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 '안보' 갖고 게임하지 말자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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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4-06-14 06:55:28  |   icon 조회: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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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칼럼] '안보' 갖고 게임하지 말자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 당국자들이 주고받는 발언을 보면 모두가 말장난처럼 들린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절반 가까운 병력을 철수시키겠다면서 “전력(戰力)을 더 강화하는 조처”라고 강변하는가 하면, 한국측은 ‘반미’에 ‘자주’ 운운하며 나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감축 규모와 시기를 “수용 못하겠다”고 짐짓 딴청을 부린다.
이제 양쪽의 속셈이 거의 다 드러난 마당에 바람잡는 소리들일랑 그만하고 한국의 안전보장과 동북아의 평화보전을 위한 구체적 대안과 함께 솔직한 고민들을 털어놓아야 할 시점에 왔다. 더 이상의 게임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 뿐이다.

미국이 더 이상 한국에 미군(특히 지상군)을 주둔할 지정학적 군사적 필요성과 절박성이 없어졌고 게다가 주둔 국가의 분위기가 반미정서 쪽으로 감지된 이상 더 눌러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굴지의 언론들이 기정사실로 쓰고 있다. 한국의 언론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미군의 재배치(GPR)가 이미 예정돼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내 정치상황이 그 시기와 규모를 앞당긴 것도 사실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 감축과 재배치는 전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둥, “한·미 군사동맹의 격하는 오해”라는 둥의 미 당국자 발언은 설득력이 없는 수사(修辭)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이 주한미군을 재편하는 이유는 동맹을 강화하고 한국을 더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미 국방부 롤리스 차관보의 언급은 허황되게 들릴 뿐이다.

한국측은 어떤가. 노무현 정부의 고위 안보책임자는 며칠 전 “우리가 미군의 바짓가랑이 잡는다고, 나가겠다는 미군이 안 나가겠느냐”고 주한미군 감축 내지 철수를 기정사실화하는가 하면 또 다른 측에서는 ‘수용불가’ 운운하면서 짐짓 말리는 척한다. 어쩌면 나중에 가서 우리는 만류했는데 미국이 나갔다는 식으로 떠넘기기 위한 제스처로 보인다. 그동안 대통령이 기회만 있으면 자주국방을 강조하고 ‘다자간 집단안보’까지 언급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집권당 의원총회가 이라크 파병 재고에는 열을 올리면서 주한미군 감축문제에는 언급도 하지 않는 분위기를 미국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결국 처음에는 한국국민이 헷갈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제 국민들도 알 만큼 안다. 책상 밑으로는 나가라고 발짓하면서 손으로는 아닌 것처럼 말리는 한국 정부의 이중적 태도, 그리고 결과를 상대방의 것으로 떠넘기려는 기회주의적 태도에 국민들은 실소할 따름이다. 미국 역시 더 이상 있기도 싫고 있을 형편도 아닌 데다 떠밀려서 나가기 싫으니까 ‘전력강화’니 ‘동맹유효’니 하면서 입으로는 온갖 좋은 소리 다 동원하고 있는 인상이다. 롤리스는 50년 동맹에 한국이 미군기지 30만평을 거부해서 좌절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50년 동맹과 한국-한반도 안보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30만평 정도에 ‘좌절’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왜 미국은 솔직히 말하지 않는가. 왜 한국 정부는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가. 무슨 이유든 어떤 명분이든 나가라면 나가는 것이고 나가기로 했으면 나가는 것이다. 이 마당에 중요한 것은 말장난과 정치게임이 아니라 한국과 한반도에 어떤 군사적 모험주의도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약방문(藥方文)을 짜내는 일이다. 이제 와서 동맹이니 우호니 반미니 일방주의니 하고 과거형 수사에 매달려봐야 서로 상대방 속 뒤집는 결과만 나올 뿐이다.

부디 말장난들일랑 그만하고 한국정부는 어떤 정치적 제어장치와 어떤 군사적 안전장치를 어떤 비용과 어떤 방법으로 걸어둘 것인가를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어떤 불상사가 날 것인가에 대한 예측과 함께 국제적 군사적 제도적 대비책을 세워둬야 한다. 그것이 ‘동맹’의 구정(舊情)을 입증하는 길이다.

(김대중·이사기자)


입력 : 2004.06.09 17:41 28' / 수정 : 2004.06.09 17:42 14'
2004-06-14 06: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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