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사절
icon 보은신문
icon 2001-08-11 12:26:31  |   icon 조회: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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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고 외상 잘하는 샌님이 하나 있었다. 삼년 전에 먹은 술값을 금년에도 받기는 틀렸으니 멱살이라고 움켜잡고 옷이라도 벗겨 망신이라도 주고 싶은 주모의 심정이지만 꼴에 빌어먹을 양반이라 마구 다룰수도 없을 뿐 아니라 끼니 거르기를 밥먹듯 하는 처지라 차마 다 떨어진 옷 한 벌 벗길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오늘 아침 개시도 하기 전에 또 온 것이다. 보나마나 술 먹고 외상할 것이 뻔한 노릇이나 속이 상한 주모는 한 꾀를 생각하여.

"샌님 제 부탁하나 들어주시려우?" 하고 물었다. 자기를 본체만체 하던 주모가 오늘은 웬일인지 먼저 말을 걸어 오는지라 샌님은 반가워 "내 본시 짧은 밑천 가지고 술장사랍시고 하고는 있는데 술먹고 술값 안내는 샌님 같은 사람들이 많아 장사를 못하겠소. 앞으론 외상으로 술 자시는 손님은 받지 않겠다고 써 주시오. 그러면 제가 술 한잔 드리리다."

샌님은 필시 주모가 자기한테 하는 말임을 알고 있으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이미 약조를 하였고 또 술을 한잔 주겠다니 하는 수 없이 붓을 들어 "외상사절"이라고 써 주었다. 주모는 좋아하며 술청 기둥에다 떡하니 붙여 놓고는 술을 한잔 부어 치하했다. 벼룩도 낮짝이 있지 삼년전 외상값이 그대로 있는 주세에 어찌 주막을 자주 찾을 수 있으리오.

오늘도 차마 걸리지 않는 발길을 끌고 찾아온 주막인데 글값으로 술 한잔 얻어 먹으니 기분은 그만이나 그가짓 술 한잔으로는 간에 기별도 오지 않는다. 입맛을 쩝접 다시며 주모의 눈치를 살피나 주모는 모르체 하고 마당에 멍석을 펴고 부엌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고두밥 시루를 내다가 멍섯귀에 펴고 있었다.

술 한잔 더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으니 자기 손으로 써주고 차마 외상달라 할 수는 없고 마당에 널고 있는 고두밥을 보니 시장기가 활 돌며 그거나마 한줌 얻어 먹고 싶어서 "주모, 고두밥이라고 한줌 주게"하고 말했다. 꼴에 양반이라고 말끝마다 하대를 하는 샌님의 꼬라지에 비위가 상한 주모는 못들은 체하고 고두밥에다 누룩을 확 붓고 버무려 버렸다.

샌님도 주모의 매정한 처사에 슬그머니 화가나서 주모를 골탕먹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주모가 누룩 섞은 고두밥을 잘 펴 널고 뒷곁에 무슨 볼 이리 있는지 돌아가자 때마침 딹들이 쪼르르 몰려와서 멍석 위에 고두밥을 헤집어 가며 쪼아 먹는다. 그러나 샌님은 쫓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닭들이 먹는 양을 구경만 하고 있다. 주모가 달려와 닭을 쫓고 화를 내며 샌님을 나무란다.

"원 세상세! 샌님도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요? 사람먹는 음식을 닭이 먹고 있는데도 본체만체 하고 있다니" 주모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악을 쓰며 소리치자 샌님이 말하길 "흥! 난 또 그 닭들이 맞돈내고 먹는 줄 알았지"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자 주모는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리고 있더란다.

(보은읍 교사리, 김종희 남 45세)
2001-08-11 12: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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