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피접과 전설
icon 보은신문
icon 2001-08-07 16:23:06  |   icon 조회: 2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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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임금이 영월로 귀양보낸 어린 조카요, 선왕인 단종을 무참히 살해한 후 어느날 용상에서 낮잠을 잘 때였다. 단종의 어머니요, 형수인 현덕왕후(賢德王后-文宗의 )기 나타났다. 왕후는 노기띤 얼굴로 세조를 한참 노려 보더니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는 네 아들을 잡아 가겠다" 하면서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 깨어보니 가위를 눌린 것인데 전신이 땀에 홍건히 젖었다. 세조는 기분이 언짢아 가만히 앉아 있는데 맏아들인 도원대군(桃源大君-뒤에 德宗으로 추존된 成宗이 아버지)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세조는 현덕왕후의 짓이라 믿고 즉시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치고 왕후의 시신을 평민의 무덤같이 만들어 묻도록 하였다.

그날 저녁 세조는 꿈에 현덕왕후를 다시 만났는데 왕후는 눈을 흘기면서 세조에게 침을 뱉으며 사라졌다는 것이며 이튿날 침자욱이 곪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전의감(典醫監)을 통하여 좋다는 약과 의원을 총동원하여 갖은 치료를 다하였으나 허사였다. 세조는 마침내 자신의 병이 약으로는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부처의 힘으로 고쳐 볼 양으로 명산 대찰을 찾아 보기로 결심하였다.

말하자면 피접(避接)앓는 사람이 장소를 바꾸어 요양하는 것)을 하기로 결심을 한것인데 1464(世祖 10年 甲申)에 세조는 보은 속리산에 행차했다. 세조는 청주에서 피반령을 넘어 회인을 지나 다시 차령(車嶺-수리티재)을 넘어 보은으로 왔다. 그때 많은 일화를 남겼고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지금의 교암리 앞을 통과할 때였다. 연(輦-임금이 타던 덩모양의 가마)안에서 지루함을 달랠 길 없던 세조는 눈을 들어 길옆 냇가를 바라보며 가고 있었다. 그때 장엄한 바위가 푸르스름한 냇물에 수려한 자태를 비추며 마치 일행을 맞아들이는 형태로 보였다.

그런데 그 바위를 보자 세조는 지난날 왕위를 빼앗고자 많은 충신을 참혹하게 처단한 일과 어린 조카를 살해한 일들이 머리에 주마둥처럼 떠올라 자책감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세조는 행렬을 멈추게 한 후 바위 앞에 나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바위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바위는 세조의 모든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부드럽게 감싸안는 듯이 세조에게 느꼈다. 얼마를 그렇게 바위 앞에 서 있던 세조는 바위를 가리키면서 "이 바위는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바위다"라고 말하며 그곳을 떠나 속리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바위 이름을 "가르침바위(敎岩)"이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1939년 국도(청주∼진해선)를 개설할 때 화약에 바위는 폭파되어 그 모습을 찾을 길 없고 가르침바위를 어원으로 한 마을인 교암리가 있을 뿐이다. 세조의 행렬이 보은읍을 거쳐 누저(지금의 누청)리 앞을 지나 속리쪽으로 낮으막한 고개를 막 올라섰을 때였다. 행열 앞에 한 늙은 중이 나타나 세조 앞에 합장 배례를 드린 후
"대왕마마. 이 고개넘어 오봉산이 있아온데 이 산아래 행궁(行宮-임금이 여행길에 묵는 별궁)을 지으시고 오고 가실 때 쉬어 가소서"하고는 구름처러 사라졌다.

세조는 너무나 신기하여 노승이 말한대로 행궁을 짓게 하고 행궁 앞산에 북을 달아 아침 저녁으로 북을 쳐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 주도록 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노승이 나타났던 고개를 미륵불이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라 하여 "미륵댕기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오봉산 아래 행궁을 지었던 자리를 "대궐터" 그리고 북을 달았던 것을 "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미륵댕기는 현재 통일탑이 서 있는 곳에서 속리쪽으로 가는 작은 고개를 말하는 것이고 대궐터란 장재저수지 아래 집단한옥 마을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한 마을의 이름이다. 말티재를 넘은 세조의 일행이 내속리면 상판리에 당도하니 길기에 우산모양을 한 큰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서 있었다.

세조는 소나무 아래 잠시 쉰 후 다시 길을 떠나려고 연을 타고 보니 늘어진 가지에 연이 걸릴 것 같았다. "연 걸린다"하고 세조는 연을 멘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축 늘어져 있던 소나무가지하나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참으로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또한 이 소나무는 세조가 피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소나무 아래 이르자 갑자기 소나기가 왔고 세조 일행은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세조는 "올 때 신기하게 나를 무사히 지나도록 하더니 이제 갈 때는 기특하게도 비를 막아주니 참으로 기특하도다" 하면서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晶二品-판서급)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이 소나무를 "연거랑이소나무(輦 松)"혹은 정이품송"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 103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좌, 우 양옆으로 울창한 노송이 즐비하게 서 있고 사이사이에 절벽과 괴석이 솟아 있는 사이로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 냇물에 10여인이 편히 쉴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웅덩이가 있는데 "목욕소"라 부른다.

세조는 속리산에서 피부병에 대한 요양도 하였거니와 고승들에게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회도 갖도록 하였다. 특히 복천암에는 당시 유명한 학조대사(學祖大師)와 신미(信眉), 학열(學悅) 등 법사들이 모여들어 대법회를 열었다. 세조는 법회중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신하를 물리치고 홀로 산책을 하다 이 웅덩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었다. 발이 시리도록 찬 물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맑은 물에 심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목욕을 했다.

그때였다. 세조 앞에 미소년이 나타나더니 "마마. 소생은 월광태자올시다. 약사여래(藥師如來-중생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는 부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대왕의 병은 곧 완쾌될 것이오. 너무 고심치 마옵소서"하고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미소년이 서 있던 곳에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일이었으나 세조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였다.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 보니 그렇게도 흉측하던 종기가 깨끗이 없어 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조가 목욕을 하고 병을 고쳤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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