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남]] 내가 겪은 6·25 - 잊을 수 없는 푸른 눈의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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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4-05-18 13:23:01  |   icon 조회: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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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KONAS 홈페이지 http://www.konas.net 의 자우게시판에 있는 류기남 대한참전단체연합회 회장의 글임.


제 목 : 내가 겪은 6·25 - 잊을 수 없는 푸른 눈의 젊은이들

작성자 : 류기남대한참전단체연합회장 |


얼마 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7명의 미국인 노병들이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 내 충무동산에 있는 서해교전 전적비를 찾아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했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다. 이들 미국인 참전노병들은 미국 ‘센트럴 매사추세츠 한국전 참전기념탑 건립위원회(Korean War Memorial Committee of Central Massachusetts)’ 회원들로 지난해 11월 매사추세츠주에 191명 전사자가 새겨진 참전기념탑 건립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라 한다. 이들은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해 “한국인들의 영웅은 곧 미국인들의 영웅이기도 하다”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웅들의 존재를 알릴 것”이라고 기념비 동판에 새겨진 한국 장병들의 얼굴을 한장 한장 정성스레 사진을 찍었다고 한

다. 이를 지켜보던 한 유가족은 눈물을 흘리며 “멀리 외국에서 아들들을 찾아와주니 고마워서 할 말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 잊어가고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우리사회에선 벌써 서해교전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니 6·25야 더 말해 무엇 하랴. 6·25는 이미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잊혀진 전쟁이 된 지 오래다. 우리와는 달리 미국인들은 자유를 지켜낸 전쟁으로 6·25 한국전쟁을 지금도 잊지 않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미국 하원이 행정부에 대해 한국전 50주년을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나, 미 정부가 지난 95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 공원에 한국전쟁 기념비를 세운 일 등은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기념비에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다음과 같은 헌사(獻辭)가 새겨 있다.

“자유는 값있는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 / 전사 미군 54,246명 (1950∼53년)/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 한번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 지켜주기 위해 / 나라의 부름에 응한 / 이 나라의 아들과 딸들에게 / 영광이 있기를”

요즘 사람들 중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지켜낸 전쟁이라는 한국전쟁의 참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참의미를 모르니 잊혀진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6·25 참전자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전쟁이 바로 6·25다. 특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이역만리를 찾아온 미국인들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을 갖고 있다. 한국전에서 장성으로 적에게 포로가 된 유일한 사람인 딘 소장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푸른 눈의 군인들이 그들이다.

6·25 당시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대전지역 철도건설대장을 맡고 있었다. 대전은 물론 이리, 청주, 김천까지가 관할구역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대통령 긴급명령 제6호로 철도종사자들을 군사수송요원으로 징발토록 했다. 당시만 해도 철도는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다른 일반공무원들과는 달리 철도종사자들은 전원 참전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 철도참전자들은 자신을 지킬 무기도 없었고, 접전지역까지 물자와 병력을 수송해야 했기 때문에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일한 수송수단인지라 적의 타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로 인해 287명이 순국했다.

전쟁이 터지고 유엔군이 대전에 입성한 것은 50년 7월2일이다. 당시 유엔군의 군수물자가 부산으로부터 수송되어 온 것을 하역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유엔군은 대전을 넘어 조치원까지 진출했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침략자들에 밀려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미 대전으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7월16일 김천으로 다시 피난했다. 원래 계획은 정부의 2차 피난지는 전주였으며, 이날 아침 6시 전주로 간다는 것이었는데, 새벽 5시쯤 연락이 오기를 김천을 거쳐 대구로 간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먼저 떠나고 군은 7월19일 후퇴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에 따라 최후의 열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총알이 뚫을 수 없는 철판으로 된 화물칸에 지휘본부를 마련하는가 하면 딘 소장의 승용차를 실을 준비까지 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딘 소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딘 소장은 충남도청 청사를 사령부로 쓰고 있었는데, 대전역과 도청 사이 있는 목척교에까지 적의 탱크가 나타나고 있는데도 사령관의 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적의 탱크가 눈앞에 나타난 상황에서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딘 소장을 포기한 채 출발해야만 했다. 딘 소장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마지막 열차마저 적의 수중에 놓일 것이었다.
딘 소장을 포기하고 출발했지만 마지막 열차도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역을 출발하여 외곽지역인 판암동 세천터널로 진입하려는 순간 철길 양 쪽 포도밭에 매복해 있던 적으로부터 총알세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미군과 우리 철도참전자들 여럿이 적탄에 쓰러졌다. 열차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달렸다. 터널을 지났어도 안심이 안되었다. 대전역 이남 외곽지역까지 적이 출몰한다면 적군이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오후 4시 경 옥천역에 진입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옥천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미군 장교가 “왜 사령관은 오지 않았느냐”며 사령관을 구하러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시 사령관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특공대가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철도참전자 중 누군가가 20명의 특공대를 태우고 사지(死地)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기관사 김재현, 조수 황남호, 조수 현재영, 신호수 장시경 등 네 명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공대를 태운 기관차가 특공대원 20명을 석탄차에 태우고 옥천역을 출발했다. 24명의 운명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기관차가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대전역 구내로 진입한 것은 오후 5시 경. 특공대원들은 적과 교전을 벌이며 대전역 일대를 뒤졌지만 딘 소장을 찾을 수는 없었다. 30여 분 간 사투 끝에 특공대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미 공산군으로 새까만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특공대장의 지시

에 기관사 김재현은 기관차를 발차시키는 레버를 잡아당겼다. 그 순간 기관차를 포위하고 있던 적의 사격이 기관차에 집중되었다. 특공대가 응사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특공대 20명은 그 자리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기관사 김재현도 적탄에 즉사했다. 신호수 장시경은 머리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탄환이 피부 가까이를 지나 살아나기는 했지만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조수 황남호와 현재영은 팔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관사 김재현이 발차를 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관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주었던 덕분이다. 이들은 아직 생존해 있다.

그런데 딘 소장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딘 소장은 무슨 까닭인지 늦게 사령부를 나서는 바람에 적에게 퇴로를 막혀버리고 만 것이었다. 딘 소장은 하는 수 없이 금산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나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나는 당시 영동역에 있었는데 이들 특공대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을 구하기 위해 이미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간 용사들이나, 나라의 부름으로 참전한 우리 철도참전자들이 감연(敢然)히 사지

(死地)로 가는 길에 나선 것이나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피 흘려 우리를 도와준 동맹국 미국에 대한 악감정을 확산시키려는 세력이 활개를 쳐 반미기운이 높아가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또 6·25 참전자들에 대한 국가나 사회 일반의 예우가 말이 아닌 현실도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더욱이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함과 동시에 엄청난 보상까지 해주는 터이기도 한다. 민주화도 나라가 있고 난 연후의 일이다. 그런데도 나라를 위기에서 건

진 6·25 참전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지 않고 있다. 그럼 누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할 것인가. 이 나라가 또 다시 침략을

받는다면 딘 소장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 특공대원들과 같은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이런 현실에서 6·25를 맞자니 착잡하고도 분통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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