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군 회북면 부수리 1구 향교골에 탑사리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이 홍정승의 집터였다고 한다. 홍정승이란 조선 예종 때 영의정(領議政-국무총리) 홍윤성(洪允成)을 말한다. 홍윤성! 그는 조선 오백년을 통하여 가장 파격적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파격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도덕, 법률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았다는 것이고 그가 그와 같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보장해준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그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는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그가 한강에 이르렀을 때 수양대군이 제천정(濟川亭)에 나와 놀고 있었다. 대군이 나와 놀고 있으므로 그의 종들이 수 십명씩 배에 올라타 손님을 내쫓고 뱃길을 돌리게 하며 배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홍윤성이 타고 있던 배에도 이 대군의 종들이 올라와 법석을 떨었다. 이에 홍윤성은 삿대를 꺾어 그 종들을 닥치는 대로 쳐서 한강 물속에 풍덩풍덩 던져버리곤 혼자서 유유히 배를 저어 강을 건넜다. 수양대군이 정자에서 이 꼴을 보고 그 시골 선비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을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영리한 수양대군은 이 일에서 자신의 쿠데타의 이 비범한 그의 체력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를 행동대로 썼던 것이다. 김종서(金宗瑞)를 죽이던 날, 저녁에 먼저 당시 훈련주부(訓練主簿-지금의 군인훈련소의 교육 계획장교)로 있던 홍윤성은 공사를 보고한다는 구실로 김종서의 집에 먼저가서 동정을 살폈다. 김종서는 당시 힘이 세다고 소문난 그를 불러들여 자기의 활 가운데 튼튼한 활을 골라 당겨보라 하였다.
홍윤성은 그 강궁(强弓)을 당겨 거듭 두 개를 꺾어 버리니 김종서가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첨에게 큰 그릇에 술을 부어주게 하니 세 사발을 마시고 돌아왔다. 세조임금이 신하들에게 술먹기 시합을 시킬 때 으뜸한 것도 그였다. 세조임금은 그에게 고래같이 마신다 하여 경음당(鯨音堂)이란 호를 지어주고 그 별호를 새긴 인장을 주었는데 홍윤성은 이 호를 평생토록 즐겨 썼다고 한다.
그는 치부하는 데도 파격적이었다. 다른 고관들이 숨어서 몰래 치부한데 비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그의 집압에서는 뇌물을 가져오는 심부름꾼이나 말수레, 가마꾼을 위해 문밖에다 솥을 건 집을 수십채나 지어 두었다. 그의 호화주택에 세조는 경해(傾海-바닷물이 기울어든다는 뜻)라는 익살스러운 집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경해속의 경음당"이라고 무척 자랑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격적으로 살다 간 그의 삶은 어느 면에서 매력이 있다. 그는 1425(世宗 7年)에 당시 회인현(懷仁縣)이었던 회북면 부수(富壽)리(당시는 校洞)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고 조실부모하여 숙부에게서 자랐다. 1450년(文宗 元年)에 문과(文科-문관을 뽑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1453년(端宗 1年)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성(金宗瑞)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이 되었고 1455년 세조(世祖)가 임금이 되자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인산군(仁山君)에 봉해졌다. 1467년(世宗 13年)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이듬해 세조임금이 죽자 신숙주, 한명회 등과 원상(院相-다음 임금이 즉위할 때까지 국사를 처리하는 정승)이 되었다.
1469년(宗 1年)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마침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470(成宗 1年)에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성종임금 즉위에 세운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우성(禹成)이었고 자는 수옹(守翁)이었다. 위평(威平)이라 시호 되었다. 부수리 탑사리들은 홍정승이 태어나서 자란 옛집이 있었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