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더 나은 세상을 가져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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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05-04-05 10:56:45  |   icon 조회: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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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더 나은 세상을 가져올 것인가?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개혁 운동을 시작했을 겁니다!”
80세 된 독일 여성인 안나가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무엇을 바꾸고 싶으신데요?” 로버트가 물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요!” 안나가 대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의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에 독일에서 실시된 한 여론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3명당 2명은 ‘광범위한
개혁과 중대한 사회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당신이 사는 나라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대중이 변화를 부르짖으면, 대개 개혁에 대한 약속이 뒤따릅니다.
교육 개혁과 관련하여, 교육학 및 정부학 조교수인
프레더릭 헤스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개혁이란 대체로, 조바심을 내는 공동체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기울이는 상징적인 노력이다.”

신문을 보면, 재정 개혁, 보건 개혁, 농업 개혁, 법제 개혁
정치개혁, 사회개혁등 개혁계획을 알리는 기사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교육 제도, 복지 제도, 형벌 제도의 개혁안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기도 합니다.
또한 일부 교회의 신자들이 교리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될 때도 있습니다.

개혁 대 기존 체제 유지

변화에 대한 그러한 요구 뒤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인간은 주위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인간은 투표, 비용 지출, 법률 제정, 완력을 통해 개선하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이것은 삶의 처지를 개선하거나 자녀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거나
복지와 도덕과 정의에 대한 사회의 수준을 이상적인 개념에 부합할 정도로
끌어올리고 싶어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열망의 산물입니다.
무지와 질병과 가난과 굶주림의 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은 계속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혁을 반기지만, 개혁가들과 그들이 이루려고 하는 일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사회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다시 말해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합니다.
그들은 개혁가들을,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지만
현실 감각을 잃은 이상주의자로 간주합니다.

「독일 개혁 운동 안내서 1880-1933」
(Handbuch der deutschen Reformbewegungen 1880-1933)에서는
개혁가들이 “비판, 정치 만화, 캐리커처, 풍자의 손쉬운 표적”이라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의 극작가인 몰리에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온갖 어리석은 생각 중에서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개혁을 통해 세상을 개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개혁가들은 한갓 낭만적인 몽상가에 지나지 않습니까?
과거에 도입되었던 개혁의 경우에는 어떠합니까?
그러한 개혁을 주창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목표를 이루었습니까?

개혁가들에게 해결책이 있는가?

부정한 사업 관행, 편파적인 법 집행, 사회적 불공정, 빈약한 보건 시설,
질 낮은 학교 교육,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갈취, 환경 파괴.
이러한 문제들에 접하게 되면 우리 대부분은 실망 섞인 한숨을 짓습니다.
개혁가들 역시 이러한 문제들이 도화선이 되어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개혁가들은 거의 모든 사회에 존재하며, 그들은 사회 내에서
질서 있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변화를 장려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나 혁명가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개혁가들은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일부 개혁가들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변화를
도입하기 위해 솔선합니다. 그런가 하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막후교섭을 벌여서 어떤 조처를 취하도록
촉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혁가들은 사회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재고해 보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단지 이의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제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개혁가들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로 주의를 끌기 위해 대중에게 호소하거나
가두시위를 벌이거나 대중 매체를 통해 문제를 널리 알리기도 합니다.
개혁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 중 하나는 사회가 그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개혁의 범위

또한 개혁가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까지 바꾸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어떤 개혁가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 방식을 장려합니다.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일어난 레벤스레포름(생활 방식 개혁)
운동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사회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삶이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 개혁가들은 자연 친화적인 생활 방식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들은 건강, 실외 활동, 자연 의학, 채식을 장려하였습니다.

어떤 개혁가들은 불공정을 폭로하며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상황을 바로잡게 합니다. 1970년대 초부터 환경 운동가들로 이루어진
단체들이 환경의 오용과 악화에 항거해 왔습니다.

이러한 단체들 중 일부는 그 후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한 운동가들은 단지 환경 위험에 대해 시위하고 항거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상황을 해결하는 법에 대한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바다에 유독성 폐기물을 갖다 버리는 행위와
고래를 잡는 행위에 대한 법률을 개정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가톨릭 교회의 평신도들
가운데서 개혁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독신제 문제에 변화를 가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영국 국교회 내의 개혁가들은 여성의 사제 서품을 허용하는 변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좀 더 최근에 와서는 기본적 자유와 공민권과 인권이 점점 더 강조되면서,
기본 인권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자와 박해받는 개인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단 개혁이 단행되면 흔히 예기치 못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20세기에 공직자로 활동했던 존 W. 가드너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개혁가들이 자신이 단행한 개혁의 결과를 오판하는 일이 그토록
자주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몇 가지 예를 고려해 보십시다.
1980년대 초부터 유럽 공동체는 목초와 히스의 자생지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농업 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새로운 농업 정책으로 인해
독일과 이탈리아에 있는 30만 헥타르의 경작 가능한 토지를 목초지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도는 좋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있었습니다.
국제 연합 환경 계획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러한 지역의 생태학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여겨 반겼지만,
그처럼 ‘따로 구분해 놓는’ 조처에도 부정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전통적인 농업 방식을 버리고 부적절한 형태의 산림 관리나
조림 방식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노력과 관련하여, 국제 농업
개발 기금에서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제도 개혁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모든 노력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제도는 대개
권력이 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개설되어 운영되기 십상이다. ··· ‘
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방의 제도를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예로 여성 운동이 있는데, 이 운동은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고등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확대하는 등
서구 세계에서 여성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여성 해방을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조차 여권 신장 운동을 통해
해결된 문제들도 있지만 오히려 악화된 문제들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저술가인 수전 밴 스코요크는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의 처지를 실제로 개선시켰는가, 아니면
여성의 개인 생활에서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지는 않으면서
여성이 직장에서 평등한 입장에 있게 되기만을 기대함으로
오히려 여성을 생지옥으로 몰아넣었는가?”

실속 없는 개혁

일부 개혁가들은 개혁을 위한 개혁을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학교 개혁에 대해 연구해 온 프레더릭 헤스는 자신이 실속 없는 개혁이라고
부르는 개혁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범위한 개혁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비참한 결과를 거두게 된 것은
개혁 사업 자체의 본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 노력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매혹적인 방해 요인이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그러한 노력을 통해 해결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문제들이]
실제로는 악화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개혁이 단행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몇 년마다 전 과정이 새로 시작되게 된다.”
또한 개혁은 결국 다른 대의, 때로는 해롭기까지 한
대의를 조장하게 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있었던
레벤스레포름 운동은 우생학 이론, 다시 말해 더 튼튼한
자손을 낳을 부모를 선택해서 인종을 개량하는 법에 대한
학문이 발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들은
우수 민족을 만들려는 이념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국가 사회당을 지지하기 위해 그러한 지식을 오용하였습니다.
심지어 개혁을 열렬히 주창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그 결과에 실망합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우리 모두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흔히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때때로
사무총장이 이끄는 사무국이 그에 대해 뭔가 조처를 취하라는
지시를 받지만, 그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따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세계의 양심을 일깨우고 싶어도, 과거에 한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아무도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개혁가들은 인기를 얻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대의로 주의를 이끎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현대 역사학 교수이자
개혁가에 대한 전문가인 위르겐 로일레케는
「디 차이트」지에 인용된 자신의 글에서

“개혁가는 언제나 살에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의 개혁가들은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폭력을 사용하지 않지만, 일부 개혁가들은 일의 진척 속도가 느릴 경우 조바심을 내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개혁 운동으로 인해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호전적인 사람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최근 여러 해에 걸쳐 널리 일어난 개혁으로 인해 일반 사람들의
삶이 더욱 만족스러워졌습니까?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 행해진 몇몇 여론 조사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지난 약 35년 동안 삶에 대한 만족도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종교는 어떠합니까?

종교계에서 일어난 개혁은 더 많은 신자들을 끌어들였습니까?
신자들은 종교에 더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 세계가 점점 더 세속화되어 가고 있고
사람들이 기성 종교에 대해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합니다.

개혁보다 나은 것

나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열매를 맺는다면, 가지 몇 개를 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무를 베어 내고 그 뿌리를 땅에서 뽑아낸 다음,
다른 나무 즉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마태 7:16-20.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결한 목표를 가진 개혁가들이라 하더라도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폐단의 증상들―부패, 불공정, 궁핍, 강탈―만을 다루게 됩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전체 제도입니다.
성서에서는 바로 그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하늘 정부이며, 그 정부는 인간 사회를 재구성하거나
개조하거나 재조직하거나 개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아니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 정부는 인간사를
운영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그 통치 아래
모든 인류를 연합시킬 것입니다. 이 정부는 교육, 직업, 주택,
영양, 건강, 환경과 같은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시편 72:12-14에서는 메시아 왕이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예언적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가난한 이를, 또 괴로움당하는
자와 도와 줄 이 없는 모든 자를 그가 구출할 것[입니다].
그는 낮은 자와 가난한 이를 아껴 보고 가난한 이들의
영혼들을 구원할 것이며, 그들의 영혼을 압제와 폭력으로부터 구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부패와 불공정과 궁핍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려면,
분명히 정부도 변해야 하지만 사람들도 변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왕국은 개개인에게 즐겁고 목적 있는 보람찬 삶을
살아가는 법에 관한 개인적인 지침을 제시할 것입니다.
성서의 약속에 따르면 하느님의 왕국은 지상 신민들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것입니까?

왕국은 여호와 하느님의 방식으로 신민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믿음과 사랑을 발전시키도록 도울 것입니다. (이사야 11:9)
하느님의 대한 사랑은 마음을 움직여 행동을 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1세기에 예수께서는 수석 세금 징수원인
삭개오를 만나신 적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부풀려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부패한 관리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가 부끄러워하며
자기 행실을 변화시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삭개오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삭개오는 경건한 원칙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는 놀라운 변화를 하였습니다.―누가 19:1-10.

이것은 사회의 결함을 고치는 월등한 방법이 아닙니까?
인간사를 관장할 완전하고 의로운 정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자기 행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개인적인 동기까지 부여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때에도 개혁이 필요할 것입니까? 더는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계시 21:4, 5.
2005-04-05 10: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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