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한 점
icon 보은신문
icon 2001-08-11 12:49:34  |   icon 조회: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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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고을에 낙향한 정승이 살고 있었다. 이 정승은 학식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 고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주역에 능통하여 점도 아주 잘 쳤다. 정승댁 뒷 마당에는 큰 대추나무가 있었는데 밤이면 동네 젊은이들이 서리를 해가곤 했다. 대추를 따가도 워낙 점잖은 정승은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어느 달 밝은 밤, 사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또 서리꾼들이 대추서리를 온 모양이었다. "조금 따가지고 가겠지"하고 생각한 정승은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리꾼은 계속 대추를 따고 있었다. 작년에도 대추를 모두 서리 맞았는데 금년에도 몇차례 따 가더니 오늘은 아주 다따갈 모양이었다. 점잖은 정승도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래서 문을 벌컥 열고는 "이놈들아 나 먹을 것도 좀 남겨놔라, 나도 맛을 좀 봐야 할 것 아니냐?"라고 말하자 서리꾼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중 나무위에 서 있던 젊은이가 너무 급한 나머지 깜짝 놀라 뛰어내리다 다리를 뼜는지 절룩거리며 달아나는 모습이 달빛에 보였다. 정승은 마음 속으로 "아뿔사,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하고 생각하며 점을 치기 시작했다. 점을 쳐보니 자기의 7대 손자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을 괘였다. 한참 생각한 정승은 지필묵을 꺼내 뭐라고 써서 조그만 함에 넣고 봉한 후 겉에다가 「7대손 개봉」이라고 써 놓았다.

정승은 나중에 죽을 때 유언하길. "내 7대 손자가 장가드는 날 이것을 열어 보도록 해라"하고 죽었다.
세월이 흘러 7대 손자가 태어났다. 정승의 공덕으로 후손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는데 웬일인지 7대 손자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 나이 열 살 되던 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마치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는 제법 청년티가 나는 잘 생긴 학동이 되었다. 이웃 마을에는 예쁜 처녀가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학동을 보고 사모하게 되었다. 어느 봄날 학동이 글방에를 가고 있는데 처녀가 담장 안에서 넘어다 보며 손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학동의 얼굴에다 세 번을 반짝반짝 비추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것으로만 생각했으나 며칠동안 지나칠 때마다 그 짓을 되풀이 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학동은 훈장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원래 훈장은 홀아비로 그 처녀를 마음 속으로 사모해 오던 터인데 학동의 말을 듣고 보니 음흉한 마음이 생겼다. 처녀의 손거울 장난은 "그믐밤 3경에 찾아 오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믐날이 되자 훈장은 학동을 글방에서 자고 가도록 붙잡아 두고 학동이 잠들자 몰래 학동의 옷과 짚신을 신고 처녀를 찾아갔다.

자기의 뜻이 통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 처녀는 반갑게 맞았으나 엉뚱한 다른 사람이였음을 알게 된 처녀가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다. 훈장은 얼떨결에 처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는 말았다.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인 훈장은 급한 김에 신발도 신지 않고 글방으로 달려와 태연스럽게 옷을 벗고 잠을 잤다.

이튿날 관가에서는 범인으로 학동을 잡아갔다. 짚신과 흙에 묻은 버선이 물증이 되어 아무리 변명했으나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 마침내 학동이 사형을 당하는 날이 돌아왔다. 사형이 막 집행되기 전에 학동은 늙은 노모가 작은 상자를 들고 달려와 사또앞에 엎드리며 "잠깐만 기다려 주시유, 이것은 얘의 7대 선조께서 유물로 전하신 것인데 우리집 가보입니다. 장가가기 전날 열어보독 분부하셨지만 이제 죽게 되었으니 죽기 전에 이것이나 열어보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못 들어 줄 이유가 없으려니와 옛날 유명한 정승의 유품이라니 호기심도 있고 해서 사또가 관아에서 내려와 학동이 상자 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백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내가 당신을 구해 주었으니 당신도 내 손자를 구해 주시오" 이상하게 생각한 사또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와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관아대들보가 부러지며 폭삭 무너 앉았다. 사또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 상자를 열어보기 위해 대청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여지없이 깔려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정승이 써놓은 글의 뜻을 알게 된 사또는 재판을 다시하기 시작했다. 학동에게 자세한 경위를 들은 사또는 처녀의 손거울 장난 이야기를 누구누구에게 말했느냐고 묻자 훈장에게만 했노라고 대답했다. 훈장이 범인임을 간파한 사또는 당장 훈장을 잡아 족치자 하는 수 없이 이실직고 하고 말았다. 억울한 누명을 썼던 학동은 최에서 풀려나 행복하게 잘 살았다.

(보은읍 강신리 이종화, 남 59세 제보)
2001-08-11 12: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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