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래 보(洑)
icon 보은신문
icon 2001-08-07 15:50:45  |   icon 조회: 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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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뒤에 영의정(領議政 - 국무총리)을 지낸 김자점(金自點)은 명장 임경업(林慶業)장군을 죽인 반역자다. 그러나 황해도 지방에 가면 그의 덕을 기리는 비가 이곳저곳에 적지 않게 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수리시설인 보(洑)를 가장 많이 그리고 잘 만든 사람으로 꼽힌다.

"자점(自點)이 보(洑)막듯 하여라"는 속담이 칠전팔기하라는 뜻으로 이야기되리만큼 그의 보막이 사업은 대단한 집념이 있었던 것이고 자연과 각박하게 대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 자연과 대결하여 자연과 싸워 그 자연을 굴복시켜 사람 측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어느 누구보다 훌륭한 것이다.

역사에서 반역자로 처형된 김자점이지만 황해도에 와서 수리시설인 보를 여기저기에 만든 김자점이 황해도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훌륭한 것이다. 현재 외속리면 하개리와 봉비리 앞들에 관개에 큰 몫을 하는 "진사래 洑"도 한 인간의 의지의 승리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일이다. 외속리면 봉비에 정가묵(鄭可默)이라는 이가 살았다. 그의 호는 난간으로 일찍 성균진사(成均進士)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독서와 산책으로 세울을 보냈다. 그런데 그때 마을 앞 수만평이나 되는 토지가 황무지로 되어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 하였으나 그 부근의 전답(田畓)들도 "달밤에도 가뭄이 탄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수리시설이 말이 아니었다.

원래 공익심이 남다른 데가 있던 그는 지방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그 앞을 흐르는 삼가천 냇물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할 것을 마음 먹었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발원하여 금강에 흘러가는 삼가천은 지금은 내속리면 삼가리에 큰 저수지를 막아 유수한 수리시설을 갖춘 냇물이었지만 그때는 이곳 외속리면 하개리에 이르면 냇물은 모두 자갈 속에 스며들어 장마때가 아니면 좀처럼 물구경 하기가 어려운 때라 이곳에 보를 막는 다는 것은 불가능으로 알던 때였다.

이것을 잘 아는 정진사는 이곳에서 약 십리가량 상류로 올라가 외속리면 서원리 북두무니라는 냇물 웅덩이에서부터 냇물 바닥을 파서 하류로 물길을 잡아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었지만 정진사는 동민과 하인들을 독려하여 냇물바닥을 파서 새로운 물길도 찾아가면서 계속해 하류도 파 내려왔다. 그리하여 하개리 마을 아래에 이르러 돌러 제방을 쌓아 보를 완성하니 엄청난 양의 물이 모였고 이 물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전답으로 개간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마을은 엄청하게 달라졌다. 가난한 빈촌에서 부촌으로 탈바꿈해 가니 비로소 정진사의 공덕이 크다고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洑이름을 진사(進士)에 보(洑)라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중에 사투리로 변하여 "진사래보"로 부르게 된 것이다.
2001-08-07 15: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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