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중국 탈북자수용소의 유혈의 반란사건 - 김 민 성/한국민주혁명동맹대표 대변인
icon 김민성글독자
icon 2004-06-23 15:50:51  |   icon 조회: 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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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의 < 사피오 (SAPIO) > 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임.


알려지지 않은 중국 탈북자수용소의
유혈의 반란사건

김 민 성/한국민주혁명동맹대표 대변인

번역 전 수 한 ( 정치학 박사)

금년 3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의 도문(圖們)에 있는 탈북자용의 수용소에서 단식투쟁(hunger strike)으로 비롯된 항의소동이 있었다. 남한에 있는 동지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단식투쟁은 <탈북자 사상 처음의 수용소내의 집단항의>라고 보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탈북자수용소에서의 항의소동은 이것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4년 전 4월 같은 수용소에서 100명 이상의 탈북자가 목숨을 걸고 일어나서 그 중의 몇 명인가가 경찰의 총탄으로 목숨을 잃었던 일이 있었다.
이번의 단식투쟁은 7명 정도의 탈북자를 북한에 송환하지 말아달라고 중국당국에 하소연하기 위한 시위행동이었다. 이 같은 항의시위는 탈북자수용소에서는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로 일어나고 있다, 수용된 사람들은 보통 두 세 번은 식사를 거부한다. 그 최대의 이유는 탈북자수용소에서 지급되는 식사의 질이 형편없이 조악(粗惡)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단식투쟁을 하는 탈북자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식사가 약간 좋아졌다고는 한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의 식사내용은 모래가 섞인 죽 한 그릇과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것과 같은 반찬 두 접시라는 것이다. 이런 개나 돼지도 먹지 않을 식사를 받으면 탈북자가 짐승이하의 존재로 간주돼 왔음을 잘 알 수 있다. 단식투쟁은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먹여달라는 것 보다는 좀 더 인간답게 취급해 줄 것을 바라는 요구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으로 송환된다는 사실을 생각만으로도, 식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사자의 심정이다.
실제에 있어서, 단식투쟁을 했어도, 수용소의 간수로부터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조사보고서를 전부 북한에 보내버린다>고 협박받아서 어쩔 수 없이 단식투쟁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자포자기 해버린 탈북자가 아니라면, 북한에 송환된 다음 자기의 몸에 무엇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동지들 중에도 수용소 체험자가 있지만, 참으로 사상 초유의 탈북자 데먼스트레이션(시위)은 전술한 바와 같이 2000년 4월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여성수용자였다. 몇 번이나 탈북·체포 되었던 체험이 있는 수명의 여성들이, 송환되면 이번만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수용소로부터 탈주를 꽤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간수를 방으로 불러내어 열쇠를 탈취할 작정이었으나, 여성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고, 거꾸로 중벌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여성들은 3일 동안 밤낮으로 구타를 계속 당했다. 여성들의 비명은 수용소내에 울려 퍼졌고, 수용소내는 암울한 분위기로 채워졌다.
그로부터 수일 뒤, 이번에는 남성방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청소하기 위해 방에 들어 온 간수를 수명의 남성이 대들어 결박했다. 비명에 놀란 다른 간수가 달려왔지만, 탈북자들은 간수를 인질로 삼고 방에 틀어박혔다. 외부로부터 열탕을 퍼부어도 용성의 탈북자들은 겁내지 않았다. 간수측은 도끼를 꺼내 와서 문짝을 열려고 했는데, 그 도끼를 뺏고 휘두르면서 방으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방도 모두 개방시켰다. 수용소는 흡사 해방구(解放區)의 양상으로 됐다. 각방에 있던 탈북자들이 모두 빠져나와, 간수 1명을 인질로 삼아 통로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탈북자 측의 요구는 <외국의 신문, 텔레비국을 모아서 기자회견을 시켜라>라는 것이었다. 만약 이때 기자회견이 성공했더라면 세계적 뉴스가 틀림없었을 것이다. 수용소측은 이해를 보이는 척하면서 먼저 인질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소박한 탈북자들은 그 요구대로 간수를 인도했다. 그리하여 그 순간부터 야만적인 진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중국당국은 소방차를 동원하여 호스로 물을 뿌려 수압은 벽을 파괴했다. 방패로 방어하던 진압부대가 건물로 쳐들어갔다. 선두에서 요구조건을 외치던 주도자가 피격되고 이에 놀란 탈북자들이 좁은 통로의 구석으로 도망쳤으나, 무장한 경찰대와 성난 간수들의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수용소는 가슴이 터질 듯한 비명과 곤봉으로 구타해대는 소리로 가득 찼었다. 중국의 경찰도 간수들도 무자비했다. 바닥에는 머리에서 피를 뿜어내는 자, 수족에서 뼈가 튀어나오는 자, 마치 지옥의 양상이었다. 수용소의 주위에는 도문(圖們)시내의 전체 경찰이 동원됐고, 탈북자들을 끌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게 된 탈북자들은 인근의 다른 감옥에 분산 수용되었고 전원 북한으로 송환됐다.
이것이 2000년 4월 도문수용소 폭동사건이다. 사태는 불과 3-4시간의 일이었지만, 탈북자들은 중국의 수용소 간수들과 투쟁하면서 자기들의 요구사항을 당당히 들이대었던 것이다. 참으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항의행동이 남한이나 일본에 전해지지 않았던 사실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나, 이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도문수용소의 시설도 바뀌고, 탈북자에 대한 대우도 이전보다는 약간 좋아졌다. 그러나 현재도 수명의 탈북자들은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하며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면서, 식사를 거부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송환되는 공포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게 되고, 보다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4-06-23 15: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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