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굴(龍窟)
icon 보은신문
icon 2001-08-28 18:30:00  |   icon 조회: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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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군 회남면 남대문리 속칭 "거쿠리"라는 마을 뒷산에 용굴이라는 부르는 길이 약 15m 되는 굴이 있다. 먼 옛날 이 굴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용굴"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글이다. 이 용굴은 천연동굴로 한발이 심할 때는 회인 현감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고 가물던 하늘이 기우제를 지내고 현감이 회인에 돌아가기 전에 비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굴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는데 이 용굴 속에 옹달샘을 "仁泉(인천)"이라 부르고 있다. 먼 옛날 이 거쿠리 마을에 서울에서 당파싸움에 쫓겨온 어느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일월"이라 부르는 미인의 여인 하나만 데리고 이 곳에 와서 숨어 살았고 그 여인은 벼슬아치의 사랑하는 기생첩이었다고 한다.

원래 어려서부터 글만 배운 탓으로 그 대감은 농사일이란 하나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일월은 주막을 차려 손수 술을 빚어 팔아 연명해 갔다. 그리고 일월은 팔을 걷어 부치고 때로는 산에 가서 나무도 해왔고 이웃집 농사일도 거들어 주면서 남편을 편안하게 모시고 살아갔다. 그러나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두 사람들인지라 나이 많은 영감이 젊은 아내를 의지하여 살아가는데 대하여 마을의 남녀노소들은 빈정거렸고 젊은 남정네들은 일월이 나무를 해올라치면 길목에 서서 골려 주었고 여인네들은 항상 방안에 틀어박혀 책만 보면서 가냘픈 젊은 아내를 부려먹는 대감에 대하여 대놓고 욕지거리를 하기도 하였다.

대감은 차차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꼈고 일월에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월의 곱던 얼굴은 이제 새까맣게 변해 버렸고 손은 마치 거북등같이 터졌고 손가락 마디마다 못이 박혔으나 여인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도끼삼아 남편을 봉양하였다. 대감은 더 이상 일월의 고생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음으로 일월의 고생을 면할 길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어느 날 일월이 나무를 하러 간 사이 새끼줄을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 용굴 앞에 서 있는 소나무 가지에 줄을 걸고 목을 매달았다.

일월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나라에 정변이 일나 다시 남편이 속해 있던 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동지들이 보낸 사람들이 남편을 찾아서 그들의 집에 도착하여 남편을 찾고 있었다. 일월과 서울서 온 사람들 그리고 비로소 그들의 신분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대감을 찾기 시작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대감을 발견하였다.

일월은 구슬피 통곡하면서 이미 싸늘히 굳어진 남편이 혹시 살아날까 하여 사지를 주므르고 용굴에서 나오는 샘물을 떠다가 대감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지를 주므르자 얼마 후에 대감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며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감은 다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이튿날 서울로 떠나가는 대감과 일월은 목숨을 건지게 해준 용굴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하여 생명을 구해 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생명을 구해 준 어진 물이라 하여 "인천(仁泉)"이라 이름짓고 떠났다.

그 뒤부터 이 물줄기를 "인천"이라 부르게 되었고 일월을 열녀라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대감을 살려 준 이 물줄기에 모여들었는데 물빛이 마치 우유색깔 같았으며 물맛이 차고 매웠다. 특히 이 물은 위장병 환자에게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하루에도 물의 양이 일정치 않고 많게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적어지고 적게 나오다가도 많이 나온다고 한다.
2001-08-28 1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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