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4 : 3 진상보고서에 대한 수정의견
icon 지만원홈피독자
icon 2004-07-09 15:12:25  |   icon 조회: 730
첨부파일 : -
이 글은 지만원 박사 홈페이지 http://www.systemclub.co.kr 의 좌익연구 편에 있는 것임.

Name
유기남, 문학동

Subject
4 : 3 진상보고서에 대한 수정의견 - [1]


대한참전단체연합회 회장 유기남

대한참전경찰전우회 회장 문학동

이 글은 제주 4 : 3 사건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가 발행한 "제주 4 : 3 사건진상조사서"에 대한 수정의견으로 제출했던 것임.


[진상보고서의 49 쪽 관련부분]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 49 쪽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음.

[나] 인민위원회 태동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이 글은 1945년 전라남도청에 근무했던 미군정 요원 그랜트 미드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주한미군정”에 기록되어 있다.

[49쪽 관련 수정의견] - 앞에서 "제주도인민위원회"에 대한 기술을 살펴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를 수저하여야한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이라고” 했던 그랜트 미드는 인민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의 집행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가 있는 데 이 것을 모르고 정당”이라고 기술했다.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고 했으나, 정부행세를 하려고 했지만 못했고 행정공무원 조직과 경찰공무원 조직, 군대조직, 법원 조직은 미국군정이 장악하고 있으니 인민위원회가 정부행세를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랜트 미드의 기술이 잘못되었음을 기술하여야한다.

[49쪽관련근거]

송남헌 지음 “해방 3년사”49 쪽에서 77 쪽 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와 지방인민위원회” 등에 대한 기술이 있다.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 별지--- ] --- 여기서는 생략함.

생략한 것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여운형 등에 의해서 선포되었으며, "중앙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지방인민위원회도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의 기관들이다는 내용임.



[49쪽관련 수정의견] 계속

1945 년 8월 15일 이후 한반도에서는 38도선 이북에서는 북한의 일본군을 무장을 해제시킨 소련의 군대가 군정을 하였고, 38도 이남에서는 남한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미국의 미군대가 군정을 하였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의 청진 나진에 상륙하고 8월 24 일까지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미군은 1945년 9월 6일에야 선발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여운형과 공산당세력은 9월 6일 서울 재동에 있는 京畿高女 [ 現 창덕여자고등학교 ] 강당에
1 천여 명 [송남헌의 해방 3년 사에서], 혹은 5 백 명이나 6백 명 [ 김남식의 남노당 연구에서] 이 “전국인민대표자대회”라는 것을 개최했다.
전국인민대표자를 전국의 인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것도 아니고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 계열의 사람들과 공산당의 박헌영과 김삼룡이 동원한 노조원들이 대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을 상정 통과시키고, 중앙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 발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에 “중앙인민위원”과 “지방인민위원”이 있는데 이들이 중앙인민위원회를 그리고 지방인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했는데,

제주도의 인민위원회가 정부행세를 하려고 했으나 미국의 군정이 공무원조직 경찰조직, 군대조직 등 정부를 운영하는데 어떻게 정부행세를 할 것인가?

정부행세를 했다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와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반정부활동을 하였음을 솔직하게 증언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1945 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었다.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 송진우 [ 동아일보 前사장]는 19945년 8월 15일 이전에 일본 총독의 정무총감이 일본이 패망했을 때에 조선총독부를 송진우가 인수할 의사가 있는가? 를 타진했을 때 거절했고, 조선총독의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찾아가서 조선총독부의 인수를 타진했을 때 의사가 있어서 여운형은 송진우를 찾아가서 의논하였다.

이 때 송진우는 여운형에게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해 오신 “임시정부 대한민국” 의 김구 선생도 귀국하셔야 되고 경거망동 [ 輕擧妄動 ]을 삼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송진우 등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세력은 김구 선생이 이끈 “임시정부 대한민국”을 지지했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지 않았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이 귀국하셨는데 “임시정부 대한민국 주석”의 자격으로 귀국할 수 없어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한민당 당원들이 대거 참여한 경찰 및 군대조직을 비롯한 행정, 사법, 입법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정부 미군정이 있고, 이에 대항하여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이 있었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으나 기자회견 등에서 “대한민국 주석 김구 ” 그리고 임시정부의 각료명단까지 공개하여 활동했던 “임시정부 대한민국” 이 있었으니 자칭 정부까지 포함하여 정부가 3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하여는 미군정의 아놀드 민정장관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8도 이남의 조선 땅에는 미군정부가 있을 뿐이고 그 이외는 다른 정부가 존재할 수 없다. 그 행위는 불 온당하다. 만일 이러한 고관 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그들은 즉시 그 그을 폐막하여야 할 것이다.”
고관 대직이란 “조선인민공화국”의 각료명단을 말하는데 그 명단에는 김남식의 “남로당연구” 의 48쪽에서 49 쪽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공산당원이 72% 가 된다고 하고 있다.

[김남식의 남로당연구 48 쪽에서 49 쪽------------]

조선인민공화국의 각료명단이 전국에 벽보로 “대자보 [大字報]” 로 즉 큰 글씨로 쓴 벽보로 발표되었으나, 국민들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리는 것도 몰랐고, 인민대표자 선출 과정도 없었는데, 각료명단이라고 하여
이승만 박사가 주석이고,
여운형이 부주석,
허헌이 총리 [뒤에 월북하여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 역임],
김구선생이 내무부장 [임시정부 주석],
김규식 박사 외무부장 [임시정부대한민국 부주석], 등을 발표했다.

이것을 벽 위의 정부라고 해서 벽상정부 [ 壁上政府 ] 라고 하여 국민 마음의 지지는 없는, 합법적인 절차가 없이 선전 삐라와 벽위에 존재하는 정부라고 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있었고, 주석 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며, 임시정부 대한민국의 주석 김구선생의 동의도 없이 김구선생을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도 아니고 내무부장 [내무장관격] 에 임명하여 벽보로 발표했던 것은 여운형과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이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 등의 독립투쟁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는 의도였고, 대한민국 주석 김구 선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던 행위였다.

이승만 박사를 주석으로 하고, 김구 주석을 부주석으로 했다면 이승만 박사가 임시정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했으므로 어느 정도 수긍이 되나 여운형이가 부주석이고 김구 선생이 본인의 동의도 없이 내무장관으로 발표되어 벽보에 발표했고 또 합법적인 절차로 선출된 사람들도 아닌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1945 년 9월 6 일]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주석이니 부주석이며 각료와 중앙인민위원을 발표했는데, 이승만 박사나 김구선생이 취임을 승낙할 수 없었다.

“보고서”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의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제주도에서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는 기술은 당연히 삭제되어야한다.


(수정의견 계속)

미국 펜실베니이니아 대학 이정식교수는 「人民共和國과 해방정국」이란 논문에서 “해방 후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약칭 건준) 가 설립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인민공화국이 사실은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이 급조한 정부였으며 건준을 파괴함으로써 한국의 독립과 정치문화 발전에 큰 저해요인이 됐다고 밝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大의 이정식 교수는 최근「한국사 시민강좌 (일조각간) 에 기고한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고 동아일보(1993년 3월16일)에 보도되었으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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