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도련님
icon 보은신문
icon 2001-08-11 12:24:01  |   icon 조회: 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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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고을에 정승이 살고 있었는데 대대로 명재상이요, 명신으로 대를 이었으나 이 사람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별의 별빗을 다 해 보았으나 늙게까지 아들이 없고 딸만 두명되었다. 정승은 하는 수 없이 양자를 얻어 드리게 되었는데 이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장난질만 좋아하였다. 하도 장난이 심하여 화가 난 정승은 아이를 도로 생가에 데려다 주라고 일렀다.

애를 업고 생가로 가던 청직이가 도련님을 매우 딱하게 생각하여 "도련님은 어찌 그리 지각이 없으시오? 글만 열심히 읽으면 그 집 재산은 모두 도련님 것이여 이 다음에 높이 될텐데 장난만 치다가 쫓겨나 그 복을 스스로 차 버린단 말이요?" "이 사람아, 지각 없긴 누가 지각이 없어. 내가 글을 몰라 읽지 않는 줄아나? 만약 글 읽는데 정신을 들이면 서고 쌓인 책을 모두 읽으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글 읽다 한세월 다 보내고 머리가 희어질 것이며 그까짓 재산과 벼슬이야 스스로 타고난 분복기 있는데 윗대의 찌꺼기를 버린단 말인가?"

청직이가 데려다 주고 돌아오자 정승은 도련님은 무슨말을 않더냐고 물으니 그 이야기를 했다. "사람은 의기가 첫째요. 학문은 둘째인데 그 놈의 말이 그만하면 쓸만하니 아주 쫓아 버릴 수 없구나" 하고도 도로 데려다 길렀다. 하루는 정승이 조회에 갔다 돌아오니 사랑방 장판 바닥이 한곳도 성한 곳이 없었다. 송곳으로 방바닥을 찔러 곰보를 만들어 놓았다.

필연 아들의 짓이려니 하고
"장판을 누가 이렇게 했느냐?" 하고 물으니 녀석은 방구석의 송곳을 가리키며
"벼룩을 송곳으로 잡으려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잘 잡히지 않더이다." 하고 대답했다.
화가 난 정승은 아들이 어떻게 하며 장난을 하지 못하다록 하기 위하여 팥 한 말을 아들에게 주면서
"이 팥이 몇 개나 되는지 내가 오기전까지 세어 놓아라. 만약 어길 경우에는 엄히 꾸중하리라" 하고 나갔다. 그러나 아이는 팥을 만져 보려고도 하지 않고 놀기에만 열중하였다.

하도 답답하여 청직이가
"도련님 팥은 세지 않고 놀기만 하시다가 대감님 돌아오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꾸중을 들어도 내가 들을 텐데 왜 너희들이 몸이 달아 야단이냐?" 하고 집안이 떠들썩하도록 장난을 치며 돌아 다니기만 했다. 저녁때가 되자 아이는 하인들을 불러 모아서 거을을 가져 오라고 이르고는
"내가 팥을 세지 않는다고 저울에 달아보고 그 다음 한 말의 팥을 함께 달아서 순식간에 팥을 모두 얼마인지 계산해 보고는 다시 밖으로 나간다. 정승이 돌아와 아들을 찾으니 발소리를 쿵쿵 거리며 들어온다.

"팥이 몇 개이더냐?"
아이는 모두 몇만 몇천 몇백 몇십 몇 개라고 대답한다.
"네가 어느 틈에 그 수효를 다 세었느냐? 혹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자 아들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가 팥 하나 손에 대지 않고 숫자를 센 것을 자랑 삼아 말하였다.
일국을 흔드는 재상도 아들의 슬기에는 한 말이 없었다.

(보은읍 강신리, 이미래 여 39세)
2001-08-11 12: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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