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원인과 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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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4-06-11 00:37:24  |   icon 조회: 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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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원인과 해결책

증오는 인간 역사 초기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창세기 4:8에 나와 있는 성서 기록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카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
“무엇 때문에 죽였습니까?”
하고 성서 필자 요한은 묻습니다.

“자기 자신의 일은 악한데 자기
형제의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요한 첫째 3:12)

아벨은 증오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 중 하나 즉 질투의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

남자가 격노로 질투한다’고 잠언 6:34에서는 알려 줍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 부, 재능 등
남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장점에 대해
질투하면서 서로 반목하고 있습니다.

무지와 두려움

하지만 질투는 증오의 많은 원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증오는 흔히 무지와 두려움에 의해 더욱 커지기도 합니다.
“나는 미워하게 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극렬 인종 차별주의 단체의 일원인 한 젊은이는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월드 북 백과사전]에 의하면, 편견이 있는 사람들은
“입수할 수 있는 증거를 도외시한 채 형성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편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결정해 놓은
견해와 상충되는 사실들은 구부리거나 왜곡하거나
곡해하거나 심지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까?
한 인터넷 정보 제공 사이트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과거의 역사로 인해 문화적으로 수많은 고정관념이
형성되어 왔듯이, 우리 개개인이 겪은 일로 인해
우리에게도 수많은 편견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노예 무역으로 인해
많은 백인들과 아프리카계 사람들 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불명예스러운 역사가 남게 되었으며,

한국의 역사의 일본 식민지의 잔재가 남아있고
6.25 동란으로 인한 북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우리 민족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긴장 관계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다른 인종에 대한 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종종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대물림이 되며 국가의 교육으로
인하여 나쁜 감정은 어려서부터 주입되게 됩니다.

백인으로서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시인한 바에 따르면, 그는 부모가
인종 차별주의자인 까닭에 “흑인과 조금이라도
접촉하는 일이 전혀 없다 보”니 다른 인종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어쩌다가 다른 인종이나 문화에 속한
사람을 한 번 만났다가 불쾌한 경험을 하는 바람에
갖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는 그 인종이나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틀림없이 그와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결론을 내립니다.

편견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몹시
추악한 일이 벌어지는 정도에서 그칠지 모르지만,
민족이나 인종 전체가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치사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국적이나 피부색, 문화, 언어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해 준다는 견해는,
편견과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자기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나 물건은 모두 경멸하는 태도)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그러한 편견은 종종 폭력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반드시 피부색이나 국적에 대해서만
증오와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연구원인
클라크 매콜리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심지어 동전을 던져서
두 그룹으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배타적인 기호를 갖게 만들 수 있다.”

어느 3학년 교사는, 한 유명한 실험의 일부로,
자기 반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푸른색 눈을 가진
아이들과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로―나눔으로
그 점을 실증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이 두 그룹 사이에는 반목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느 스포츠 팀을 좋아하느냐와 같은
사소한 문제로 결성된 단체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폭력이 그토록 만연한 이유는?

하지만 그러한 반목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연구가들이 그 문제를 깊이 연구해 보았지만
아직도 이론만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클라크 매콜리는 인간의 폭력과 호전성에 대해
행해진 연구 논문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습니다.

그가 인용한 한 연구 논문에서는 “폭력 범죄가,
전쟁을 벌이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연구가들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한 나라들,
특히 전쟁에서 승리한 쪽에 속한 나라들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에
살인이 증가하였”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우리는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태 24:6)

그러한 전쟁이 어떤 식으로인가 다른 형태의 폭력이
증가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습니까?

어떤 연구가들은 인간의 공격적 성향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한 연구 조사에서는 특정 형태의 공격적 성향을
“뇌에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이 적은 상태”와
관련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널리 퍼져 있는
또 다른 가설은, 공격적인 성향이 우리의
유전자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증오]는 상당 부분 유전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한 정치 과학자는 주장하였습니다.

성서 자체는 불완전한 인간이 나쁜 특성과
결함을 갖고 태어난다고 알려 줍니다.
(창세 6:5; 신명 32:5)

물론,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합리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증오심은 학습에 의해서만 습득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명한 심리학자인 고든 W. 올포트는,
갓난아기에게 “파괴적인 본능이 있다는 증거는 ···
거의 없으며, ··· 아기는 거의 모든 형태의 자극,
모든 형태의 사람에게 긍정적인
태도로 접근”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말들은 공격적 성향, 편견, 증오 등이
주로 학습에 의해 나타내게 되는
행동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증오를 배울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은 증오를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고 있습니다.

정신을 오염시키는 방법

그러한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로서,
신나치 대머리족이나 K.K.K. 단처럼
증오를 조장하는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 단체들은 종종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불안감이나 열등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청소년들은 증오를 조장하는 단체들이
그들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인터넷은 일부 사람들이 증오를 조장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매우 강력한 수단입니다.
최근에 추산된 바에 따르면, 인터넷에는 증오를
조장하는 웹사이트가 무려 1000개나 되는 것 같습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증오를 조장하는 한 웹사이트의
소유자가 자랑스럽게 한 이러한 말을 인용합니다.
“인터넷은 우리의 견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의 웹사이트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페이지”도 있습니다.

십대들이 음악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증오를 조장하는 음악을
내려 받을 수 있는 사이트와 연결되어 있는
페이지에 우연히 들어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음악은 보통 시끄럽고 격렬하며,
강렬한 인종 차별주의적 내용을
표방하는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웹사이트들은 또한 증오를
조장하는 뉴스 그룹이나 대화방이나
다른 웹사이트로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연결해 줍니다.

증오를 조장하는 일부 웹사이트에는 청소년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과 활동이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신나치주의자들이 운영하는 한 웹사이트에서는
성서를 사용하여 인종 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 단체는 또한 인종 차별주의와
관련이 있는 단어로 구성된 십자말풀이를
제공하는 웹페이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젊은 백인 남성들이 우리의 투쟁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라고 그 단체에서는 밝힙니다.

하지만 증오를 조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광적인 극단론자들은 아닙니다.
최근에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충돌에 관해
글을 쓴 한 사회학자는, 일부 명망 있는 저술가와
여론 형성가들에 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자기 동족의 가장 야비한
충동에 영합해서 격심한 증오를
자극하는 글을 쓸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금기시할 만한 행동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
현실을 왜곡함으로 자기 동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이와 관련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교직자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저술가인 제임스 A. 호트는 자신의 저서
「거룩한 증오: 90년대의 종교 분쟁」
(Holy Hatred: Religious Conflicts of the ’90’s)에서
이러한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있었던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친절과 따뜻한 인간적인 관심의 근원일 것으로 생각되는
종교가 증오와 전쟁과 테러를 조장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증오의 원인은 많고도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증오로 가득 찬 역사를 반복하는
우를 계속 범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는 뜻입니까?
증오를 낳는 오해와 무지와 두려움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입니까

증오의 악순환을 중단시키려면

‘여러분의 적들을 사랑하십시오.’―마태 5:44.

적대 관계에 있는 두 나라의 지도자가
여러 날 동안 적극적으로 평화 협상을 벌였습니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한 선진국의 대통령이
그 자리에 동석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상당한 영향력과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이 두 지도자 간의 협상을 성사시켜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통만 더 가중되는 결과밖에 낳지 못하였습니다.
몇 주일도 채 못 가서 이 두 나라는, 「뉴스위크」지의 표현대로,
“두 나라 간에 20년 만에 처음으로 발생한
가장 심각한 폭력 사태”에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세계 전역에서 국가 지도자들이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인종과 민족 간의 증오와 적의는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증오의 악순환은 무지와 편견과
선전을 통해 더욱 부추겨져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새롭고
혁신적인 해결책만을 찾아 부질없이 헤매다 보니,
가장 훌륭한 해결책은 이미 오래 전에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해결책은 오래 전에 산상 수훈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방식을 따르도록 권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은 위에 인용된 말씀, 즉
‘여러분의 적들을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권고는 증오와 편견 문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결책일 뿐만 아니라 실행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적을
사랑하라는 개념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주의적이고
비실용적인 생각이라며 무시해 버립니다.

하지만 증오가 학습에 의해 나타내게 되는 행동이라면
학습에 의해 증오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생각입니까?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인류에게 실제적인
희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심지어 오랫동안 뿌리박혀 있던
적의까지도 없애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살고 계시던 당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적을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로마 군대는 계속 그 지역을 통치하면서,
유대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물리고,
정치적으로 그들을 교묘하게 농락하고,
또한 그들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마태 5:39-42)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동포인 유대인들까지도
적으로 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소한 불화가
해결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심각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 5:21-24)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 실제로 기대하실 수 있었습니까?

“사랑”의 의미

우선, 예수께서 “사랑”을 언급하셨을 때
그분은 절친한 친구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애정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 5:44에 사용된 사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용어는 아가페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단어는 원칙의 인도를 받거나 원칙의 지배를 받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따뜻한 애정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은 의로운 원칙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와 상관없이
그들의 최상의 이익을 구하려는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

따라서 아가페 사랑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적의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기둥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에 대해 악담을 하시지 않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심으로 그러한 사랑을 몸소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23:34.

현실적으로 볼 때, 세상이 대규모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기
시작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에서 알려 주듯이
이 세상은 계속 재난을 향해 줄달음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은 더욱더 악해”
질 것이라고 디모데 둘째 3:13에서는 예언합니다.
하지만 개개인들은 성서 연구를 통해 의로운 원칙으로
철저히 교육을 받음으로 증오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기록이 분명히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법으로, 그들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증오의 물결을 저항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몇몇 실제 사례를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

호세는 열세 살 때 한 테러 집단의 단원으로
게릴라전에 참가하였습니다.
호세가 가르침받은 것은, 자기 주위에서 본
불공정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미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그가
가지고 있던 목표였습니다.
호세는 자기 동료가 꽤 많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원한과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류탄을 만들면서 이렇게 자문해 보곤 하였습니다.
‘이토록 고통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분은 이러한 일을 보고 계시지도 않은 건가?’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혼란스러워하고
우울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호세는 마침내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회중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즉시 그곳에 흐르는 사랑에 찬
분위기를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따뜻하고 친절하게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하느님은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주제의 토의를 통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서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호세는 생활과 사고방식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살인자에게는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요한 첫째 3:14, 15.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
여러분이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로마 12:17, 18.

증오 없는 세상!

여호와의 증인은 이 점과 관련하여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오래된 원한이나 증오를 없애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성서 원칙을 생활에 적용하려면 계속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에 증오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증인들은 가정 성서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매년
많은 사람들이 인종 차별과 편견의 사슬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공은, 머지않아 증오와 그 원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세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결과를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이 교육 프로그램은 하느님의 왕국
즉 세계 정부의 감독 아래 시행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주의 기도 가운데서
“당신의 왕국이 오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 그 왕국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 6:9, 10.

성서에서는 이 하늘 정부의 감독 아래 “땅이 틀림없이
여호와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때에는 자주 인용되는 예언자 이사야의 이러한 말이
세계적인 규모로 성취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나라들 가운데서 심판을 하시고
많은 백성들에 관한 문제들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가지치는 낫을 만들 것이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칼을 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을 것이다.”
(이사야 2:4)

이처럼 하느님께서 친히 증오의 악순환을
영원히 중단시켜 버리실 것입니다.

증오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는 성서 교훈

“여러분 가운데 전쟁이 어디에서,
싸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들은 여기에서, 즉 여러분의
지체들 속에서 싸우고 있는 관능적인 쾌락에 대한
갈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야고보 4:1)

이기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면 흔히
다른 사람들과의 충돌을 없앨 수 있다.

“단지 여러분 자신의 일에만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살피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도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살피십시오.”
(빌립보 2:4)

불필요한 충돌을 없애는 또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리 자신의 이익보다
앞 자리에 두는 것이다.

“분노를 내버려 두고 격노를 버리며,
격앙되지 말아라, 악을 행하게 될 뿐이니.”
(시 37:8)

우리는 해로운 충동을 제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이므로,
다른 인종에 대해 우월감을 갖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무 일도 다툼이나 자기 본위로 하지 말고,
오히려 자기를 낮춘 정신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빌립보 2:3)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종종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인종이나
문화가 좋은 것을 모두 독점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할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갈라디아 6:10)

인종이나 문화에 관계없이 솔선해서 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도움을 베푸는 것만으로도,
의사소통의 장벽을 허물고 오해를 없애야 합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교훈들과 조언들이 성서에 들어 있습니다
성서를 연구하여 정확한 지식이 마음에 들어가고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사랑을 갖게되면
우리의 마음에서 사람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고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계는 평화로
가득차게 될것입니다.
그날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rrkddn@hanmail.net
2004-06-11 00:37:24
211.254.16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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