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金鮮一)씨의 무참한 죽음에 가슴이 미어진다. 학비를 모아 대학원에서 아랍어를 더 공부하려 했다는 꺾인 꿈도 서럽다. 서독 광산 지하 막장에서, 베트남의 수렁에서, 사우디의 모랫바람 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같은 꿈을 안고 땀투성이로 뒹굴던 30년 전. 바로 엊그제 같기만 한 그 모습들이 옛일처럼 멀어져가는 요즘이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이 땅 젊은이들의 ‘땀에 전 꿈’ ‘꿈으로 위로받던 땀’의 역사가 그에게 닿아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무참한 소식이 서럽고 애절하고 가슴 미어지는 사연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작 그 다음부터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 장면의 연속이다.
한국의 젊은이가 이라크 폭도들 총부리 아래서 때론 설득으로 때론 눈물로 목숨을 지키려 혼자 몸부림치던 20여일 동안 그의 조국 사정이 그 지경이었다. 성한 데가 없고, 제 정신 박힌 사람이 없는 나라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난 것이다.
무능하고 부도덕한 나라,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나라, 구호만 있고 내용이 없는 나라의 모습이다. 부끄럽다 해서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제는 우리의 맨살, 이 정부의 맨얼굴을 들여다볼 기회로 삼는 수밖에 없다.
이라크의 반미(反美) 세력과 테러리스트들은 파병국에 대한 보복을 수십 차례 다짐해왔고, 그걸 수십 차례에 걸쳐 행동으로 보여왔다. 그 상황에서 국제적 정보망을 갖고 있는 언론사가 어느 나라 외교부에 ‘당신네 국민 누구누구가 이라크에서 납치당한 사실이 있느냐’고 전화로 문의해 왔다 치자.
꼭 그 나라를 미국·영국·일본·이탈리아·스페인 등 앞서가는 나라라고 상정할 필요는 없다. 동유럽의 폴란드나 중미의 온두라스라고 해도 무방하다. 전화를 받은 공무원이 ‘보고 받은 게 없는데요. 담당 국이나 과로 물어보세요’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래 그 언론사가 다시 건 전화를 받은 담당 과 직원이 불과 20여일 전 일을 ‘전화를 받은 것 같긴 한데…’라고 흘려버릴 수 있을까.
이라크 교민이 5000명쯤 된다면 확인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민 숫자는 불과 57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바람에 납치범들과 혼자 맞서던 그 젊은이는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걸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기막힌 장면은 이 다음에 이어진다. 한 나라 대통령이 국민 목숨이 달린 일에 무심할 수는 없다. 물론 대통령에 대한 보고는 그 나라 외교·안보정보를 총괄 종합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라는 핵심기관이 맡는다.
NSC는 이름만 거창한 게 아니라 방대한 예산과 인력을 운용하는 국가정보원과 외교부를 사실상 지휘하고 있다. 따라서 NSC의 책임자는 외교·안보라인의 실세 중의 실세다. 이 NSC가 주관하는 회의석상에서 ‘납치된 젊은이를 구출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정보 보고는 알음알음으로 퍼져나가 나라 안에 생기가 되돌아오는 듯했다. 그런데 사실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던 바로 그 순간 그 젊은이는 참혹하게 살해된 주검으로 길바닥에 내던져졌던 것이다. 이것도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국민의 울타리이고 지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나라는 ‘균형적 실리외교’를 하는 나라이고, ‘협력적 자주국방’을 하는 나라이고, 모든 사태에 ‘시스템으로 대처하라’는 걸 원칙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나라다. 이런 노선과 원칙의 나라이니 파병 요청을 받은 지 10개월이 다 돼가는 지금 초청외교를 통해 시아파 종교 지도자를 비롯해 이라크 여러 세력과 유력 인사를 그물처럼 엮은 정보망을 깔아두었을 것이다.
왜 그걸 이참에 가동하지 않았을까. 이 나라 바다 건너 이웃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미(對美)동맹’ ‘대미 추종외교’에 목을 매고 있고 아직도 시스템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구닥다리 나라다. 그러고도 그 나라는 납치된 자국민 인질을 시아파 지도자와의 이면(裏面)협상으로 구출해냈다. 나라는 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말 나라는 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