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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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4-03-09 01:23:33  |   icon 조회: 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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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대중이 변화를 부르짖으면,
대개 개혁에 대한 약속이 뛰따릅니다
교육 개혁과 관련하여 교육학 및
정부학 조교수인 프레더릭 헤스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개역이란 대체로, 조바심을 내는 공동체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기울이는 상징적인 노력이다.”

신문을 보면, 정치 개역, 보건 개혁, 농업 개혁, 법제 개혁. 등
개혁 계획을 알리는 기사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한국에는 지금 정치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교육 제도. 복지 제도 형벌 제도의
개혁안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기도 합니다.
또한 일부 교회의 신자들이 교리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될 때도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그러한 욕구 뒤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인간은 주위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인간은 투표, 비용 지출 법률 제정,
완력을 통해 개선하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이것은 삶의 처지를 개선하거나 자녀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거나 복지와 도덕과 정의에 대한
사회의 수준을 이상적인 개념에
부합할 정도로 끌어올리고 싶어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열망의 산물입니다.

무지와 질병과 가난과 굶주림의 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은 계속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혁을 반기지만 개혁가들과
그들이 이루려고 하는 일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사회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다시 말해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합니다.
그들은 개혁가들을,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지만
현실 감각을 잃은 이상주의자로 간주합니다.

[독일 개혁 운동 안내서 1880-1933)
(Handbuch der deutschen Reformbewegungen 1880-1993)에서는

개혁가들이 “비판. 정치 만화. 캐리커처.
풍자의 손쉬운 표적”이라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의 극작가인 ‘몰리에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온갖 어리석은 생각 중에서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개혁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개혁가들은 한갓 낭만적인 몽상가에 지나지 않습니까?
과거에 도입되었던 개혁의 경우에는 어떠합니까?
그러한 개혁을 주창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목표를 이루었습니까?

부정한 사업 관행, 편파적인 법 집행,
사회적 불공정, 빈약한 보건 시설, 질 낮은 학교 교육,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갈취, 환경 파괴,
이러한 문제들에 접하게 되면 우리 대부분은
실망 섞인 한숨을 짓습니다.

개혁가들 역시 이러한 문제들이
도화선이 되어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개혁가들은 거의 모든 사회에 존재하며,
그들은 사회 내에서 질서 있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변화를 장려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나 혁명가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개혁가들은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일부 개혁가들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변화를 도입하기 위해 솔선합니다.

그런가 하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막후 교섭을 벌여서 어떤 조처를 취하도록
촉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혁가들은 사회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재고해 보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단지 이의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제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개혁가들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로 주의를 끌기 위해 대중에게 호소하거나
가두시위를 벌이거나 대중 매체를 통해
문제를 널리 알리기도 합니다.

개혁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 중 하나는
사회가 그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개혁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성서에서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약 2000년 전에 한 공개 연사는 로마 속주인
유대의 장관(프로쿠라토르) 펠릭스를 이러한 말로 칭송하였습니다.

“당신의 선견지명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에 개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24 :2)

펠릭스보다 약 500년 전에 ‘그리스’의 입법자인 솔론은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솔론은 고대 아테네에서

“가난이 가져오고 있던 최악의 폐단을 종식시켰다” 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설명합니다.

종교의 역사는 개혁가들로 넘쳐 납니다.
예를들어,

마르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의 솔선적인 노력은
프로테스탄티즘을 위한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개혁가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까지
바꾸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어떤 개혁가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 방식을 장려합니다.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일어난 ‘레벤스레포름(생활 방식 개혁)
운동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사회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삶이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 개혁가들은 자연 친화적인 생활 방식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들은 건강, 실외 활동, 자연 의학, 채식을 장려하였습니다.

어떤 개혁가들은 불공정을 폭로하며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상황을 바로잡게 합니다.

1970년 초부터 환경 운동가들로 이루어진 단체들이
환경의 오용과 악화에 항거해 왔습니다.
이러한 단체들 중 일부는 그 후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한 운동가들은 단지 환경 위험에 대해 시위하고
항거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정치에 항거하고, 간섭하고 정치적인 발언을 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높여 왔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자신의 입지를 높여갔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개혁가들의 노력과 주장으로
사회는 밝아졌으며 제도는 개선되었고,
참으로 살기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개혁이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지속적인
만족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혁의 부르짖음은
또 다른 부작용을 불러왔으며 실속없는 개혁으로
구호에만 그쳐 버린 사례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일부 개혁가들은 개혁을 위한 개혁을
추구한다고 비난받아 왔습니다.

학교 개혁에 대해 연구해 온 프레더릭 헤스는
자신이 실속 없는 개혁이라고 부르는 개혁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범위한 개혁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비참한 결과를 거두게 된 것은 개혁 사업 자체의
본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 노력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매혹적인 방해 요인이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그러한 노력을 통해 해결될 것으로 예상 되었던 문제들이)
실제로는 악화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습니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개혁이 단행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몇 년마다 전 과정이 새로 시작되게 된다.”

또한 개혁은 결국 다른 대의, 때로는 해롭기까지 한
대의를 조장하게 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있었던 레벤크레포름(생활 방식 개혁) 운동은
우생학 이론 다시 말해서 더 튼튼한 자손을 낳을
부모를 선택해서 인종을 개량하는 법에 대한
학문이 발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들은 우수 민족을 만들려는 이념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국가 사회당을 지지하기 위해
그러한 지식을 오용하였습니다.

심지어 개혁을 열렬히 주창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그 결과에 실망합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한탄 하였습니다.

“ 내 생각에, 가장 좌절감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은,
우리 모두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지를 알고는 있지만 흔히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때대로 사무총장이 이끄는 사무국이
그에 대해 뭔가 조처를 취하라는 지시를 받지만,
그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따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세계의 양심을 일깨우고 싶어도,
과거에 한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아무도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개혁가들은 인기를 얻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대의로 주의를 이끎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현대 역사학 교수이자 개혁가에 대한 전문가인
‘위르겐 로일레케’ 는 [디 차이트]지에
인용된 자신의 글에서

“개혁가는 언제나 살에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의 개혁가들은 법의 한계를 벗어 나지 않으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지만, 일부 개혁가들은 일의
진척 속도가 느릴 경우 조바심을 내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개혁 운동으로 인해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호전적인 사람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최근 여러 해에 걸쳐 널리 일어난 개혁으로 인해
일반 사람들의 삶이 더욱 만족스러워졌습니까?
그런 것 갖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독일에서 행해진 몇몇 여론 조사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지난 약 35년동안 삶에 대한 만족도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한국도 역시 개혁을 주장하며 정권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국민 감정으로는 부정 부패가 사라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어떠합니까?
종교계에서 일어난 개혁은 더 많은 신자들을 끌어들였습니까?
신자들은 종교에 더 만족하고 있습니까?
국민들은 종교를 신뢰하며 종교인들을 존경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 세계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가고 있고
사람들이 기성 종교에 대해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 뿐 아니라 종교의 부패는 심각하며
가장 철저히 개혁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종교라는 이름하에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베일에 쌓여있고
온갖 방법으로 치부하고 있는데도 기득권 세력들은
그들의 수에 눌려서 감히 개혁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 비판의 소리가 나고 자체에서
종교 개혁을 주장하는 소리가 나오지만
종교 개혁은 정치와 사회가 공의롭게 변하지 않는한

그리고 정치가 종교에 있어서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고 종교 개혁을 하지 않는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와같이 인간들의 개혁 노력은 산 넘어 산입니다.
진정 인간의 노력으로 인한 개혁은 성공할 것이며
더 좋은 세상으로 변화 될 것입니까?

나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열매를 맺는 다면
나뭇가지 몇 개를 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베어 내고
그 뿌리를 땅에서 뽑아낸 다음,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결한 목표를 가진 개혁가들이라 하더라도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폐단의 증상들
(부패, 불공정, 궁핍, 강탈,)만을 다루게 되며
좋은 나무는 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전체 제도입니다.
몇 사람만 정화되고 몇 나라만 변돠된다 해결 되지 않습니다.

머지 않아, 조금만 있으면
하느님의 하늘 왕국 정부(메시아 왕국)는
인간 사회를 재구성하거나 개조하거나 재조직하거나
개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아니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정부는 인간사를 운영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그 통치 아래 모든 인류를 연합시킬 것입니다.
이 왕국 정부는 교육, 직업, 주택, 영향, 건강, 환경과 같은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시편 72 : 12-14에서는 메시아 왕이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언적으로 이렇게 묘사 합니다.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가난한 이를,
또 괴로움당하는 자와 도와 줄 이 없는
모든 자를 그가 구출할 것(입니다)
그는 낮은 자와 가난한 이를 아껴 보고
가난한 이들의 영혼들을 구원할 것이며,
그들의 영혼을 압제와 폭력으로부터 구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부패와 불공정과 궁핍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려면 분명히 정부도 변해야 하지만
사람들도 변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왕국은 개개인에게 즐겁고 목적 있는
보람찬 삶을 살아가는 법에 관한
개인적인 지침을 제시할 것입니다.

성서의 약속에 따르면 하느님의 왕국은
지상 신민들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것입니까?

하느님의 하늘 왕국은 여호와 하느님 방식으로
신민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믿음과 사랑을
발전시키도록 도울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한 사랑은 마음을 움직여 행동을 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1세기에 예수께서는 수석 세금 징수원인
삭개오를 만나신 적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부풀려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부패한 관리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가 부끄러워하며 자기 행실을 변화시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삭개오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삭개오는 경건한 원칙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는 놀라운 변화를 하였습니다.
(누가 19 : 1-10)

이것은 사회의 결함을 고치는 월등한 방법이 아닙니까?
인간사를 관장할 완전하고 의로운 정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자기 행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개인적인 동기까지 부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들 개개인과 정부가 변화되고
사회가 살기좋은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한다면
그때에도 개혁이 필요할 것입니까?

더는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게서 이미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1 : 4-5)

개혁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로 인한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조만간 하느님의 왕국 통치에 의해서
확실하게 변화되고 바로잡아질 것입니다.

지금도 성서를 연구하고 왕국 진리를 받아들인
수백만 명이 생활을 변화 시키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들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미래의 세상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를
소규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불완전한 인간들의 변화지만 놀랍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지구 전체를 아름다운 낙원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부정 부패 없는 공정한 사회, 행복한 사회로 변화될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인류가 어디에 살던지 살기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이 당신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kkwwoo@intizen.com
2004-03-09 01:23:33
210.92.2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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