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자유대한 수호국민운동 주최 조찬강연회에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강연 원고 요약이다. 한승조 교수홈페이지 http://www.wisemid.org 의
전문가 명사칼럼 편에 있는 것임.
한국의 국가전략과 보수세력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대한민국의 놀랄 만한 발전은 대한민국이 해방 후부터 해양국가가 된 결과라는 설이 있다. 남북분단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북한이 공산화가 되었기 때문에 남한이 대륙에서 분리되고 해양국가가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은 하나의 남방(南方)지향정책을 선택하게 됐다. 미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들과의 관계강화로 인하여 국가발전을 일으켰다. 대륙이 아닌 바다를 건너서 해외로 도약하게 되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 같은 공산화된 대륙세력과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국가전략을 세운 것과 대조적이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남한과 사회주의 공산주의적인 폐쇄된 통제체제를 선택한 북한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한 국가전략상의 선택의 차이가 지금의 남과 북의 국력과 국가위상의 차이를 낳았다.
또 하나 붙인다면, 남과 북의 일본에 대한 관계 정립에 차이도 들 수 있다. 남한은 1965년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어렵게 결단해서 그것이 그 후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는데 반해, 북한은 그것보다 40년 늦은 지금에 와서 대일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남한은 일본에 대한 민족적인 자존심을 유보하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로 나라발전을 일으켰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경제강국이 됨으로써 바로 자존심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일본에 대한 자존심에 매달려 나라발전의 계기를 아직도 못찾고 헤매고 있다.
한국에서는 요즘 들어 중국 붐이 일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고 ‘같은 민족’이다 라고 하면서 대북지향적인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언젠가는 남북이 통일되고 다시 중국대륙과 직접연결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전에는 없었던 미국을 미워하는 반미감정도 눈에 띈다. 일본에 대해서도 어딘가 얕보는 분위기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나라분위기는 이제 북방(北方)지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통일한국을 포함해서)이 다시 대륙세력과의 손을 잡고 그 세력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가전략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해양세력보다 대륙세력을 선택할 것인가. 한편으로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가교(架橋)’역활을 꿈꾸는 견해도 있는 것 같다. ‘가교’란 말은 아름답지만, 나름대로 힘이 없으면 19세기와 같은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 ‘박쥐’처럼 양측에서 신뢰를 못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정치상황은 소위 해방직후(한국전쟁까지 시기)의 정치상황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국내의 좌우(左右)갈등에 의한 국론분열 상황이 그렇다는 것인데, 결국 한국정치의 핵심문제는 지금이나 예나 ‘북’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대북자세를 둘러싸고 좌우대립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리고 대북 자세란 것이 바로 민족문제이다. 결국 민족이란 관점에서 북한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좌우(左右) 그리고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포인트가 된다는 것이다. 우파 또는 보수는 당연히 북한의 존재, 즉 붓한체제 - 김일성 · 정일 정권을 반민족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보수입장에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타도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적인 것이다.
분명히 인민 대다수를 기아에 허덕이게 하고 북한체제가 인민들에게 약속한 ‘쌀밥과 고깃국’을 반세기가 넘도록 실현시키지 못하고 국제사회의 원조로 연명하고 있는 북한이 민족적일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의 보수파는 자신들의 ‘반북’ 또는 ‘친미’의 주장이야말로 바로 민족적이었다고 당당하게 여론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해 왔다. 바꿔 말하자면 ‘민족이냐 동맹이냐’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적 사고방식에 발목잡혀 ‘동맹’ 즉 ‘친미’가 그대로 반민족적이다라는 좌파나 친북세력의 덫에 걸린 것이다.
북한을 둘러싸고 보수파는 ‘동맹은 민족을 위한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면서 여론의 지지를 확보해야만 하는데,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반외세(反外勢)’라는 민족적 정서 앞에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난관을 효과적으로 돌파하지 않는 한 보수파의 전망은 어둡다.
그런데 ‘반외세’라는 전통적인 민족주의 정서는 인민의 행복이라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민족적인 것일까.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도 있지만, 역시 인민에게 있어서는 잘 사는 것이야말로 민족적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이라는 ‘외세’에 관해서는 반미도 있고 친미도 있다. 알다시피 반미운동 고조에 위기를 느낀 친미데모까지 전개되고 있다. 언론에서는 친미 또는 미국에 대한 지지, 옹호의 논조도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여론에 있어서는 친미가 반듯이 ‘매국노’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나 세대간의 대립이 전해지면서 친미나 주한미군 유지 같은 주장을 두고 좌파 또는 친북세력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이 나온 적이 있다. 전에는 주한미군 철수 같은 반미주장이 매국노로 매도당했는데 이제 세상이 바뀌어 버린 모양이다.
하편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리 반일감정이 고조돼도 일본입장이나 주장을 지지하거나 옹호, 이해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그리고 반일에는 좌우나 진보 보수에 차이는 없다. 오히려 때로는 서로가 경쟁하면서 상승효과를 초래하는 일까지 있다.
그래서 한국에는 반일은 있어도 ‘친일’은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된다. 알다시피 ‘친일’이라는 말에는 아직도 ‘민족적 배신’ 또는 ‘매국노’라는 의미 뿐으로, 가치중립적인 말이 아니다. 가치중립적 말로서는 ‘지일(知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같은 일본지배의 경험을 가진 대만, 중국, 동남아 등에서는 ‘친일파’라는 말에 대한 그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는 없다. 한국에 있어서 ‘친일’이라는 말에 아직도 부정적 의미를 붙이는 것은 언론이나 교육에 있어서 일제시대의 ‘친일파’에 대한 비판 또는 규탄이 아직까지 집요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일파’가 아직까지 비판의 대상이 돼있는 것은 과거의 교훈으로서, 미래를 향한 교육적인 효과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이후의 현실정치에 있어서도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였다. 단적으로 말해서 ‘친일파’문제는 지금도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인 비판, 비난의 도구로 돼있다.
예를 들어, 해방 후 역대정권은 과거청산이 충분치 않고, ‘친일파’를 온전히 남겨둔 채로 국가경영을 해왔다고 끊임없이 야당이나 반정부 측으로부터 비판받아 왔다. 특히 좌파의 목소리가 컸다. 그들은 남한정권을 비판하는 데에 북한정권의 민족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남한정권타도의 유력한 근거로 삼아왔다.
김일성 정권은 친일파를 청산한 정권이기 때문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지만, 이승만 정권은 반공정책을 위해서 친일파를 온전하게 남겨두었기 때문에 민족적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과 북의 정권 또는 국가의 도덕성의 문제로 삼아 북한의 국가적 우위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한국과 북한의 현재, 국가로서 위상이 뚜렷한 차이는 친일파를 온전하게 남겨둔 한국과 친일파를 추방한 북한의, 국가운영의 차이에 의해서 초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사에 얽힌 이러한 ‘친일파’문제는 본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되거나 후퇴하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강화, 확대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이승만 정권의 뒤를 이은 박정희 대통령이 구일본군 출신이라는 경력을 가진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일파’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정권비판의 효과를 발휘했다. 이것은 북한이 한국을 비판하는 논리가 되고 한국내의 야당이나 반체제세력의 정권비판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친미냐 반미냐 하는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 민족적인 것이지, 어떻게 하는 것이 민족에게 있어서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란, 민족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좋은데, 친미에 있어서는 그것이 민족에게 이익을 주는 민족적인 행위라는 것이 보수파의 확고한 판단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보수파는 그것을 여론에 대해서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미가 민족적이며 반미는 반대로 반민족적이다라는 확고한 논리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