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과 더러운 위정자들[펌]
icon 한국정론
icon 2005-09-08 11:27:50  |   icon 조회: 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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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였는데 그문서중 잘못된 부분이 있어 글을올린다

문제의 부분은 1965년 한일협정당시 독도를 김종필이 폭파하자는 소리는
오히라에게 농담이었고 협정문서에는 제3국 조정안을 김종필이 주장하였다고 되어있으나
미국에가서 김종필의 미국 국무부장관과의 대화를 보면 그가 직접 폭파주장을 하면
쿠테타정권이 위태로우니 미국의 힘을빌려 일본에게 유리하게 협정을 약속한 증거가 나와있다

당시 불법정권인 쿠테타세력 박정희 정권은 세력집권을 위하여 미국의 협조를 바랬으나
박정희의 공산당 군사부장이란 전력이 있어 미국에서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이에 일본장교전력의 박정희가 일본에게 미국의 신임을 요청하였고 반대급부로 일본은
한국의 전후보상처리를 일본에게 유리하게 하는 조건으로 미국에게 박정희정권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그후 박정희는 미국과 일본의 순방길에서 일본의 기시 일본 전수상에게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한국지사가 된마음으로 한국을 다스리겠다고 경례하며 충성약속까지한 박정희의 진면목에
한일협정은 박정희의 일본충성심과 일본에서 받은 정치자금 뇌물[ 6600만불받은것을 미국cia 첩보문서에기록되있고 그외에도 엄청난 뒷거래가 있었다]과
일본에게 그댓가로 이승만이 명시한 동해 국경라인을 무시하고 일본요구대로 협상대표인
김종필이 오히라에게 독도를 폭파하여 공해로 만들자하였고
오히려 오히라와 일본측에서 폭파까지 한다고 당황하였다
일본신문에선 한국이 자기땅이 아니라서 독도를 폭파하자고 하였다고 대서특필하였다

당시 한국내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굴욕적인 한일협정반대데모가 거세지자
김종필은 한일협정 문서에는 독도폭파를 기록하지말고 당시 한국에서 세력이 강한 미국에게
독도문제를 미국이 처리해달라고 제3국조정안이란 술수를 부렸으며
미국에 김종필이 가서는 미국무장관에게 독도는 갈매기만 사는 쓸모없는 섬이라며 폭파를
건의하였고 미국도 일본측과 협상한대로 독도를 한국과 일본 미군 폭격장으로 없애려하였다
이에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의 데모에 친일파정권인 박정희가 김종필을 미국으로 도피시키고
독도폭파를 보류해달라고 하며 민심을 진정시켜 집권연장에 안간힘을 쏟았다
당시 데모진압에 경찰병력으로 힘들어 군병력까지동원하였으니 엄청난 불안을 느꼈을것이다

김종필은 일본과 그당시 약속이행인지 아니면 일본에 약점이 있는건지 djp연합정권이 승리하자 곧바로 일본건너가서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새로 협정을 해야한다고 일본의 파기조건을 도왔으며 당시 김대중정부는 협정파기는 정부의 뜻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김종필의 도움으로 일본이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어쩔수없이 다시 한일어업협정을 새로 만들어야했다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때도 국무총리로서 한일협정 책임자를 자임하며 자신도 국회에서
해양수산부로 옮기고 해수부장관도 정부와 국민의 반대에도 자민련출신 김선길과 정상천을 기용하여
해양어업선을 독도를 깃점으로 않삼고 울릉도를 깃점으로 삼아 한국에 막대한 피해를준
현재 존재하는 친일파 김종필을 우리는 직시하여야한다

그외에도 불법쿠테타로 민주국가와 민주인사를 짖밟고 불법세력을 연장키위해
공화당창당자금과 추종세력확보로 떡값등 돈 살포위해서 일본서 사카린밀수등 4대부정부패의혹사건과
다른나라 배상에 비해 싸구려로 받은 일본강제동원피해자 배상금유용과
저임금탄압정책과 기업에서 뇌물수뢰등 반인권전력등 공동정범전력과
그후 김종필의 동화은행구좌에서 한보그룹 부정대출 100억원 뇌물수뢰와 자민련 공천뇌물비리와 삼성그룹15억원 뇌물사건의 주범으로 추악한 비리와 부정축재자이며
입으로는 국가안보를 내세우며 자기손자는 병역기피위하여 외국국적으로 바꾼 정말 더러운
위정자이다

밑에는 이재봉교수께서 미국무부자료를 조사하여 집필한 것을 필요없는 부분은 삭제하였고
당시 집권세력의 매국 현장이 낱낱이 공개돼있다


독도문제의 뿌리는 박정희와 김종필
[논단] 일본과 미국에 먼저 폭파제안, 한미일 3각공조 붕괴효과는 긍정적
bpm@chol.com>이재봉 bpm@chol.com>pbpm@chol.com

아마 3월 한 달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웠던 논란거리는 독도 문제였을 것이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일본쪽 주장에 대해 거의 온 국민이 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던 듯하다.

일본에 대한 항의와 분노의 표시로 손가락을 자른 사람도 있었고 목숨까지 내던지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장회의 (NSC)는 일본에 대한 새로운 외교 방침을 발표하고 대통령은 '외교 전쟁'이란 말까지 할 정도였으니, 정부 차원의 '조용한 외교'조차 떠들썩한 외교로 바뀐 셈이다.

그런데 일본의 염치없는 억지와 반성없는 망언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본이 저런 짓거리를 하는 데는 지난날 한국의 친일파 위정자들이나 지식인들이 부추긴 점도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밝힌다.

-독도 폭파는 한국이 일본에 제안, 미국도 고려-

지난 1월 17일 1960년대 한일 협상과 관련된 외교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일본이 독도 폭파를 제안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62년 9월 일본의 협상 대표인 외무성의 한 국장이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협상 대표인 외무부의 한 참사관은 두 달 뒤인 1962년 11월 "(한일간에) 모처럼 조성된 좋은 분위기가 깨질 염려가 있으므로 제 3국에 의한 조정에 맡기자는 제의를 김종필 정보부장이 하게 된 것이며, 이는 김부장의 최종적인 생각이다"고 대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6년 공개된 미국의 외교 문서에 따르면 5.16 쿠데타 이후 '제 2인자'로 행세하며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의 오히라 외상에게 독도 폭파를 제안했다. 김종필이 1962년 10월 일본에 건너가 한일 협정의 기초를 마련했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에 합의하고 바로 미국을 방문하여 러스크 국무부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미국 국무부 '비밀 문서'로 분류된 1962년 10월 29일의 김종필-러스크 대화록을 보면, 두 사람이 한일 협정에 관해 얘기하는 가운데 쟁점이 되고 있던 독도에 대해 러스크가 그 섬이 무슨 용도가 있느냐고 묻자, 김종필은 "갈매기가 들르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김종필이 오히라에게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다고 말하자, 러스크는 자신도 그 해결책을 생각해냈다고 대꾸했다.

나아가 오히라는 독도 문제에 관해 일본 사회당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며 김종필의 제안에 만족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1963, Volume XXII, Northeast Asia, 610-612쪽). 독도 폭파를 한국측이 제안하고 일본측이 거절했던 셈인데,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내용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며칠 전 어느 라디오 평론가는 한 아이를 둘러싼 두 어머니의 다툼을 해결했던 '솔로몬의 지혜'를 소개하면서,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주장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는 과정에서, 아이를 둘로 나누어 가지라는 솔로몬의 말에 진짜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포기한 반면 가짜 어머니는 그 제안에 찬성함으로써 진짜 어머니를 찾아낼 수 있었듯이, 일본이 독도의 진짜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폭파를 제안했던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1960년대 초 한국 최고 통치자의 대리인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이 독도 폭파를 제안한 데 대해 일본이나 미국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게다가 1965년엔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을 방문하여 러스크 국무부장관에게 한일 협정을 위해 독도를 폭파해버리고 싶다는 망언을 했다. 바로 이러한 친일파 위정자들의 망언 때문에, 설사 한일 협상이 잘 풀리지 않은데 따른 푸념이었을지라도, 일본이나 미국은 한국이 독도의 진짜 주인이 아니라거나 진짜 주인일지라도 영유권을 쉽게 포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게 되지 않았겠는가.

참고로 1962년 김종필과 대화를 나누며 독도 폭파를 고려하고, 1965년 박정희와 대화를 나눌 때는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독도에 등대를 세워 두 나라가 함께 이용하기를 제안했던 러스크 국무부장관은 1945년 8월 육군 대령으로 3.8선에 의한 한반도 분할을 소련에 제안했던 사람이었다. 한반도의 국토 분단을 이끌었던 그가 분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나중엔 독도를 폭파하자거나 한일 두 나라가 공동으로 사용하기를 제안했던 것은 친일파 정치인들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억지를 비난하고 그러한 일본 편을 드는 듯한 미국의 자세를 비판하기에 앞서,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하다 미국에 굽실거렸던 한국의 위정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어떠한 언행을 저질러왔는지 밝히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해방 직후 친일과 부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업보이지만, 60년이 지난 이제라도 과거사를 제대로 밝혀야 할 필요가 이런 데 있는 것이다.

-독도 문제로 친미파의 반발과 친일파의 저항없이 깨지는 한미일 3각 공조-

한편,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온 점도 있는 것 같다. 동북아에서 새로운 냉전을 불러올 수 있는 한미일 3각 공조 체제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중국-북한의 북쪽 3각 공조에 맞서 미국-일본-남한이 남쪽 3각 공조를 이루는 게 당연했다. 당시엔 반공이 최고의 안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뒤에는 미국이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핑계삼아 일본과 남한을 끌어들여 찰떡같은 3각 공조를 추구해왔다.

예를 들어, 미국은 냉전 종식 직후부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여온 가운데, 1996년 4월엔 '미일 안보 공동 선언'을 채택했고, 1997년 9월엔 이를 바탕으로 두 나라 사이에 '새로운 방위 협력 지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1999년 4월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구실로 남한을 끌어들여 '3각 정책 조정 그룹 (TCOG)'을 출범시켰으며, 1999년 11월엔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미사일 방어망 (MD) 체제를 세울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러한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며 군사 협력을 크게 강화하기로 하였고, 북한도 중국 및 러시아와의 우호 및 협력 관계를 강화해나갔다. 1990년대 이전처럼 미국-일본-남한의 3각 공조와 중국-러시아-북한의 3각 공조가 다시 맞서는 "제 2차 세계 냉전 체제" 또는 "신냉전 체제"가 들어서려 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체제가 굳어진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멀어질 수밖에 없을텐데, 앞으로 남한과 일본 사이에 '외교 전쟁'까지 벌어지게 되었으니, 독도 및 교과서 왜곡 문제가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는 잘 터진 것 같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고 따질 것은 따지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배경은 지난날처럼 무턱대고 미국을 따르는 것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 있을 것이다. 이런 터에 독도 문제를 계기로 한미일 공조 대신 '동북아 균형자론'이 친미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의 큰 저항이나 반발없이 힘을 얻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패거리 만들기에 휘둘리지 않고, 좁게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넓게는 미국-일본의 해양 세력과 중국-러시아의 대륙 세력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대외 정책을 지지한다.

* 필자는 원광대 교수로서 '남이랑북이랑'(http://pbpm.hihome.com/)의 편집인입니다.

*본문은 폴리티즌과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진보와 정론의 인터넷마당 대자보'(www.jabo.co.kr)에서 제공한 것으로, 다른 사이트에 소개시에는 원 출처를 명기 바랍니다.
2005-09-08 11:27:50
61.248.10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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