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자유민주주의 - 한승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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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4-05-11 01:57:03  |   icon 조회: 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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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의 재검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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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홈피독자

2004-05-02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자유민주주의 - 한승조 교수
이글은 한승조교수 홈페이지 http://www.wisemid.org 의 오늘의 주제토론편 (213호) 에도 있는 것임.


大韓民國의 建國理念과 自由民主主義


韓昇助/高大 명예교수·정치학


머리말

韓民族은 古來로 무엇이던 文化의 最高價値를 追求하는 民族이었다. 국민의 性格上 名分論이나 格式을 중요시해서 그런지 아니면 허영심이 많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남들이 가지며 누리는 最高의 價値를 권역 밖에 머무른 체 구경만 할 수가 없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랜 세월동안 언제나 中國 다음은 韓國이라는 矜持를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특히 中國의 儒敎文化를 本國보다도 더 야무지게 챙기려고 든 것도 歷史에 나타나 있다. 그런 韓民族이 現代的 狀況에 왔다고해서 달라졌을 리가 없다. 政治에 있어서도 금세기가 누리는 최고의 정치적 가치가 무엇이냐하는 문제에 異論의 여지가 있다면 몰라도 自由民主主義임이 확실해진 이상 韓國國民의 마음이 그 가치를 向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解放後 여러 政派들이 獨立政府를 세우고자 對立하고 경쟁하는 가운데 이 나라의 建國理念이 될려고 했고 또 될 뻔했던 政治理念은 첫째가 進步的 民主主義란 이름의 共産主義. 둘째가 自由民主主義. 세째가 제3의 이데올로기라고 보아진 社會民主主義,그 중에서도 한국형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三均主義의 정치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이 세가지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어떤 政派에 의하여 왜 주장되고 어느 정도 전망을 보여 주었으며 그 중 어느 것이 成功하고,나머지가 왜 失敗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大韓民國의 建國理念은 1948년 8월 15일 國內外로 선포된 바 憲法前文에서 自由民主主義를 政治의 基本秩序로 한다고 明示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論議가 不必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소견은 당시 명시된 自由民主主義는 주변 상황에 의해서 채택된 名目上의 이데올로기 이상의 內容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명목상 또는 語義上의 憲法規定이 어떻게 다른 政治이데올로기의 挑戰을 물리치며,우리 국민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또 그 理念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떠한 變容 과 調整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며 또 겪어야 하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1. 解放直後 建國이데올로기의 對立



(1) 李承晩박사의 建國精神과 그에 대한 여러 視角

대한민국정부는 여러 政派간의 思想對立 權力투쟁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지 국민간의 理念的 合意에 기초해서 태어난 政府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그런 建國에 反共 이외에 무슨 사상이나 이념이 있었겠는가. 自由民主主義를 憲法에는 明示되어 있지만 그것은 대외적 전시용이며 修辭學的 표현이었을 뿐이다. 그 價値에 대한 信念이나 實踐意志를 가지고 사용한 말이 아니었다는 識者들의 지적에도 一理가 있다고 하겠다.

이 時期의 政治理念하면 建國의 아버지라고 할 李承晩대통령의 思想을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보다는 權威主義的으로 통치한 사람이었다. 權威主義體制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국민을 지배하되 책임을 지지않으며 광범한 국민의 정치적 동원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精巧한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으나 어떤 정신상태,mentality는 갖는 체제로 알려져 있다.1) 그렇다면 건국이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建國精神은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 된다.

李承晩博士의 건국정신을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특징지워 줄 수가 있다. 첫째는 反日反共民族主義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열렬한 獨立精神이다. 둘째는 韓末의 獨立協會運動이 내포했던 開化派의 독립사상인 바 여기서 義正斥邪派나 東學革命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명하게 對照되는 이념적 색채를 볼 수 있다. 셋째, 이승만박사는 한국최초의 政治學박사학위의 소지자임에도 불구하고 理論派가 아닌 行動派였으며 어떤 敎條에도 얽매이지 않는 實用主義的 實踐志向的인 人物이었다. 이론은 실천에 도움이 되어야지 실천을 구속하거나 억제해서는 안된다,이러한 所信을 몸소 실천하다보니 그는 그가 세웠던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하려고 들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反共反日民族主義의 方向이나 그 구체화작업은 後代사람들에게 一任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建國行績에 대하여 현재 세가지 評價가 대립되어 있다. 첫째,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수립은 매우 時宜適切했다. 그때 그런 식으로라도 단독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는 틀림없이 共産化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견해는 保守派學者들이 갖는 시각이며 李仁秀 李元卨 梁東安 그리고 金相浹 등이 갖는 견해이며 本人도 이에 同調한다.2)

둘째,대한민국정부수립은 美蘇가 그 세력판도를 유지 확장하기 위해 싸웠던 冷戰의 不幸한 産物이었다. 左右合作派나 南北協商派들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分斷을 면할 수가 있었을터인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韓國歷史의 비극이었다. 美軍政과 단독정부수립의 主役이 된 李承晩 韓民黨 親日세력의 不純한 동기가 이 나라의 不幸한 歷史로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立場에 서는 학자들이 적지 않은데 예를 든다면 愼鏞廈 陳德奎 金俊燁 등의 이름을 들 수가 있다.3)

셋째,위의 시각이 美蘇 등 外勢와 國內勢力이 남북분단과 단독정부수립에 똑같은 책임이 있다고 보는 편이라면 세번째 시각은 美國과 그 추종세력에게 全的인 또는 보다 큰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左右對立에서 左派의 입장에 보다 더 동정적이며 李承晩과 그 추종자들이 非民主的인 방법으로 反共國家를 세운 것을 否定的으로 評價한다. 이러한 입장에 서는 사람이 Bruce Commings 朴光周 崔章集 韓貞一 기타 많은 學者들을 들 수가 있다.4)

이러한 세가지 시각에 따라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세가지로 나누어서 그 현실적 타당성을 평가해 보겠다. 이때 거론된 政治理念은 그 現實化 여부를 막론하고 이 나라의 건국이념 또는 統一國家건설의 理念이 될 수가 있는 정치이념이므로 이것을 비교평가해 보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상대평가하는 방법도 될 수가 있을 것이다.





2. 共産主義의 挑戰과 威脅



1945년의 8·15解放은 日帝植民統治로부터의 民族解放과 獨立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獨立政府의 수립을 둘러싸고 建國을 누가 어떻게 주도하느냐 하는 문제로 政派間의 對立이 벌어지는 출발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크게 보아 세가지 政治勢力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첫째가 共産主義를 中心한 左傾세력. 그 안에는 國內派·소련파·延安派가 모여 들었다. 둘째가 反共세력이었다. 그 안에는 국내외 토착부르조아도 있었지만 美國이나 中國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해오던 세력들도 있었다. 세째가 資本主義와 社會主義. 자유민주주의와 共産主義의 對立에서 벗어나서 그 쌍방을 제3의 이데올로기 안으로 折衷해 보려는 社會民主主義 세력들이었다. 이들 세가지의 정치세력 중 가장 유력하고 위협적인 세력이 共産主義者를 중심으로 하는 좌경세력이었다. 그들이 가장 强力했던 세력이었다고 보아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1) 한반도는 巨大한 共産大陸에 부속된 조그마한 半島이다. 그것도 막강한 소련과 중국의 大陸과 접경하고 있는데다 한반도의 北部는 이미 공산화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의 南部인들 어떻게 共産化룰 면할 수가 있겠는가.

(2) 日帝植民統治에 대한 저항심리와 적대의식이 대다수 한국국민에게 內面化되어 있었다. 당시 보수 우익중에는 日帝統治에 協力的이거나 소극적인 저항만 한 사람들이었음에 반해서 공산주의자나 좌경세력은 가장 심한 日帝의 탄압을 받았음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긴 저항투쟁을 해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道德的 優位 外에도 共産主義者들은 정치사회혁명의 과학적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대분분의 젊은 세대와 학생세력을 그들 편에 끌어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5)

(3) 共産主義者들은 국내사정에 밝을 뿐 아니라 일제치하에서도 요소 요소에 조직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대단한 言辯과 용감한 실천력,직업적 혁명가로서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대체로 1당 100 또는 1당 1000의 활동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이 엄선된 당원을 가졌다면 만명의 당원만 가져도 백만대군을 가진 것과 다름없는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朴憲永보다 더 成熟 능란한 力量을 가진 사람이 共産主義運動을 지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반공세력에게는 참으로 多幸스러운 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6)

그들의 잘못된 判斷과 성급한 행동에 관해서 보다 자세히 언급해 보자. (1) 해방이 되자마자 보수 우익세력이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그들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建國準備委員會를 설립하여 국민의 治安을 責任진다던지 건국을 주도하는 듯이 설쳐댄 것이 보수 우파세력들의 경각심을 높였던 것 같다. 더구나 해방된 지 한달도 안되고 海外의 독립투사들이 아무도 돌아오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左翼계열만 수백명 경기女高 강당에 모아 놓고 조선인민민주주의 人民共和國을 일방적으로 선포함을 독립운동선배나 愛國先烈을 무시하는 주제넘은 행동이며 국민 대다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野心的 행동이었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2) 그들은 저명한 독립운동의 선배 지도자들이 人民共和國을 부인하고 協助를 거부하자 원색적인 非難과 공격을 삼가하지 않았다. 또 어디에 가나 보수 우익계 인사들을 親日派 民族主義者의 이름으로 배제하려든 것도 不信과 불쾌감을 자아내는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해방과 독립에 즈음하여 모두가 不幸하고 不運한 처지에 있었던 日政時代의 잘잘못을 확대 과장하며 까발려든다던지 더구나 本意 아니게 한 말과 行動을 歪曲 확대 또는 造作함으로써 특정 사람들을 政治參與에서 의도적으로 排除하려는 행동 등도 共産主義者들의 지지기반을 좁히고 약화시키는 행동이었다. 7)

(3) 1945년 12월 24일 莫府三相會議에서 결정된 朝鮮信託統治案을 처음에는 결사반대한다고 발표했다가 그후 갑작스럽게 적극 찬성론으로 돌아선 것도 속

이 들여다 보이는 수작이었다. 莫府三相會議의 결의에 따라 臨時政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保守 右派세력주의의 참여를 배제하고 좌파가 독점 독주하는 여건을 만들려는 속셈도 떳떳치 못한 행동이었다. 이처럼 현실감각을 결여한 독단적 敎條主義,左翼小兒病的 躁急症,실천적 경험의 未熟으로인한 전략·전술선택의 실수 등 자신들의 계속적인 자충수 때문에 南韓에서 自滅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러한 惡手의 책임을 美軍政의 의도적 탄압 때문이라고 떠넘김은 옳지 못한 짓이다. 8)



朴憲永의 8월 태제

南韓 共産主義運動路線은 朴憲永이 구상했다는 8월태제인 "現政勢와 우리의 임무"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났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9)



(1) 현정세

해방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 투쟁적 산물이기 보다는 進步的 民主主義國家들인 蘇 英 美 中 등 연합국세력에 의해서 실현되었다.(필자의 註-이것은 자기들이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金日成의 말과 너무 다르다) 2차대전에서 소련의 승리와 국제적 지위향상은 우리에게 혁명달성을 위한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2) 조선혁명의 현단계조선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혁명단계에 있다. 주된 과업으로서는 민족의 완전 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토지국유화) 등이 있다. (부르조아혁명단계에서 왜 토지국유화를 논의하는 것인지)

(3) 조선공산주의의 현상과 결점

과거 혁명운동은 통일적인 활동을 펴지 못했다. 파벌분자들은 대부분 변절했거나 사상을 포기하고 민족과 노동계급을 배반,자기이익만 추구했다. 이런 자들이 해방뒤 혁명적 언사를 쓰며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끝까지 운동을 계속한 공산주의자들도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른 宗派들을 미워하는 파벌투쟁의 毒素가 아직 서려 있음을 볼 수가 있다)

(4) 우리의 임무

① 대중운동을 전개할 것. 노동자들의 불평불만을 이용,계급의식을 주입하여 조직화해야 한다. 농민들은 土地分配와 봉건잔재 청산을 위해 노동계급과의 동맹을 강화토록 한다. 청년운동은 종래의 소부르조아적 가두층 중심의 운동으로부터 노동청년·농민청년을 중심으로 한 일반 근로청년운동으로 전환,공산주의 이론의 교양사업을 주요과업으로 삼는 한편 민족개량주의 청년단체와의 일시적 통일전선을 형성 그들을 쟁취해야 한다. 부녀자들은 남존여비와 현모양처주의의 아시아적 봉건적 有體를 청산하여 남녀평등 여성해방이라는 정치구호를 들고 反動的 婦女團體 속에 들어가 그들은 쟁취해야 한다. 문화단체들은 당지도하에 활동하며 소비조합운동·실업자 이익옹호운동·취업투쟁을 전개한다. (이것은 공산화단계이지 부르조아혁명단계가 아니지 않는가)

② 조직사업

당조직을 노동자 농민속에 뿌리 박으며 기초조직을 공장에다 두어야 한다. 도시위원회 지방당조직의 대표로서 전국대표회의를 개최,중앙위원회를 조직한다.

③ 옳은 정치노선을 위해 兩面戰線투쟁을 전개할 것. 우경적 기회주의자·극좌파 세력 등 양면전선을 무자비하게 전개한다. (자신들의 결정을 반대하는 자는 누구던 용서않겠다는 의사표시로서 받아들여진다)

④ 프로레타리아계급의 헤게모니 (조선의 부르조아혁명을 조선공산당이 주도하겠다는 의사표시)

⑤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으로 수립된 人民政權을 위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

이러한 朴憲永의 8월태제를 검토 음미하면서 黨內 黨外투쟁으로 毒氣가 올라있는 좌익소아병자 또는 교조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狀況認識임을 직감할 수가 있다. 당시 한국에 공장노동자가 얼마나 있다고노동자게급의 중심적 역할을 주장하며 또 어쩌자고 농민들에게 土地分配와 토지국유화를 강조하는가. 또 부르조아민주주의의 혁명단계에 있다고 하면서 프로레타리아계급의 헤게모니를 강조하고 있는지. 그의 政治意識이 東유럽의 人民民主主義,中國의 新民主主義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 것 같이 보였다. 결국 박헌영의 8월 태제는 政治權力을 독점하려는 나머지 보수 우익세력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표출한 것인데 한 나라의 政治지도층은 政權획득의 목표를 달성하기에 앞서서 正義로움의 이미지와 누구한테라도 경멸받지 않을만한 최소한의 道德的 品位는 유지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런데 유의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의 限界였다.

(5) 1946년 6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조선공산당은 이른바 新戰術을 제시하였다. "..... 지금까지 우리가 美軍政에 협력하여 왔으며 미군정을 비판함에 있어서는 美軍政을 직접치지 않고 간접적으로 비판했으나 이런 태도를 버리고 노골적으로 치자..... 지금부터는 맞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逆攻勢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피는 피로써 갚자..... " 그리고 나온 것이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이었다. 이런 과격한 폭력투쟁전술이 공산주의 추종세력을크게 줄어들게 하였다. 10)

(6)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23일,新民黨 勤勞人民黨과 통합하여 南朝鮮勞動黨으로 다시 出帆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한 南勞黨의 정치노선이 전자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었다. 폭력저항하다 피흘리고 그에 보복하려는 행동이 더 격렬한 탄압을 자초했을 뿐이었다. 마지막에는 총력을 기울여 남한정부수립을 결사 저지하려는 폭력전술이 나왔다가 그들의 병력은 완전 소모되어버린 셈이다. 어떤 폭력도 보다 큰 폭력을 유발하는 것인데 人民이 갖는 보잘 것 없는 暴力을 행사하며 거대한 國家의 暴力에 맞서다가 自滅 投降하거나 대규모 兵力이탈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그들 상층부의 지도노선은 결과적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했다고 말할 수가 있다.

(7) 共産主義者들의 가장 決定的인 계기는 6·25南侵이었다. 남한에서 적지 않은 저항을 무릅쓰고 힘차게 커가던 공산주의의 巨木은 1946년 후반부터 시작된 폭력저항노선으로 심한 가지치기를 당하고 나무의 모습마저 잃을 정도가 되었는데 6·25남침으로 인하여 나무의 기둥마저 잘려나가버린 격이었다. 만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남침함으로써 철수해버린 美軍을 다시 불러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은 地下工作·體制전복의 노력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共産化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南韓의 단독정부수립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는 노력을 버리고 선거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정부수립에서 그 일익을 담당했더라면 아마도 10년이내에 南韓의 政治權力을 장악하였을런지도 모른다.

李承晩政府는 政府수립직후부터 韓國民主黨의 지지마저 잃고 거의 고립무원이오,사면초과의 곤경에 빠져들었으므로 공산주의자들이 즐겨쓰던 統一戰線戰略이 주효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보니 남한의 반공세력을 도왔던 강력한 援軍은 바로 南北韓의 共産主義者들이었던 셈이었다. 그들의 敎條的으로 왜곡된 현실판단과 未熟하고 성급한 침략전술의 선택,지나친 서두름이 共産化에 有利했던 제반여건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요인들이었다. 南韓住民들로서는 천만 다행이었다고 할까.

6·25南侵을 통하여 북한공산주의를 접해 본 사람들은 말과 너무나 다른 그들의 正體를 경험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6·25를 겪었던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에 대한 幻想을 버리게 되었다고 할까.





3. 臨政集團의 三均主義



國家의 政治理念은 그 나라를 支配하는 集團이 추구하는 政治理念이다. 建國理念도 그 나라의 建國課業을 주도하는 支配集團 또는 支配연합세력이 내세우고 추구했던 政治理念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大韓民國의 建立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에 따라 그 정치이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解放後의 권력경쟁 과정에서 共産主義세력은 그들의 유리한 여건에서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결함과 자충수 때문에 억압되고 박해받는 정치이데올로기로 轉落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또 國家理念 또는 建國理念의 班列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권력경쟁에서 밀려난 정치이념중에 社會民主主義 또는 民主社會主義의 理念을 들 수가 있다. 이 정치이념도 南韓의 自由民主主義와 北韓의 共産主義,남측의 資本主義經濟制度와 北韓의 社會主義經濟制度가 對立하는 한반도에서 그 中間지점이며 화해하며 妥協하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識者들이 마음속으로 선호했던 政治思想이었다.

이 정치이념이 하나의 有力한 정치세력으로 클 수가 없었던 이유는 남북한의 共産主義세력이 社會主義의 이데올로기를 先占해 버렸기 때문이다. 社會民主主義者들도 해방정국의 혼란속에서 좌익운동속으로 吸引되어 함께 소멸되어 있다가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다시 재결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趙素昻의 三均主義는 1927년 韓國獨立黨의 이름으로 發表된 正統的인 社會民主主義의 思想이다. 三均主義는 사실상 上海臨時政府의 公式的 政治理念으로 채택된 것이므로 만일 상해임시정부가 美國이나 民主聯合國에 의하여 正統政府로 認定받았고,또 한국국민들에 의하여 계속 지지받을 수 있었다면 三均主義는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建國理念으로 부상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11)

더구나 만일 國民黨政府가 中國大陸을 계속 장악 統治하고 있었더라면 사정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孫文의 三民主義를 國家理念으로 받드는 蔣介石政府도 필시 三民主義의 유사품 정도로 생각하는 三均主義가 한반도를 지배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 思想內容이 어떤 것인지 趙素昻의 建國綱領의 제1장과 제3장을 잠시 발췌해 보겠다.

제1장 총강 (2)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先民이 명령한 바 首尾均平位(수미균평위:지위를 머리부터 꼬리까지 고르게 함)하면 興邦保泰平(흥방보태평:나라를 일으키고 태평을 보지함)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층각계급의 智力과 권력과 富力의 향유를 균평하게 하며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유하하 함이니 홍익인간과 理化世界하자는 우리 민족이 지킬 바 최고공리임.

(3)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에 遺法을 두었으니 선현의 痛論한 바 遵聖祖至公分授之法(준성조지공분수지법:聖祖의 지극히 공평하던 分授法에 따름)하여 革後人私有兼倂之幣(혁후인사유겸병지폐:혁명을 일으킨 후에 사람들이 사사로이 兼倂을 폐단이 있었음)라 하였다. 이는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라는 토지혁명의 역사적 선언이다. 우리 민족은 고규와 신법을 참호하여 토지제도를 국유로 확정할 것임.

(6) 임시정부는 13년 4월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였으니 이른바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여 정권을 균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하고 公費敎育으로서 학권을 균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서 민족과 민족,국가와 국가와의 불평등을 革除할지니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소망하고 소수민족의 侵凌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권리를 고루히 하여 軒지(헌지:수레의 앞이 높았다 낮았다 함. 높음과 낮음)가 없게 하고 우리 민족이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러하게 한다" 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1차 선언이니 이 제도를 발양 확대할 것임.

(7) 임시정부는 이상에 근거하여 혁명적 삼균제도로써 복국과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의 3종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임.

제3장 건국 (1)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국도를 奠定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선거와 입법과 임관과 군사와 외교와 경제 등에 관한 국가의 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강령과 정책을 국내에 推行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1기라 함.

(2)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으 전수가 고급교육의 免費受學이 완성되고 보통선거제도가 구속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전국 각 리·동·촌과 면·읍과 도·군·부와 자치조직과 행정조직과 민중단체와 민중조직이 완비되어 삼균제도와 배합 실시되고,경향 각층의 극빈계급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이 제고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함.

(3) 건국에 관한 일체 기초적 시설,즉 군사·교육·행정·생산·위생·경찰·농·공·상·외교 등 방면의 건설기구와 성적이 예정계획의 과반이 성취될 때를 건국의 완성기라 함.

(4) 건국기의 헌법상 인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는 다음 원칙에 의거하고 법률로 령定施行 함. 12)

삼균주의 사상을 여기서 보다 자세히 부연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臨政集團이 왜 解放政局에서 多數國民의 支持를 받지 못했는가. 또 건국후 45년이 지난 다음 文民政府에 이르러서 臨政의 法統을 계승한다느니 말을 하게 되었는지 촌탁해 보고자 한다.

첫째,臨政집단은 政府로서의 기구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기능을 한번도 수행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國際的 承認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거의 자의적으로 임명되었던 臨政要人들과 그 추종자들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둘째,臨政요인들은 당시 政局의 主導세력으로서 行勢하지 못한 채 國內의 政治勢力들에 의해서도 利用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李承晩을 비롯한 反共세력은 그들을 反共투쟁에 權威를 더해주는 존재로서 활용하였고,反託運動에서의 그들의 역할은 컸다. 韓民黨도 처음에는 臨政추대운동을 벌였다가 日帝잔재세력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고는 李承晩博士만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左傾세력도 처음에는 反動세력으로 적대하다가 단독정부수립반대와 南北政治協商의 문제에서는 統一戰線의 제휴대상으로 이용하려고 들었다.

셋째,三均主義는 左右對立이 극심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左翼도 右翼도 아닌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다. 그들의 정강정책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社會主義政黨임을 알 수가 있는데13) 反託運動에 앞장서서 贊託하는 좌익들과 공격 투쟁하였으므로 保守 右派로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의 사회주의사상도 마르크스 레닌주의 영향보다 전통적인 민족공동체사상에 뒷받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래서 左右對立의 상황에서 政局의 주도적 영향을 하지 못하며 左右세력의 補助的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니 中間派는 그들의 社會民主主義的 思想定向도 南北의 理念對立을 수렴 조화시키는 구실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근래에 와서 李承晩과 金九를 비교하면서 李承晩은 親美主義者이며 南北分斷과 獨裁權力의 원흉으로 비난하고,반면에 金九는 순수민족주의자이며 南北協商을 통하여 統一국가수립을 위해 일하다 피살된 영웅으로 받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음을 본다. 필자는 이러한 움직임이 大韓民國政府의 正統性을 부인하면서 한국현대사가 출발부터 잘못된 역사임을 논증하려는 정치세력의 底意에서 나온 수작이며 남한의 國論分裂,사상혼란을 도모하는 親北統一論者들의 논리임을 모르고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李承晩정부의 反共路線을 잘못된 歷史로서 지워버리고 臨政系의 容共的인 民族主義와 社會主義의 法統을 계승하겠다는 뜻에서 臨政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이라면 보다 더 심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14)

金九선생의 정직성·순수한 愛國충정 그리고 正義感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나 그러기 때문에 더욱 그 순수한 愛國的 심정은 奸惡한 사람들에게 이용·조종될 우려가 많은 것이다. 金九선생의 측근이었던 趙素昻의 통일과업의 전망이란 글을 참조해 보시라. "양주둔국 당국자는 (외국군대의 철수를) 공동성명으로 선언하면 된다." 평화통일의 방법으로 첫째,남북민중의 공동분투노력. 둘째,대한민국정부와 남북실권소유자 사이의 타협. 셋째,남북이 세계적 공론을 환기하여 국제해방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추진한다.15) 이런 말을 음미해 볼 때 북한측이 주장해 온 民族大團結汎이나 民族大會를 통한 통일접근과 흡사하므로 북측에 惡用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4. 建國理念으로서의 自由民主主義



自由民主主義의 이데올로기가 大韓民國의 建國理念으로 浮上할 수 있었던 理

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 政治理念이 과연 당시의 한국여건에서 이 나라의 건국이념으로 異論없이 받들여질 수 있는 이념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자본주의경제체제에 대해서는 반대가 훨씬 더 많은 편이었다. 그 理由는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의 政治傳統이나 政治文化에도 부합되지 않으며 또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서 싸우는데도 效率性이 매우 의심스러운 政治·經濟이데올로기였다는데 있다. 그 당시 한국의 상황과 여건으로 보아서는 反日反共民族主義나 近代化 民族主義의 이념이 훨씬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用語개념이었다. 다만 당시 解放政局을 주도했던 6大政派,곧 조선공산당·근로인민당,中間派의 여러 群小政黨·韓國獨立黨·韓國民主黨·대한독립촉성회 중에서 유독 자유민주주의에 대단한 집념을 가진 정파도 없었지만 적극 반대하는 정파도 없었다. 때문에 각자 편리하게 생각하고 또 헐겁게 받아들 수가 있었다는 점에서 최소의 公約數가 될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제도가 새 나라의 공시적 이데올로기로 선택될 수가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첫째,제2차세계대전은 先進資本主義 民主國家에 대한 後發資本主義獨裁國家의 挑戰에 의하여 야기된 전쟁이었다. 이 世界大戰이 파시즘국가에 대한 資本主義的 民主國家와 社會主義國家의 勝利로 끝나고 그로 인하여 韓民族이 解放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은 자연 美國과 소련의 政治理念과 制度에 好感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한반도가 미소양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으므로 美軍이 주둔한 南半部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소련이 진주한 北半部에서는 공산주의·사회주의가 支配的 이데올로기로서 收容되었다. 아마도 그 외에 다른 代案을 가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한민족을 해방시켜준 나라에 대한 報恩과 義理라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南韓의 國民들이 美國의 政治-經濟制度를 모방 추종한 것은 세계최강이며 가장 부유하고 文化가 발달한 나라에 대한 선망과 존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美國 역시 한국을 자신의 友邦·屬國으로 확보해 놓기 위하여 그들의 정치-경제제도를 한반도에 심으려고 힘썼고 또 적극 보호 지원하였던 때문이기도하다.

셋째,미국이 남한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① 軍事的 보호 ② 經濟援助 ③ 敎育 및 文化的인 同化政策에 힘입은 것이었다. 日本帝國主義와 같은 직접 통치·强占·억압·착취와는 너무나 다른 막대한 同化政策이 한국국민에게 信賴感과 依存心을 심어주는데 매우 效果的이었다.

넷째,무엇보다도 解放後 南韓에게 解放後 共産主義의 威脅이 反共세력으로 하여금 美國의 政治·經濟·敎育·文化類型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不安한 정치상황에서 여차하면 美國의 保護를 받고 싶어하는 心理가 무의식중에 작용하였을 것이다.

남한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제도와 資本主義的 市場經濟制度를 建國理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기는 문제점도 적은 것이 아니었다.16) 첫째,한민족의 政治傳統과 政治文化,특히 한국이 처한 現實的 여건과 거의 부합되지 않으므로 국민생활이나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부담스러운 이념과 제도였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체제는 까다로운 성립조건을 요구하는데 그런 체제운영의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에서는 아무리 名分은 훌륭하더라도 實益이 적으며 正統性을 누리지만 效率性을 결여하는 體制類型임이 분명했다.17) 그러기 때문에 대한민국정부는 그 이념과 제도가 계속 변칙적으로 운영되고 일탈행위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權威主義,경제적으로는 官權支配의 市場經濟,新重商主義體制처럼 유지되어오다 보니 고질적인 正統性의 危機문제가 해결될 겨를이 없었다.

둘째,자유민주주의제도를 가지고 공산주의자들의 체제전복행위를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 또 그 제도의 취약점이었다. 資本主義經濟制度는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킴으로써 소외계층과 불만세력을 양산해 왔다. 共産主義體制와 접경하고 그들의 침투·파괴·전복공작의 표적이 되어 있는 나라로서는 체제유지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李承晩대통령은 민주정치의 절차와 과정을 마음대로 건너뛰고 또 원칙을 위반하면서 통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18)

셋째,제6공화정이후 권위주의체제를 民主化하고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非理와 病弊를 改革하여 왔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 高度의 自由와 번영을 함께 누리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며 자랑스럽게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반정부 반체제세력은 줄지 않고 體制安保는 언제나 위태로운 상태에서 머물러 있었다. 과거에는 官權이라는 제어장치가 필요할 때마다 작동하였지만 文民政府시대에 와서는 그 제어장치가 힘을 잃고 말았으므로 體制는 不安한 상태에 있다. 오로지 건전하고 成熟한 市民意識이 그 자리를 메꿔 주어야 할 판이나 한국국민의 市民意識은 아직 그 정도로 성숙되어 있지 않으며 체제수호와 발전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5. 세가지 建國理念의 評價



여기서 위에서 검토한 세가지 建國理念을 떠받치는 人間型 또는 指導者 像을 비교해 보며 그러한 人間型이 나라를 지배하는 경우 이 나라에 어떠한 結果가 생겨났을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意義가 있을 것이다.

共産主義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인간형이란 과거의 民族史에 대한 否定的이며 悲劇的인 인식을 안고 사는 人間型이다. 그들은 日本과 美國으로 대표되는 外勢에 대하여 깊은 怨恨,뼈아픈 피해의식을 가지며 과거의 支配層에 대한 분노와 가혹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 주변의 가족 친지들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갖지 않으면서도 조선의 피압박,인민대중에 대한 사랑과 情熱에 불타있으며 그들의 解放을 위해 무자비한 투쟁을 감행할 투지에 불타 있다.

이러한 인간형들이 나라의 支配層에 들어앉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소련 중국 그리고 북한의 政治社會실상을 관찰해 보면 너무나 쉽고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南韓에서 革命투쟁을 벌이다 북한으로 도피했던 南勞黨간부들이 어떠한 최후를 마쳤는가를 상기해 보라. 공산사회의 수용소군도에 갇혀 사는 북한주민을 생각해 볼 때 어려운 상황에서 反共立國으로 이끌어 준 李承晩대통령과 그를 도왔던 지도층에게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친 일이 없다.19)

三均主義는 社會民主主義思想과 한민족의 民族主體의식의 결합물이다. 韓民族共同體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新民主國家건설로 이끌며 또 앞으로는 국민각계의 균등생활을 확보하여 밖으로는 族與

族,同與同의 平等을 실현하고 나아가 世界一家의 理想을 표방하는 人間型이다.

그 뜻이 어찌 높고 장하다고 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그런 韓民族主體意識과 三均主義가 추구하는 土地國有制,大企業體의 국가관리의 제도가 이 나라를 오늘과 같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어 줄 수 있겠는지.20) 웬지 南美의 여러나라나 스리랑카·미얀마의 佛敎社會主義國家,인도·파키스탄의 비동맹국가 나 아니면 共産中國의 주변국가가 연상됨을 막을 수가 없다.



自由民主主義的 人間型과 政治社會體制

한국에 자유민주주의이념과 제도를 도입한 지도자들은 李承晩·徐載弼·安昌浩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美國이나 英國과 특별한 緣故관계를 갖게 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세계대세나 국제적 역학관계에 순응 적응하는 다분히 기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추측된다. 만일 해방후 남한이 美軍政下에 있지 않았더라면 또 한국을 계속 보호하고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의 지배층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고수하였을 것인지 의심해 볼 만하다.

이들이 나라의 支配엘리트가 됨으로써 얻은 성과는 共産主義의 확대 팽창을 저지할 수 있는 國力의 培養이었다. 富國强兵政策을 뒷받침할 수가 있는 經濟發展과 그 목적을 빠른 시일안에 달성하려는 의도가 軍部權威主義政權의 出現을 촉구하였다. 그들은 어떤 敎條나 정치이론에도 구속받지 않은 實用主義 機能主義 機會主義의 정신자세로 인하여 正統性이 논란되는 가운데서나마 오늘의 自由와 豊饒를 共히 누리는 대한민국을 건설해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8·15解放후 새로 탄생하는 獨立政府의 建國理念의 자리를 점하고자 進步的 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가 경합을 벌이던 끝에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體制가 이 나라의 건국이념으로 定立될 수가 있었다. 당시의 現實與件으로 보아서 그 建國理念은 현실적 妥當性과 實效性이라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많았지만 解放50주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우리

나라의 선택은 매우 正當했고 적절했음이 立證되었다. 21)

그와는 늘 대조적으로 共産主義의 이념과 제도는 세계도처에서 붕괴하고 몰락했다. 그것은 오로지 강제력과 기만에 의하여 유지된 독단 독선의 폐쇄체제이며 自體修正·조정의 여지가 없는 체제였기 때문인데 그들 體制는 外部의 자극이 없이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다.

민주정치와 공산주의체제의 대립을 절충하여 쌍방의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결합한 것처럼 보이던 사회민주주의제도도 도처에서 쇠퇴하여 많은 사람들의 不信을 사고 있다. 그 이유는 計劃生産과 명령경제,稅金부담증가를 통한 福祉社會政策이 도처에서 企業精神과 勤勞意慾을 위축시키고 대외적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체제와 자유시장경제제도가 유독 왕성한 생명력 적응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開放社會의 분위기에서 어떤 敎條나 獨斷에도 制約받지 않는 가운데 實用主義와 고도의 자체교정능력을 과시해 왔다. 오늘의 資本主義는 修正資本主義이며 市場經濟제도도 國家權力에 의하여 조정되는 混合經濟체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무궁무진한 現實適應力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22) 그에 비하면 공산주의체제는 겉보기는 좋으나 그 실속이 공허하다. 겉보기는 대단히 강력하나 속으로는 너무나 취약하다. 自由民主主義體制는 바로 그 정반대의 경우였다. 북한측은 南韓體制가 곧 무너진다고 그 滅亡의 날을 손꼽아 왔지만 南韓體制보다 북한체제가 먼저 무너질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生命力이 증명된 建國理念을 채택하고 유지해온 덕택으로 오늘날 가장 성공적인 新興工業國家로서 고도의 自由와 번영을 만끽하고 있다. 다만 앞으로 우리 체제의 長短点을 잘 살펴서 그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즉시 즉각 보완 수정해 나가지 않는 한 우리의 체제유지는 난관에 부딪치며 언제 어떻

게 歷史의 격랑에서 휩쓸려 내려가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北韓共産主義와 體制內部의 親北容共세력과 對抗하여 싸우는 과정에서 드러난 장단점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북한공산주의는 思想戰力·心理戰에서 압도적 優位에 있는데 비해서 南韓은 經濟力·國民의 풍요로운 消費生活수준에서 뛰어나 있다. ② 북한권력이 극도로 中央集中化되어 있으며 指導者의 權威가 절대적이다. 남한은 권력이 비교적 분산되어 있고 지도층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으며 不信의 대상이 되어 있다. ③ 北韓은 해방후 50년동안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주민들이 극도로 궁핍한 經濟生活을 하면서도 體制優越性과 指導者에 대한 信賴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南韓은 급속한 성장 발전을 거듭하여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풍요로운 경제생화라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共産主義的 人間型과 똑같은 否定的 歷史意識 現實意識의 포로가 되어 왔다.23)

이러한 否定的인 현상을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思想戰·心理戰에서의 敗北,正統性意識의 결여,政治社會的 指導者들의 권위실종으로 인하여 생겨난 결과이다. 이것은 80년대부터 우리 사회를 풍미한 수정주의적 현대사인식이 번짐으로써 생긴 현상이라고 하겠다. 북한은 思想性의 過多,지도층 권위의 과다,對民統制와 조작의 과다 때문에 시들어 왔다. 오늘의 남한은 左傾意識化의 결과로 생겨난 세가지의 過少로 인하여 병들어 있다. 우리 건국이념의 장점은 어떤 敎條나 독단에도 사로 잡힘이 없이 파시즘이건 공산주의이건 유용한 思想과 制度라면 도입하여 실용주의적으로 자기화할 수 있다는데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서 안되는 정치이념이고 제도이다. 그렇다면 차제에 북한의 과다성 특징을 어느 정도 도입할 수 있어야 우리 체제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맺음말



1987년 후의 民主化 바람,1993년 후의 改革政治 바람이 불면서 북한공산주의에 대한 New look적 시각,李承晩政權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臨時政府의 法統이나 전통을 새로 계승하려는 태도가 부상되고 있다.24) 사물을 항상 새로운 시각과 입장에서 보려는 자세를 是非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부터 비판적으로 보며 韓國現代史를 否定的으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경향은 解放政局으로 돌아가서 이미 남한에서 죽었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운동을 새로 다시 살려내어서 계승 발전하려는 움직임을 알고나 계속하라고 경고해 두고 싶다.

어떤 정치이념이나 제도에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한국의 현실속에 어떻게 적용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이념제도의 장점이 살아나기도 하고 단점만 드러나게 되기도 한다. 自由民主主義나 資本主義의 이념·제도도 敎條的으로 硬直되어서 적용할 때는 그 폐단만 크게 드러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발판을 상실하고 말 우려가 있다. 본래 한국의 識者들을 空理空論과 논쟁을 좋아하며 어떤 哲學·思想도 엄격하고 경직되게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속성을 보여왔다. 분명하게 말하거니와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순수한 형태로 고수하려고 든다면 반드시 실패한다. 더구나 전혀 익숙하지 않은 北韓住民들을 상대로 한국에서도 잘안되어 오던 이념과 제도를 강요하다가는 거센 저항과 혼란을 겪게 될 것이 틀림없다.

필자는 앞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統一韓國의 指導理念이 될 수가 있으려면 自由民主主義가 民主的 組合主義와 결합하고 資本主義가 社會共同體主義(communitarianisn)에 의하여 조종되는 混合政治經濟體制의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25)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Samuelson교수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이며 자유민주주의와 이념도 한국의 현실여건을 보아 신축성있게 운영해야 한민족은 安定속에 發展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1) Juau J. Linz, "Totalitarian and Authoritarian Regimes " Greenstein & Polsby, Macro political Theory (Addison,wesley 1975), p.264., Roy C. Macridis, Modern Political Regime (Boston Little Brown & Co.,1986), p.216.

2) 李仁秀,"大韓民國의 建國"., 李元卨,"美軍政과 대한민국수립",「現代史를 어떻게 볼 것인가 」Ⅰ,동아일보사,1988, pp.306-309., 梁東安,"혼란속의 국가형성",「現代韓國政治史」,精文 硏,1987.

3) 愼鏞廈,"8·15해방전후 한국인의 역사의식",「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Ⅱ,동아일보 사,1988, pp.32-34., 陳德奎,"李承晩의 單政論과 韓民黨",위에 적은 책, pp.167-174.

4) Bruce Commings,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Princeton Univ. Press,1981)., 崔章 集,「韓國現代政治의 구조와 변화」,까치,1989, pp.154-160., 韓貞一,"5·10선거의 전개과 정",「현대사 어떻게 볼 것인가」Ⅱ,위에 적은 책,1988, pp.181-200.

5) G. Almond, The Appeal of Communism, Princeton Univ. Press., 拙稿,"아시아에 있어서 의 共産主義의 魅力",高大亞硏,1965.

6) 「朴憲永硏究」

7) 「韓國近現代史의 爭点」,Ⅱ,한국근대사연구소,1993,4월호.

8) 修正主義的 입장에서 한국현대사를 기술한 모든 책이 解放後 공산주의운동의 쇠퇴가 美 帝國主義의 의도적인 음모때문이라고 모든 책임을 그 下手기관이 美軍政 당국에 돌려대 고 있다.

9) 김남식,「南勞黨硏究」,돌베개,1984, pp.19-26., 양동안外 공저,「現代韓國政治史」,精

文硏,1987 pp.41-42.

10) 金南植,「南勞黨硏究」,위에 적은 책, pp.235-236.

11) 강만길편,「趙素昻」,한길사,1982, pp.185-235.

12) 위에 적은 책, pp.102-105.

13) 한국독립당의 정강정책에 "土地와 大生産기관을 國有로 하여 국민의 生活圈을 균등케 할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위의 책, pp.212.

14) 臨政의 政治理念이 三均主義이며 그것이 社會民主主義의 思想이라고 하여 그 價値를 폄 하하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思想은 숭고한 사상내용을 가지며 앞 으로 우리 사회현실에 구체화되어야 할 가치임에 틀림없으나 북한측의 국론분열·사상 혼란정책에 惡用됨은 방지되어야 한다.

15) 趙素昻,앞에 적은 책, pp.261-262.

16) 拙著,「韓國民主主義와 政治發展」(法文社)는 이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17) 한국정치학회편,「現代韓國政治와 國家」,法文社,1987, pp.197-216., 「韓國政治의 民主化 」,法文社,1989, pp.315-326.pp.337-347., 崔章集,「韓國現代政治의 구조와 變化」,까 치,1989, pp.72-110.

18) 李承晩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으면서도 美國式민주주의를 한국에 적용하는데는 부정 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韓培浩,「韓國政治變動論」,法文社,1994,pp.45.

19) 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들 중에는 李承晩과 그 일당이 단독선거를 치루고 反共立國하는 과정에서 反民族的 反民主的인 죄과를 범했다고 비판하려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북 한은 당시 사실상의 통치구조를 가지고 통치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남한만은 그런 것을 갖지 말고 무조건 모든 政派가 合意할 때까지 아뮈일을 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公正하지 못하고 설득력도 없다. 다른 정치집단이라면 몰라도 폭력혁명밖에 모 르는 공산주의를 상대해서는 이승만식 해결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가 있었다. 참 고,「現代史 어떻게 볼 것인가」Ⅱ,1988,pp.180-200.

20) 社會民主主義는 資本主義經濟가 高度로 발달하고 議會民主主義가 확고한 뿌리를 내린 社會에서 추구될 수 있는 政治理念이다. 그러므로 三均主義는 21세기에 가면 몰라도 解 放政局에서 이 나라의 建國理念이 되었다가는 한국의 국가발전을 많은 지장을 받게 되 었을 것이다.

21) 대한민국정부의 無理念性,임기웅변적 便法主義가 해방정국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安保 와 發展의 시기에 도리어 빠른 성장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해 낼 수가 있었던 것이 우 리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과거에 잘 통했던 편법주의와 實用主 義가 앞으로도 통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22) 최근 미국 MIT의 Samuelson 교수는 파시스트的 자본주의가 최근 후발국가의 경제체제 로서 매우 유용함을 역설하고 있다. 순수 자본주의·순수 자유민주주의는 살아남기 어 려우나 이와 같은 혼합경제체제 형태가 무한한 生長力을 유지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하 고 있다. 동아일보,1995.8.28일자.p.4.

23) 拙稿,"南韓이 먼저 무너질 수도",「民族正論」,1995.6월호.

24) 臨時政府의 法統을 계승한다는 말은 大韓民國憲法 前文에 명시되어 왔음으로 이것이 새 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文民政府가 내세우는 法統은 분명히 다른 含意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25) 拙稿,"韓國民主主義의 國家論的 基礎",韓昇助,「韓國의 政治思想」,一念,1989, pp.262-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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