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자를 백규(白圭),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참판(參判-오늘날의 차관) 육(陸)의 후손으로 일찍이 무과(武科-무관을 뽑는 시험)에 합격하여 선조 임금 때 형조좌랑(刑曹佐郞-오늘날 법무부 계장급)과 태안(兵馬節度使-오늘날 육군의 군사령관급)로 임명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이듬해 거사일에 작전지휘를 맡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해 후금(後金, 뒤에 淸)과의 마찰로 국경에서 싸움이 잦자 평나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사(副元師-오늘날 참모자장)로 발탁되어 영변(寧邊)에 군사를 두준시키고 성을 샇고 군사훈련으 실시하여 국경수비에 힘썼다. 1624년(仁祖 2年)에 그의 아들 전(전)이 당시 지식층과 친구가 되어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횡포로 정치가 문란케 되었다고 개탄한 일이 있었던 바 이것이 과장되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무고로 발전되어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정부에서 수사관을 파견하자 반정시 공로가 으뜸임에도 불구하고 공신등급을 책정할 때 정사 공신 2등(靖祀 功臣 2等)으로 취급한 일과 자신에게 의심을 갖고 있는 정부의 공신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되어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막강한 군사와 탁월한 작전으로 서울을 피 한번 흘리지 않고 점령하였으나 이튿날 도원수(都元帥 참모총장) 장만(張晩)이 지휘하는 정부군과 싸워 참패를 당하자 이천으로 도망하였다가 부하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현재 회남면 남대문리에 있는 이괄바위는 원래 산에 있던 바위라 하는데 이괄이 이곳을 떠나면서 이 바위를 가리키면서 "만약 이 바위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가 이천에서 부하인 기자헌에게 죽는 날 뇌성벽력이 일면서 그 커다란 바위가 절벽에서 무너져 내려 논에 떨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이 그 일로 하여 이 바위를 이괄바위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