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 들

김 혜 숙(보은농협 내북지소 부녀복지 과장)

2001-07-14     보은신문
오랜 가뭄끝에 내린 단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타들던 농부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우리 모두에게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수 있게 해주었다. 농협에 몸담고 일해온지도 어언 15년, 그동안 숱하게 보아온 농업인들의 아픔이 있었지만, 금년 봄처럼 안타까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어찌 그분들의 아픔에 비할수 있으련마는… 그러나 그런 어려움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밝고 꿋꿋하게 살아가며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아름다운 이웃들이 있기에 이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농촌주부들을 대상으로 취미교육을 실시하면서 솔직히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풍물교실과 스포츠댄스교육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가던중 주변에서 쏟아지는 비난의 소리도 만만치 않았던게 사실이다. 특히 스포츠댄스 교육은 아직 농촌에선 생소한 부문이었기에 우려의 목소리 또한 높았다. 주부들이 금새 춤바람이난 것처럼 왜곡했고 계획을 취소하라는 종용도 뒤따랐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행정관청의 지원과 배우자의 동의서를 얻는등 온갖 어려움속에서 교육을 마칠수 있었다. 도시 여성들에 비해 아직도 우리 농촌주부들에겐 너무나 멀고먼 길이었다. 또한, 풍물교실은 농촌여건상 밤에 실시되었기에 그 또한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교육에 임하는 그분들의 열정만큼은 도시의 그 누구에게도 못지않았다. 종일토록 밭에나가 힘들게 일을 하고 땅거미가 내린 뒤에야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준비해 가족들을 챙겨준뒤 파김치가 된 몸을 미처 뉘어볼새도 없이 농협으로 달려오는 그분들을 보며 난 정말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모이다 보면 저녁 8시, 교육이 끝나면 자정이 가까워온다. 그러나 장구채, 북채를 손에 쥐고 가락에 취하다보면 어느새 온갖 시름을 잊는다는 그분들! 나는 그분들의 그런 모습에서 이 글을 떠올려본다. "가슴뛰는 일을 할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의 행위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릴앙카]

지난 대보름엔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신밟기를 하던중,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그날따라 몹시 바람이 불고 차가운 날씨이었기에 난 극구 그분들을 말렸지만 교통사고가 잦은 길목을 찾아, "거리제" 를 드리겠노라고 그 얇은 농악복을 입은채 십여리 길을 걸으며 기원하던 그분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또한번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금 농촌현실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쌀소비가 줄어 지난해 수매한 벼가 아직 창고에 쌓여있고 이러다보면 금년 추곡수매조차 어렵게 될지도 모르는 전망이기에 우린 "아침밥먹기운동" 및 출향인사께 편지쓰기를 전개하고 있다. 도시민들이 조금만 우리 농촌을 생각하고 빵과 라면 대신 밥을 먹고, 어려움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는 농업인들을 기억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 될까?

오늘도 그 바쁘고 힘든 중에, 오히려 직장생활에 김치담글 시간도 없을것이라며 귀한 금치를 담가 가져오시고, 텃밭에 상추가 아주 연하게 자랐다며 한웅큼 뜯어와 건네주고 가시는 그분들의 마음이 또 한번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부디 이번 장마에는 그분들의 가슴에 더이상 상처입는 일이 없기를 마음속 깊이 빌며, 내가 그분들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올 가을엔 오랜 가뭄을 딛고 일어선 그분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있기를 기원하면서.

<정이품송>