무능한 사람들이다. 죽은 조상이 후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조상들의 지난날 행적에, 집요하게 시비를 거는 행동만큼 어리석고 무지한 것이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을 보라. 과거 따지다 망한 가장 적나라한 예가 오늘날 북한이다. 북한은 정권출범 때부터 남한보다 2배 잘 살았다. GNP가 남한의 2배였다는 의미다. 전등 하나 켜기 어려웠던 남한에 비해 북한은 70만㎾짜리 압록강 수풍발전소에 부전강 장진강 발전소,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 성진 청진의 정어리 공장, 거기에 진남포 공업지대. 아시아 어느 나라도 북한에 비견되는 나라는 없었다. 그 북한이 친일로 과거 캐고, 계급으로 과거 묻고, 사상으로 과거 따지다가 끝내는 자기 코드에 충성하는 사람만 살아남아서 발전의 기본인 역동성을 잃고, 마침내 300만명이 굶어죽는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됐다. 거기에 불량배 국가, 테러 국가, 심지어는 ‘악의 축’이라는 오명까지 받고 있지 않는가. 현재의 노무현 정권까지 우리 과거 10년도 이런 저런 과거 진상 캐다가 정권 에너지를 마구 소산한 것 또한 이에서 크게 다를 바 없고, 그 소산으로 ‘잃어버린 10년’이 돼버린 것 또한 거기서 크게 멀지가 않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다. 어떤 진상규명도 현재를 바로 세우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어떤 역사도 현재가 바로 서면 바로 선다. 현재를 무너뜨려 놓고 아무리 과거를 바로 세우려 해도 세워지지 않는다. 어떤 과거진상 규명도 무너진 현재 앞에선 의미를 상실한다. 과거는 현재가 거울이다. 현재 우리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과거는 이런 모습도 되고 저런 모습도 된다.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를 ‘역사적 현재’라 하지 않든가.

지금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이번 국회에서도 지난 정권 때나 다름없이 ‘과거’에다 정권 에너지를 쏟아부으려 한다. 친일 진상 규명을 더 확대·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2세대·60년 전 일이다. 친일 진상 규명은 과거에도 했고, 지난 국회에서도 규명법이 통과된 바 있다. 그것이 성에 차지 않는다 해서 또 하려한다면, 이는 오로지 한풀이일 뿐이다. 한풀이는 할수록 갈등이 첨예하고 적대감이 심화된다. 화합은 생각할 수 없고 원한만 쌓여서 분열의 골이 메울 수 없이 깊어진다.

진정한 진보파는 미래를 여는 데 여념이 없다. 그만큼 사고력이 있다. 이들을 리버럴스(liberals)라 한다. 사이비 진보파는 과거를 시비하는 데 온 열정을 쏟는다. 그만큼 분별력이 모자란다. 이들을 래디컬스(radicals)라 한다. 지금 우리는 래디컬스가 지배하고, 그 래디컬스가 역사를 난장판으로 만들려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재는 없다.
2004-07-22 04: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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