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발령과 수리티재
icon 보은신문
icon 2001-08-07 16:09:02  |   icon 조회: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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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회인을 경유하여 보은으로 오는 국도에 청원군과 보은군계에 "피발령" 이란 높은 고개에 있고 회북면과 수한면계에 "수리티재"가 있는데 이 두 고개의 이름이 붙게된 데에 오리대감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오리대감(梧里大監)이란 조선 선조임금 때부터 인조임금에 이르기까지 세분의 임금을 영의정(領議政-국무총리)으로 보필한 이원익(李元翼)선생으로 그는 키가 남달리 작은 분으로도 유명한 분이다.
그는 천성이 단조롭고 대쪽같이 곧아서 자기의 할 일만 할 뿐이고 남과 번잡스럽게 어울린다거나 자기를 남에게 알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또 지극히 소탈하고 검사하여 정승을 오래 지냈으나 그가 사는 집은 비바람 조차도 피하기 어려운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초가집이었고 늙어 병들어 죽을 때는 약한 첩 쓸 여유는 물론 끼니조차도 변변하지 못했다는 분으로 많은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그 분이 경주목사(慶州牧使-시장)가 되어 부임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청주에 도착하니 경주호장(戶長-지방관서의 우두머리 관리)이 사인교(四人轎-네 사람이 메는 가마)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신임사또인 오리대감은 그때부터 사인교를 타고 임지인 경주를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음력 6월로서 여간 더운 날이 아니어서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가마를 메고 가자니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었고 호장은 호장대로 옷이 비에 젖은 것처럼 땀에 젖어 걷기조차 힘들었다.

청주에서 떠난지 한나절쯤 걸어가니 크고 험한 고개가 나타났다. 평지를 걸어도 죽을 지경인데 가마를 메고 한낮에 고개를 넘을 가마꾼도 가마꾼이지만 호장이 사또를 보니 키는 겨우 난쟁이를 면한 작은 키에 가마 위에서 천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우에 산천을 둘러보며 거드럭거리고 있는지라 저 키 작은 사또의 지혜를 시험해 보고 한번 골려줄 생각이 났다.

호장은 고개 밑에 이르자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사또 앞에 나아가 허리를 굽힌 후 "사또 이 고개는 삼남지방에서 제일 높은 고개이온데 만약 이 고개를 가마를 타시고 넘을 경우에는 가마꾼들이 피곤하여 회인가서 3∼4일 유숙하여야 합니다." 하니 "하루속히 당도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할 형편인데 도중에 지체할 수야 있느냐? 내 걸어서 고개를 넘을 것이다"하고 성큼성큼 고개를 걸어 넘다 보니 호장이 히죽이죽 웃으며 따라 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호장의 장난을 알아차린 오리대감은 속으로(이런 못된 놈이 있나?) 하고는 걸음을 멈춘 뒤 따라오는 호장을 향하여 "여봐라! 너와 나는 신분이 다르거늘 내가 걷는데 어찌 너도 걷는단 말이냐? 내가 걸으면 너는 마땅히 기어서 넘어야 하느니라" 사또의 지엄한 명령에 호장은 양손과 무릎을 발로 삼아 험난한 고개를 기어서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고개마루에 올라와 보니 호장의 손바닥과 무릎에는 온통 피가 나와서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하며 호장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 회인에서 하루를 쉬고 이튿날 보은으로 오는 도중에 다시 험한 고개에 닿았고 호장이 또 이 고개를 걸어서 넘으라고 하면 다시 기어오르라 할 것이 무서워 나무를 베어서 수레를 만들도록 한 후 수레위에 사인교를 태운 후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 뒤부터 "피발"이 되어 넘었다 하여 "피발령",수레로 넘었으므로 "수리티재"라고 불렀으며 한문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피발령은 피반령(皮盤嶺)으로, 수리티재는 차령(車嶺)이라 표기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 피발령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피발령을 넘어 회인으로 오는 길목에 고개 아래 오동(梧桐)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을 지나 한 이리쯤 오면 고석(高石)리와의 갈림길이 있고 이 갈림길 있는 곳에 "사근다리"라는 다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대장 이여송(李如松)은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가 조선의 산천을 보니 정기가 빼어났으므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요, 조선에 많은 인재가 나면 대국인 명나라에 큰 화가 미칠 것이므로 산맥을 끊어 지맥을 없애고자 산천의 지형을 자른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 이여송이가 싸움이 끝나고 귀국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다보니 산청 정기가 특출하므로 군사들에게 산허리를 끊도록 명령하였다.

군사들이 칼과 곡갱이 등으로 산허리를 자르자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고 그 피는 내를 이루어 흐르기 시작하여 지혈이 끊어진 곳에서 10리나 되는 지점까지 흘러가 없어졌다. 이리하여 피가 쏟아진 고개라 하여 이름을 "피반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피가 삭아 없어진 지점을 "사근다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01-08-07 1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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